제173화
제173편
‘제대로 된 스킬 하나 써 보지 못하고 내게 당했다는 건 역시 나를 엄청나게 얕봤다는 거겠지.’
마지막에 사용한 불길한 예감의 영향이 컸을 거다.
집중력이 하락되어 제대로 된 공격을 설계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멍청하고 안일하게 나에게 덤빈 것 아닌가.’
남자가 말했듯이 괴단체가 전혀 타격을 입지 않고 공고하다는 건 그만큼 체계적이고 강력한 힘이 있다는 건데.
그에 반하면 남자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단체의 비밀이 발각되게 한 통제 불가능하고 그릇된 행동. 그렇다는 건 괴한이 독단적으로 내게 접근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은하준 씨.”
“네?”
나를 든 채로 한세희가 무겁게 말했다.
“그 귀걸이를 제게 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조사를 시작해야 하겠군요.”
“아…….”
물론 그래야겠지만, 어쩐지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저도 조사에 참여하고 싶어요.”
“……그건.”
“한세희 길드장님의 능력이라면 저를 조사에 참여시킬 정도는 되시겠죠.”
한세희는 긍정의 시선을 보냈지만, 그리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알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는 제가 조사에 참여하건 하지 않건 그건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미 그 단체의 표적이 됐으니까요.”
괴한의 행동이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었다면 이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겠지만.
“하다못해 이 귀걸이를 신선 길드 소속 연구원에게 한번 보여 주고 싶은데요.”
“……정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야. 물건을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곧장 보고가 올라갈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여기를 정리한 뒤에 말이죠.”
한세희의 등 뒤로 치솟는 불길이 보인다. 괴물을 잡기 위해 헌터들이 사용한 스킬이었다.
“에휴, 정말이지 일이 복잡하네.”
나도 모르게 한숨과 넋두리가 나왔다.
“그러게 말이에요. 은하준 씨는 왜 항상 이렇게 복잡한 일에 말려들어 있는 겁니까?”
“그, 그러게요?”
“좋지 않은 겁니다. 은하준 씨.”
“저도 알죠. 누구보다 평탄하게 살고 싶은 게 바로 나라고요.”
물론 인류 멸망을 막아야 하는 사람이니까 애초에 틀려먹은 일이지 싶다.
“하지만 각성자 중에 평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죠.”
한세희의 말이 맞다.
애초에 이런 현실이 덮친 세상은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곳이 되어 버린 거다.
불타오르는 주택가를 바라본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또 얼마나 많은 파괴가 일어났을까.
이곳뿐만이 아니라고 했다. 오늘 지금 이 시각 급하게 발생된 포털이 여러 군데.
“그래도 힘을 잃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죠. 인간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내 말에 한세희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감았다.
“그렇죠.”
“일단은 여길 진압합시다. 닥친 일을 해내다 보면 나아가지겠죠, 뭐.”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 꿈이 꺾일지언정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게 내가 살아 온 방법이니까.
그렇게 사는 수밖에 없다.
* * *
깨끗한 실내는 하얀 대리석으로 가득하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은 분주하게 공간을 꾸미고 청소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맨 앞에는 단상이 있고 주위에는 금으로 만든 벚나무 가지가 장식되어 있다.
“오늘은 어떤 설교 말씀을 들려 주실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투피스 정장 치마를 입고 있는 여성에게 다가와 말했다.
여성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시선만 돌려 남자를 흘긋 보고는 다시 공간을 둘러보았다.
성스러운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이곳은 ‘성전’이었다.
성전에 더러운 것이 들어왔다는 불쾌감.
그것이 여성을 언짢게 만들고 있었다.
“그쪽 아이 하나가 사고를 친 걸로 알고 있는데?”
“……소식이 빠르시군요.”
“이미 중진들은 모두 알고 있다.”
“…….”
“손과 발, 수많은 곁가지와 잎사귀를 한 몸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하거늘.”
“쉽지 않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분위기대로라면 남자 쪽에 잘못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남자가 쩔쩔매야 할 것 같지만, 그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다.
“어머니만 아니었다면 너는…….”
“쉿. 말씀을 삼가세요. 어머니께서는 우리 제자들이 다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
이번에는 여성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노려보았다.
“더는 우리 신금천화교에 누를 끼치지 말아라.”
분명한 적의와 분노가 서린 한마디였다. 하지만 이에도 남자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어머니가 예지한 대로입니다. 제사장이라면 환란 속에서 믿음을 유지할 만한 그릇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환란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입만 살아서는.”
“우리 지파에서 문젯거리가 발생한다는 것 역시 이미 새 책에 기록된 내용. 그러니 제 탓은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뱀’이 되시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크읏…….”
“자매님, 시험에 들지 마십시오.”
남자는 여성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어머니께서 허락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남자가 사라진 뒤 여성은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어머니께서는 이 일을 그냥 두고만 보실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뿐인데 말이야.’
하지만 남자가 한 말이 모두 허튼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녀가 어머니를 믿는 이유이기도 했다.
‘새사람이 등장할 때가 된 것인가.’
여성은 휴대폰을 열어 누군가가 보내온 사진을 살펴보았다. 하얗고 반듯한 얼굴에 부드러워 보이는 갈색의 짧은 머리. 그저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그 얼굴을 보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 *
“하준아, 괜찮아? 우리가 없는 사이에 던전 브레이크가 벌어졌다면서?”
딱 다음 날이다. A급 던전 공략을 마치고 결이와 길드원들이 돌아왔다. 던전에서 나오자마자 소식을 들은 결이가 길드 휴게실로 들이닥쳤고 별생각 없이 율무차를 마시던 나와 마주쳤다.
“어? 어어……. 잘 다녀왔어?”
“괜찮냐고. 어디 다친 데는 없고? 하필이면 내가 없을 때…….”
얼굴에 걱정이 뚝뚝 묻어 나온다.
“앞으로는 나나 하케임 둘 중 하나는 네 곁을 지켜야겠어. 너를 혼자 두고 다니는 일에 항상 마음이 쓰였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앞으로는 꼭 함께 다니자.”
“에이, 괜찮다니까. 마침 한세희 길드장이 일찍 현장에 도착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
“한세희 길드장이? 그 사람이 일찍 왔다고? 어떻게?”
“응? 그, 그야……. 서광 길드 소식통은 알아준다고 하니까.”
“흠……. 그래? 그건 됐고. 정말 다친 데는 없어?”
아직 괴단체에 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 보다.
이걸 설명하면 또 엄청나게 걱정하게 되겠지. 큰일인걸.
“나는 괜찮지만…….”
솔직히 그렇다. 나야 위험한 일은 있었지만, 목숨에는 문제가 없고 괴단체의 단서를 찾은 것은 어떻게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안영원은 어제의 사고로 살고 있던 집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팀원 중에 괜찮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집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거든.”
그렇지 않아도 안영원의 어려운 가정사를 알고 있는데 크게 마음이 쓰인다.
“안영원 씨는 걱정하지 마라. 길드 차원에서 머물 곳을 제공할 테니까.”
대호 형이 듬직한 얼굴로 말한다.
“당장은 어떡하나요?”
“일단은 은봉 할머니의 작업실에서 잠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은봉 할머니네 작업실이요?”
내가 놀란 눈을 하자 구석에 앉아 유자차를 드시던 은봉 할머니가 어깨를 으쓱하신다.
“아이구, 내 작업실이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곳이다이가. 어린 것들이 갈 곳이 없어서 우짜노. 내야 집도 있고 작업실도 있으니까네. 그리고 당분간은 훈련실에서 작업을 해도 되고.”
“하지만 불편하실 텐데요. 영원 씨네 여동생도 그렇고 그냥 호텔에 가 있는 게…….”
“아아, 그것 말인데. 영원 씨 여동생이 어제 사건 때문에 불안감을 호소해서 일반 호텔에서는 못 묵겠다고 하더구나.”
대호 형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영원 씨 쪽에서 먼저 훈련실이나 숙직실 하나를 며칠만 빌릴 수 없는지 물어왔거든. 그래도 헌터들이 있는 공간이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아아, 그렇군요. 하긴 그럴 만한 일이긴 했죠. 큰일이네요. 여동생분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지.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휴게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들.”
“이미 안영원 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왜 너까지 난리야. 길드원들한테 이 정도도 못 해 줄 거 같아?”
대호 형이 씩 웃어 보인다.
그 미소가 얼마나 든든해 보이는지.
‘영원 씨랑 여동생분한테 한 번 들르긴 해야겠네.’
다 마신 율무차 종이컵을 구겨 버린 후 결이를 따로 불러냈다.
“일단은 너한테만 말해 주는 거야.”
“뭔데? 너 또 뭔가 위험한…….”
“쉿. 위험한 일이 벌어졌던 건 맞아. 하지만 걱정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게 사정이 좀 있으니까 우리 둘만 알고 있자.”
“…….”
결이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 괴단체가 아직 남아 있어.”
“그 괴단체라니?”
“테러 때 있었던 단체 말이야.”
“뭐?!”
“쉿.”
나는 한세희에게 넘기지 않은 금귀걸이를 결이에게 보여 주었다.
“확실해?”
“응, 어제 그 난리가 났을 때 단체에 속한 괴한이 나를 찾아왔었어.”
“그 녀석들이 널 완전히 찍은 거야? 대체 어떻게?”
“글쎄. 일단은 녀석들이 내 얼굴을 확실히 본 적이 있기도 하고. 뭐, 사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녀석들이 아직 건재하다는 거야.”
결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부와 서광 길드가 힘을 합해서 그 단체의 뿌리를 뽑았던 게 아니야?”
“응,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나 봐. 무슨 함정에라도 빠진 거겠지.”
“그럴 수가…….”
괴한이 했던 말과 행동들을 자세히 설명하자 결이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