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제169편
“안영원 씨.”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보자 20대 초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와 선이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언뜻 보면 소년처럼 유약하게 보이는 사람.
그렇지만 안영원에게 꿈과 희망이자 오늘을 버티는 힘이 되어 준, 그리고 오늘 던전에서의 새로운 경험과 탈출을 이끌어 준 바로 그 사람. 은하준이었다.
“으, 은하준 님.”
“서로 버프 좀 걸어 줄까요?”
“네? 넷?!”
“서로라기엔, 싱크로율이 안 맞아서 안영원 씨한테는 내가 기술을 써 줄 수가 없지만.”
은하준이 씩 웃는다.
안영원에게 그게 그렇게 멋지고 든든할 수가 없었다.
* * *
아무래도 이대로 보내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겠지.
너무 당황한 탓에 대충 얼버무리고 보내 버렸지만, 사실 그게 더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쫓아가서 커피나 한잔하자고 해야겠다.”
나는 황급히 안영원을 따라나섰다.
그래. 제대로 만나서 조심조심 대화하자. 시스템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도록 단어를 조심해서 말한 다음, 빙빙 둘러 어떻게든 설명하면 될 것이다.
너무 근접한 단어에 접근하면 내가 본 것처럼 안영원도 시스템의 경고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겠지. 그럼 일차적으로 납득이 될 테고.
이후의 입막음이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던전이 붕괴하는 장면을 안영원도 보았으니까. 세계가 멸망한다는데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는 사람은 아닐 거다. 물론 확신은 없다만…….
그래도 나에 관해 꽤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지 않을까.
아아, 젠장. 모르겠다. 이걸 어디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아, 애초에 안영원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했어.’
한숨을 푹 내쉬자 어깨 위의 망량이가 불꽃을 이글거린다.
“입을 다물게 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 있지요.”
“응,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안 돼.”
“네? 어째서요.”
“당연히 안 되지.”
“하지만 들어보지도 않으셨잖아요?”
“네 목소리가 은근히 싸늘한 게. 말 안 해도 뭘 생각하는지 다 알겠다. 쓱싹해 버리자는 거 아냐?”
“헉……!”
망량이는 놀란 듯 불꽃을 움츠렸다가 다시 이글거렸다.
“……하지만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어요?”
“완전 악당이구나, 너.”
“악당이 아니라요~! 확실한 걸 좋아하는 것뿐이라고요.”
“진짜 악당같이 말한다. 너.”
“참 나!”
“망량이 너는 가끔 이렇게 무섭게 굴 때가 있다니까?”
다급하게 안영원을 쫓아 나왔지만, 벌써 그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놓쳤나.”
“걱정하지 마세요.”
망량이가 으쓱거리더니 앞장서기 시작한다.
“뭐야, 추적하고 있었어?”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고요. 어때요. 저 정말 쓸모 있죠?”
“그래, 그렇기는 하다만…….”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자꾸 이상한 취급 하면 하극상을 일으켜 버릴 테니까요. 제가 얼마나 무서운 도깨비불인지는 이미 주인님이 잘 알고 계시겠죠?”
작고 파란 불꽃이 몽실몽실 움직인다. 마치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악당이 음흉하게 웃는 것처럼 말이다.
“뭐?! 정말?!”
일부러 더욱 소스라치게 놀라는 척하자 푸른 불꽃이 움찔거린다.
“……설마 정말이겠어요. 농담이라고요!”
“하하하.”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다. 그래, 너라도 나를 웃게 하는구나. 이런 상황에서라도 말이야.
안영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복잡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망량이의 뒤를 착실하게 쫓았다.
‘일단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시스템과 세계에 관해서……. 내 능력에 관해서는 전부 비밀로 하면서…….’
* * *
어쩐지 한참을 걷고 있다.
‘으응? 걸어서 가나?’
그러고 보니 길드 건물 근처에 산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알과 흑단이를 안은 채 나왔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으나 다행히 인적이 드문 시간이다.
“삐우우……. 꾸르르르…….”
흑단이는 졸린 지 골골거리는 소리를 내며 등 뒤에서 얌전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좁은 골목으로 굽이굽이 들어가고 있었다. 빽빽한 빌라촌이다.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었다고 생각한 순간, 앞쪽에서 뭔가 심상찮은 소리가 들려왔다.
구구궁.
“그어어어…….”
쿠웅, 쿵.
게다가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언제나 던전을 오갈 때 익숙하게 느꼈던 그 마나.
오늘도 한참을 느끼고 돌아왔던 그 마나.
“이, 이건.”
“주인님! 포털이에요!”
이런 순간에 포털이 등장하다니. 타이밍이 나빠도 정말 나쁘다.
전력을 다해 달리자 곧 안영원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 있는 몬스터.
처음 보는 녀석이다. 그렇다는 건…….
더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괴물이 든 창이 안영원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억압의 손길!”
촤르르륵!!
카가가가강!!
끼릭, 기리릭…….
막았다.
놀랍게도.
안도하지만 그게 오래 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사슬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부들거린다.
“안영원 씨. 서로 버프 좀 걸어 주죠?”
그래 봤자 나는 안영원에게 소울메이트를 쓸 수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떡할까.
내가 어그로를 끌고 있는 동안에 안영원을 대피…….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이 더 있다.
‘남매인가?’
척 보기에도 두 사람은 꼭 빼닮은 얼굴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쌍둥이인 줄 알았을 정도다.
“나 버프 좀 걸어 주고, 얼른 대피하는 게 어때요?”
“네?”
안영원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주저앉은 그를 끌어당겨 일으킨 다음 괴물을 주시하며 말했다.
“생각해 봐요. 지금 우리 둘이서는 절대로 저놈을 상대할 수 없어요.”
“그건…….”
안영원의 표정이 씁쓸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하준 님만 두고서 도망갈 순…….”
생각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군. 나중에 이야기할 때도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물론 모두가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나는 안영원과 닮은 여자애를 흘긋 돌아보았다.
“여동생?”
“아, 네.”
“보아하니 여동생은 일반인 같은데, 여긴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어차피 여긴 주거 밀집 구역이라 얼른 어그로 끌어서 저 녀석을 데리고 빠져나가야 하고요.”
“그, 그렇긴 하지만…….”
“포털을 감지한 순간에 바로 길드에 비상 연락을 넣었어요. 곧 내 위치를 추적해서 인원을 보내겠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안전하게 대피할 생각만 해요.”
위치상 길드와 가까운 곳이니 곧 헌터들이 올 거다.
그러니까 조금만 버티면 된다.
“그르르…….”
챙, 채앵!
괴물의 창을 저지하고 있던 사슬이 설탕 과자처럼 연약하게 바스러져 버린다.
“여유가 있었으면 내가 이런 말도 안 해요. 두 사람 모두 보호해 줄 수 있었을 테니까.”
눈앞에 있는 괴물 놈은 일반 몬스터들과 다르다. 이제는 딱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
이 괴물 녀석을 상대하는 건 나한테도 무리다.
길드에 연락했지만, 사실 마음이 완전히 편한 건 아니었다.
하필이면 결이랑 대호 형이 A급 던전을 공략하러 갔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냐. 우리야 던전이 터지는 바람에 일찍 포털에서 나오게 됐지만, 그쪽은 아닐 거다.
전에 듣기로 예상 공략 시간이 나흘 정도 된다고 했으니까. 내일쯤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그르르…….”
창을 저지당한 괴물 녀석이 침착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이 녀석은 좀 신중한 편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 이런 놈을 만났을 때처럼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 스타일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쯤 엄청난 인명 피해가 났을 거다.
“자, 얼른 피해요.”
“으…… 아, 알겠습니다. 하준 님 부디 무사하셔야 해요!!”
“물론이죠.”
나도 죽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후웅. 후우웅.
괴물이 창을 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다음 공격을 위한 움직임이겠지.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하다못해 대로변으로라도 나가야 할 터인데 지금 이곳에는 민간인이 너무 많다.
“꺄아악!”
“모, 몬스터다!”
“포털이야!”
잠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었다.
괴물 녀석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모두 조용!! 몬스터의 관심을 끌지 말고 조용히 대피하세요!!”
“히이익!”
“허, 헌터다.”
“저, 저 사람은……! 은하준이잖아!”
“은하준이다! 은하준이 우릴 구하러 왔어!”
“목소리를 낮춰요!”
나는 일부러 더 쩌렁쩌렁하게 큰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곧장 몬스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더는 시민들에게 어그로가 끌리면 안 된다.
“영지야……! 도망가! 최대한 멀리로!”
안영원이 외치는 소리가 잠깐 들린다.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했더니.
그가 시민들을 인솔해 대피시키는 게 보인다.
쉬이이익!!
빠른 속도로 내 눈앞까지 뻗쳐 온 괴물의 창.
검고 거대한 창이 만들어내는 궤도가 눈에 읽힌다.
‘나보다 느려.’
스으읏!!
허리를 숙여 능숙하게 놈의 창을 비켜낸다.
촤르르르륵!! 이번에 사슬을 이용해 잡아당긴 건 괴물이 아니라 나다. 내 몸을 사슬로 급하게 빼내 변칙적인 움직임을 만드는 거다.
끊어지지 않고 곧장 이어지던 괴물의 공격이 허공을 휘젓는다.
“봤냐.”
온통 검은 몸체의 얼굴 중앙에 박힌 붉은 눈이 번쩍 빛난다.
“화도 낼 줄 아나 보지?”
최대한 사람이 없는 쪽으로 쭉 빠지자 괴물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여섯 개의 거대한 다리가 걸을 때마다 도로를 박살 내고 있다.
“그래, 이쪽으로 와라.”
휘리릭.
나를 향해 오면서 창을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괴물. 그 붉은 눈이 어수선한 주위를 훑는다.
분명 그 눈은 도망치는 시민들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놈은 시민들을 공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창끝이 노리고 있는 건 오직 나.
쉬이이익!!
맹렬하게 돌진하는 창을 이번에도 수월하게 피해낸다. 다행히 속도 면에서는 녀석보다 내가 한 수 위다.
퍼거어어억!!
창이 꽂힌 도로 바닥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린다. 마치 아스팔트가 얇은 유리창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속도는 내가 위지만, 저 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정말 뼈를 못 추릴 것 같군.’
쉭.
이전 공격보다 훨씬 빠르게 창을 회수하는 괴물.
곧장 다음 공격을 준비한다. 이번에는 화려한 동작 없이 창을 길게 뒤로 뺀다.
던지려는 걸까?
타앗.
내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순간, 녀석이 창을 내던진다.
쉬이이이익!!
‘내가 공중에서 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하지만 내겐 헤르메스의 신발이 있었다.
타탓!
공중을 박차고 방향을 바꾸자 괴물의 눈빛이 움찔거린다. 내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저번 놈들보다 지능이 높게 느껴지는군.’
저번에는 짐승형에 본능적인 공격을 하는 놈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이성이 있는 존재와 싸우는 듯 견제하게 된다.
팟, 취리리릭!
완전히 날아가 버렸을 줄 알았던 놈의 창이 다시 끌려온다.
놈과 창은 검고 굵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칫.”
나는 공중에서 굴러 다시 한번 녀석의 창을 피해냈다.
“귀찮아지는걸.”
피잉-.
녀석이 다시 내게로 창을 내던지려던 순간.
쩌적. 쩌저저저적!!
놈의 창끝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저 공격은…….”
눈에 익은 공격이다. 나는 분명 이 스킬의 사용자를 알고 있다.
“자주 보니까 좋네요.”
몇 시간 전만 해도 들었던 목소리다.
한세희. 그의 목소리를 듣자 온몸의 긴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