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제165편
“응? 내가요?”
“펫이 둘씩이나 있잖아요. 아니, 이제 셋인가?”
“아아. 하나는 보모 노릇을 하는 거라.”
만티코어의 알을 떠올린다.
벌써 그 동글동글하고 얼룩진 알에 정이 들었는지 다시 한세희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찡하게 만들기는 한다.
어차피 내가 부화시킬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부화까지 내가 시킬 수 있었다면 정말로 새끼 몬스터와 떨어지기 싫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둘이네요.”
“뭐, 당장은 그렇죠.”
망량이와 흑단이.
안영원의 눈이 초롱초롱해진다.
“정말 대단해요! 한국에 펫을 둘이나 가진 헌터는 하준 님뿐이에요!”
“……뭐어, 그건 그렇죠.”
맞는 말이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한국에서 정말 독보적인 헌터가 되는 거다. 언론에서 말이 많은 것도,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운 것도 다 이해는 간다.
그래 봤자 흑단이는 전투에서 쓸 만해지면 결이한테 붙일 셈이지만. 이렇게 내가 결이와 함께 전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흑단이가 결이를 지켜줄 수 있다면 무척 기쁠 거다.
“정말 대단하세요. 이전부터 하준 님에 관한 기사를 많이 읽었거든요.”
“기사씩이나……. 하하.”
“저도 하준 님처럼 최선을 다하면 뭔가 달라지겠죠?”
“지금도 영원 씨는 훌륭해요.”
“저도 S급의 서포터를 하고 싶은걸요.”
안영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나와 같은 서포터 계열. 그러다 보니 나처럼 팀업을 할 수 있는 고정적인 강력한 동료가 있으면 더욱 수월하게 전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그런 탓에 나를 시샘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결이는 나만 고정으로 데리고 다녔으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내가 결이 곁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주는 거 같군.
이걸 느낄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영원 씨는 공격 스킬도 있잖아요? 그걸로 직접 전투에 힘을 보탤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하준 님은 사실 대미지가 많이 들어가는 공격 스킬도 없으시잖아요? 자주 사용하시는 억압의 손길도 따지고 보면 디버프 스킬이고요.”
내 스킬명까지 줄줄 읊어대니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안영원은 왜 자신이 나를 존경하는지 어떤 헌터가 되고 싶은지 한참을 떠들어 댔다.
그 이야기를 또 김예리는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다.
“주인님!”
앞서 움직이고 있던 망량이가 갑자기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찾은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거대한 벽.
무엇인가가 양각으로 조각된 벽이었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 무엇이 조각되었는지 식별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거대한 벽은 두꺼운 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듯했다.
“자물쇠?”
사슬이 묶여 있는 끝에 검은색 자물쇠가 보인다.
보나 마나 같은 색의 열쇠를 꽂는 거겠지. 나는 검은색 열쇠를 꺼내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주변으로 바람이 일었다.
후우욱. 그리고 벽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흩어졌다. 묘한 것은 주위의 모든 안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딱 일정한 주변을 가리고 있던 안개만 흩어져 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와…….”
지켜보던 안영원이 감탄을 터트렸다.
거인이 조각된 벽이다. 조각이 무척이나 입체적이어서 거인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달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인의 형태는 인간을 닮았지만, 그 얼굴과 몸은 갑옷을 두른 것처럼 독특한 형태였다.
말하자면 만화나 애니에 나오는 로봇 같달까?
“주인님, 봐요.”
안개가 걷히자 벽을 붙들고 있는 다른 사슬들이 보였다.
사방으로 벽을 묶어 땅바닥에 고정해 놓은 형태로 각각의 사슬 끝에 바닥과 연결된 자물쇠가 보였다.
“수수께끼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네? 물론 다음 페이즈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딱 넷이군.”
나는 열쇠를 각각 하나씩 나눠 주었다.
혹시라도 함께 얻을 수 있는 업적이라면 나누는 게 좋을 테니까. 게다가 기여도를 따지는 업적이라면 자동으로 내가 갖게 되는 거고.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열어 보죠.”
안영원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더 흥분한 상태였다. 그에게는 이런 수수께끼가 처음이었으니 당연한 일일 터.
“하준 님 덕분에 던전 안에서 이런 걸 해 볼 기회도 있고요. 정말 대단해요. 오늘도 따라나서길 정말 잘했어요.”
“다음부터는 물어보고 따라오도록 해요.”
“앗, 다음 기회도 주시는 건가요?”
그럼 뭐, 영원히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나? 내가 피식 웃는 사이에 각자 색깔에 맞는 자물쇠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하나, 둘, 셋!”
찰칵.
찰그랑.
자물쇠가 열리자 풀려난 사슬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댄다.
차르르륵. 차르르륵.
그리고 벽을 향해 스스로 움직였다. 차르르륵. 벽이, 거인의 조각이 사슬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그그그…….
그리고 거대한 벽에서 거인의 뻗은 손부터 떨리기 시작했다.
드득, 드드득.
후드득.
벽이 진동하면서 돌가루 같은 것이 부스스하게 떨어진다.
“우왓, 설마……!”
안영원이 설마라고 생각했던 일은 현실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다.
그 거대한 벽에서 정말로 거인이 튀어나왔다. 아주 느린 걸음이었지만, 분명하게 땅을 밟으며…….
“그으오오오오…….”
길게 울부짖었다.
“살아 있는 거였어?”
“앗……! 이건!”
망량이가 움찔대더니 내게로 돌진했다.
“어?”
푸화악!
그러고는 내 머리를 삼켰다.
“꺄아악!”
“하, 하준 님?!”
안 그래도 긴장해 있던 김예리와 안영원이 망량이의 행동에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괜찮아요! 진정해요!”
이건……. 망량이가 이런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헌터 자격증 과정에서 센터 사람들과 던전에 들어갔을 때. 그때의 수수께끼를 풀 때 이걸로 그 이상한 ‘신’과 대화할 수 있게 해 줬었지.
일반 몬스터에게 사용하려고 했을 때에는 고개를 젓던 망량이었다.
“망량아?”
“그때랑 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거인도 ‘신’이라는 걸까?
“그으으으……. 어어어어……. 자……유…….”
그때와 마찬가지로 거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봐!”
거인을 향한 내 외침에 김예리와 안영원은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그리고 그런 나를 향해 거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온다.
“……너……군. 나를…… 해방시킨…… 존재.”
거인의 목소리는 아주 느리고 메말라 있으면서 깊었다.
사방이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망량이가 내 머리를 삼키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
구그그그…….
나를 바라보는 거인의 시선만으로도 피부가 떨릴 정도다. 그만큼 거인은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운.
당해내지 못할 것 같은 기운.
그때와 같다.
아득한 무엇인가를 상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궁금……하겠군.”
“뭐?”
“ㅅㅣㅅㅡTㅔM에 관해…….”
뭔가 어그러져 들리기는 하지만, 분명 시스템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녀석은 알고 있다.
시스템에 관해. 그리고 내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Dᅟᅥᆫ전ㅇㅡN 세계ㄷㅏ…….”
“던전이 세계라고?”
“살아남……지 못하면, ……네 세계도.”
거인의 말이 일그러져 들리다가 다시 또렷하게 들리다가 했다.
“녀석이…… 거부……하는군. ㅂㅣMᅟᅵᆯ……이니까.”
그와 함께 거인의 몸이 마치 고장 난 프로젝트 빔처럼 깜빡거린다. 무엇인가 강한 힘이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처럼.
그륵, 그륵. 그르륵…….
쿠르르르……!
거인이 키득댔다. 분명 나무와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와 큰 진동이 있었을 뿐이지만, 아마 분명 그가 키득댄 것일 거다.
“……모든 차……원은 SISㅌᅟᅦᆷ에게 패배할…… 시, 던전……이 된……다. 살……아남은 생명체, 나와…… 같이.”
거인이 주먹을 쥔 채 팔을 들어 땅을 힘껏 내려친다.
“묶.인.다.”
쿠우우웅!
순간 엄청난 흙바람이 일어나 주변을 쓸어버린다.
“크으윽!”
“조심ㅎ……!”
그그극.
바람 때문에 몸이 뒤로 밀린다. 몸을 지탱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이 들어가 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콰르르, 콰아아아.
바람이 잠잠해졌을 때는 우리 외에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망량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바람에 떠밀려 날아가 버리지 않고 그대로 내 머리를 잘 삼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응, 거인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네.”
“가 버렸어요.”
가 버렸다라.
왠지 망량이의 말이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거부하는 힘에 의해 제거된 것이 아니라, 훌훌 털어 버리고 가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확실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이 상태를 해제해도 좋아.”
“넵!”
스스슷.
망량이가 내 머리를 뱉어냈다.
“으으으……. 이걸 쓰고 나면 엄청나게 피곤해요…….”
망량이의 불꽃이 아주 조그맣게 변한다. 작아진 망량이를 토닥이며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수고했어. 그래도 덕분에 시스템에 관한 걸 알아냈어.”
“으으으…….”
“하준 님~!”
김예리와 안영원이 나를 찾아 다가오는데 온통 흙먼지투성이다. 아까의 충격으로 바닥을 몇 번이나 구른 것 같았다.
“엄청났죠? 엄청났어요! 거인이 움직였어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릴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두 사람이 호들갑을 떤다. 역시 거인의 말을 이해한 건 망량이의 도움을 얻은 나뿐.
띠링.
[업적을 얻었습니다.]
[882번째 수수께끼를 푼 자.]
[경고. 금지된 정보에 접근했습니다. 시곗바늘이 움직입니다.]
‘응? 시곗바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궁금해도 소용이 없다. 시스템은 그 이상을 알려 주지 않았다.
“업적 얻으셨나요?!”
“보상이 뭐예요?!”
김예리와 안영원이 설레는 얼굴로 물어온다.
“두 사람은 뭐 없어요?”
“네, 아쉽게도……. 하지만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영광이라서요! 괜찮습니다!”
“정말 대단했어요. 그 거인이 뿜어내는 기운이란. 정말이지 온몸이 떨려서 완전히 굳어 버렸어요.”
안영원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뭐였나요? 펫이 하준 님의 머리를 삼켜 버렸잖아요.”
“아아, 그건 그 거인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준 거예요.”
“대화?! 대박이다! 무슨 스킬인 거죠? 번역 스킬? 몬스터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니. 엄청나잖아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데요?!”
“아, 그러니까 시스템에 관해…….”
띠링.
내 말을 막는 것처럼 시스템 알람이 울린다.
[금지된 정보를 언급할수록 시곗바늘이 전진합니다.]
그러니까 시곗바늘이 돌아간다는 게 대체 뭐냐고.
아니, 근데 지금 내 말에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는 건가?
비록 시스템이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를 챈 것 같지만, 그건 이미 엎어진 물이고.
그래, 뭔가 불리함을 준다는 뜻이겠지.
“모든 던전은 우리와 같이 하나의 세계였다는 것 같아.”
띠링.
왠지 시스템의 알람이 날카롭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경고. 금지된 정보를 언급했습니다. 시곗바늘이 전진합니다.]
[세계의 끝이 다가옵니다.]
[세계가 멸망합니다.]
이런.
젠장.
그런 거였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