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제164편
등허리?
순간 고통보다도 철렁하는 마음이 컸다.
이런,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됐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뒤쪽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어야 했는데.
“크윽.”
센티피드의 날카롭고 억센 집게 턱이 내 허리를 끊어 버릴 듯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솟구치고 센티피드의 머리가 타오른다.
“망량!”
“키에엑!”
센티피드의 집게 턱이 약간 느슨해진 틈을 타 놈에게서 벗어난다.
“흑단아!”
재빨리 인화 선배의 세이프티 플레이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리가 무너져 내린다.
센티피드의 독에 당한 거다.
“크윽. 흑단아…….”
“하준아!”
“이런, 독에 당했어요. 해독 포션을……!”
소울메이트의 감각으로는 둘 다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품 안의 알은 그냥 보기에도 큰 이상이 없었다.
뒤쪽에서 물렸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등 뒤에 매달려 있던 흑단이 쪽은 나와 마찬가지로 독에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어린 개체이기 때문에 센티피드의 독에 당한다면 위험할 것이다.
나는 독으로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로 다급하게 포대기를 풀어 흑단이를 들어냈다.
“흑…….”
“삐우우우…….”
포대기 안의 흑단이가 끙끙거린다.
일단 소리를 내는 것 자체에 안도한다.
“괜찮아? 으윽…….”
“삐익. 삐…….”
뒷다리에 상처가 있다.
타박상 정도로 보이지만 이 정도라면 충분히 독에 당했을 상처다.
몬스터에게도 포션이 들을까?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실험을 해 봤어야 했는데!
회귀 전에도 펫을 다루는 헌터와 함께 임무를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는 정보가 없었다.
“하준 님, 해독 포션을…….”
“저보다 흑단이를 봐주세요.”
오늘 공략에 함께한 D급 힐러가 내미는 포션을 흑단이에게 내밀자 힐러는 곤란한 얼굴로 흑단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저는 버틸 수 있지만 흑단이는 어려요.”
“네. 그럼 일단 포션은 드세요. 아이는 제가 볼게요.”
“삐이이…….”
흑단이가 낑낑대는 소리에 억장이 무너진다.
내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괜히 나섰다.
“음?”
“왜요?!”
“이상하다…….”
D급 힐러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분명 독 중독 상태가 맞거든요? 그런데 중독 증상이 나타나질 않아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독 내성이 있나?”
순간 정신이 확 든다.
독 내성. 그래, 각성자에게도 각기 다른 내성이 있듯이 몬스터에게도 내성이 있을 거다. 아니, 있다! 그 사실을 순간적으로 깜빡하고 있었다.
게다가 흑룡과 그린 드래곤에게는 높은 확률로 독 내성이 있었다.
“흑단아! 괜찮아?! 제정신이야?!”
“삐우우우……. 그르르?”
흑단이의 빨간 눈이 의아함을 갖고 나를 본다. 이 맑은 눈동자. 확실하다. 지금 센티피드의 독에 당한 건 나뿐이다!
“하준 님, 어서 포션을…….”
“아, 알겠어요.”
급하게 포션을 마시자 혀끝부터 알알하던 기운이 조금 가신다.
“그르릉……. 삐우, 삐이…….”
흑단이는 뒷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내게 안기려고 든다.
“일단 큰 부상은 아니니까 응급 처치 정도만 할게요.”
5층까지 공략하려면 힐러도 마나를 잘 분배해서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힐링을 받는 흑단이의 앞발을 꼬옥 잡아 주었다.
“삐이잉…….”
“오야, 오야. 그래, 그래. 우리 흑단이 많이 아팠지? 아빠가 미안해.”
“삐우우웅…….”
흑단이의 빨갛고 커다란 눈이 울망거린다.
그래, 앞으로는 나서지 말자. 나서지 말고 꿀만 빨자. 잠깐 들떠서 자식새끼 아프게나 만들고. 정말 염치없다.
“끝났어요.”
“고맙습니다. 덧나지는 않겠죠?”
흑단이 녀석도 치유된 다리가 신기한지 바닥에 발을 튕기며 제 몸을 요리조리 살펴본다.
“아마 그럴 거예요. 뼈나 중요한 인대가 다친 건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하준 님은 괜찮으세요? 허리를 심하게 다치셨을 것 같은데.”
힐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허리춤의 옷을 살짝 걷어 본다.
긁힌 상처와 시퍼런 멍. 게다가 독에 당했던 후유증으로 상처 주변의 피부가 검게 변해 있다. 이건 해독이 잘 됐어도 아마 며칠 갈 거다.
“이 정도야 뭐……. 아야야.”
“하준 님도 치료받으셔야 해요.”
힐러는 약간 강경한 표정으로 말한다.
하긴 나도 치료를 받기는 받아야지. 그런데 왠지 치료받을 염치가 없게 느껴져서…….
“이제 괜히 앞으로 나서지 않을게요.”
“에이, 또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하준 님 덕분에 팀원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는데요. 괜히라뇨. 자, 치유 시작할게요.”
츠츠츳.
치유가 되는 동안 다른 팀원들이 센티피드들을 상대하고 있다.
퍼엉! 퍼어엉! 콰아앙!
검과 도끼, 에너지탄들이 센티피드들을 압도한다.
“그동안 선전했으니까, 이제 좀 뒤로 빠져 있어도 돼.”
세이프티 플레이스를 지속 활성화하던 인화 선배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너도 네 몸 좀 아낄 줄 알아야 해. 아닌 척하지만 항상 네 몸을 혹사하잖아. 이번만 말하는 게 아니야.”
“알겠어요. 누나.”
인화 선배의 표정이 엄하다. 내가 다쳐서 속이 상한 모양이었다. 허구한 날 다치는 게 헌터의 일상인데도 선배는 항상 저렇게 안타까워한다. 너무 다정하다니까.
“힐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삐우우우…….”
흑단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품으로 파고든다.
“그래, 그래. 공략까지 조심하고 힘내자!”
“삐우웅! 삐웅!”
“주인님! 괜찮으세요?!”
푸른 불꽃이 쪼르르 날아들어 왔다.
“아, 망량아. 아깐 네 덕에 살았다.”
“아주 그 녀석, 죽여 버렸어요!”
“잘했어!”
망량이를 쓱쓱 쓰다듬어 준다. 그러고 보니 망량이 녀석 정말 강해졌다. C급 몬스터를 움츠러들게 할 수 있다니.
“흑단이는 괜찮아요? 아까 주인님이랑 같이 낀 것 같던데.”
“방금 치료를 다 끝냈어. 그리고 흑단이에게 독 내성이 있는 것 같더라고.”
“독 내성요?! 대단하다!”
망량이가 불꽃을 파닥거리며 흑단이에게 다가갔다.
‘어라, 그러고 보니……. 한결이 펫으로 키우려면 독 내성보다 전기 내성이 있는 게 더 좋은데.’
독 내성이라니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거……. 장우택이 엄청나게 탐내겠는데.’
* * *
드디어 도착한 5층.
이곳의 정경은 또 4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지금까지 펼쳐졌던 웅장한 자연과 다르게 어둡고 마른 흙과 돌무더기로 가득하다.
하늘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이 바깥인지 실내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뿌옇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 안개. 거기에 때때로 마주치는 거대한 벽.
공략 팀원들은 이미 상당히 지쳐 있었다.
“좀 쉬었다가 갈까요.”
“쉬려면 지금이 적기이기는 해요. 던전 초입이니 몬스터가 많이 나올 확률도 낮고. 다수결로 정해 볼까요?”
인화 선배의 말에 길드원들이 하나둘 쉬어 가자며 손을 든다.
“하준이는 어때?”
“아, 전 아무래도 괜찮아요.”
인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어깨를 두들긴다.
“팀원들 상태를 보아하니 반나절은 꼬박 쉬어야 할 것 같아. 이참에 마나나 체력을 다 보충한 다음에 공략에 나서야 할 것 같으니까. 원래는 지금 상황에 개별 활동은 안 되는 거지만…….”
인화 선배가 묘한 눈빛을 보낸다.
“수수께끼 말씀이군요.”
“응. 혹시 근처에 있으면 해결하고 와도 좋아. 사람이 필요하면 내게 말하고. 아까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절대로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 절대로 무리하지 않기야.”
“알겠어요. 어차피 휴식하려면 주위를 정찰해야 하니까 제가 다녀올게요. 제일 쌩쌩한 게 저이기도 하고.”
어차피 앞선 브리핑으로 5층은 중반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조금쯤은 돌아다녀도 괜찮을 거다.
“아니면 아예 흑단이랑 알을 내게 맡기는 게 어때?”
“누나한테요?”
사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흑단이가 알이었을 때에야 언제 죽을지 몰라 떼어 놓지 못했을 뿐. 지금도 넥스트 레벨로 각성시킬 수 있을까 싶어 늘 붙어 다니고 있는 거다.
인화 선배는 방어형 헌터이기도 하고 A급에 공격력과 방어력이 나보다 월등히 높은 데다가 스킬 자체도 방어에 특화되어 있으니까.
“미덥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삐우욱!”
흑단이가 대화를 알아들은 것인지 반항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흑단이는 아빠랑 떨어지기 싫은가 보네? 어쩔 수 없나?”
“……흐음, 그래도 역시 선배께 맡기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
“네. 아까 위험에 빠지기도 했었고. 혼자 움직이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서 곤란한 것보다 안전한 게 최고죠. 이번엔 저랑 망량이 둘이서 움직일게요.”
“삐이이! 뿌이이이!”
“흑단아, 진정하자~ 아빠가 맛있는 거 사 오신대~”
“누나도 참.”
포대기를 벗어 인화 선배에게 넘긴다.
흑단이 녀석은 심통이 났는지 고개를 홱 돌리고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영영 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네가 너무 좋은가 봐. 흑단이는.”
인화 선배가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다녀와. 널 믿지만, 걱정되니까.”
“걱정시켜서 죄송함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래.”
“삑.”
돌아보지 않는 흑단이가 인화 선배의 품에서 소리를 낸다. 잘 다녀오라는 건지, 여전히 화가 잔뜩 난 건지 모르겠다.
‘이제 수수께끼를 풀 수 있겠구나.’
4층 보스까지 해치우고 손에 넣은 열쇠는 모두 다섯 개.
노랑, 빨강, 파랑, 흰색, 검은색 열쇠였다.
“망량아.”
“네, 주인님.”
“뭔가 잡혀?”
“흐음…….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스스슷.
안개를 뚫고 망량이가 천천히 앞선다.
“수수께끼가 뭔지 모르는데 혼자서 가도 괜찮겠어요?”
“하긴, 저번처럼 여럿이서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라면 망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 제가 따라온 겁니다.”
“우악!”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김예리다. 그리고 안영원까지?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새로 스킬을 얻었어요.”
“어?”
“넥스트 레벨 스킬이에요.”
김예리가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레벨 업을 했어요?”
“기본 레벨 말고 넥스트 레벨만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안영원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기다리고 있다.
“기척을 죽일 수 있는 스킬?”
김예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 쓰면 어떡해요.”
“앗, 아앗……. 그건 그렇지만…….”
물론 그녀가 나를 돕고 싶어서 왔다는 건 알고 있다. 왠지 안영원도 그래서 따라나섰을 거고.
그래, 수수께끼를 풀려면 인원이 더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좋게 생각하자.
“어쩔 수 없지. 이미 한참이나 왔는데. 같이 갑시다.”
“예이~!”
“예이!”
김예리와 안영원 둘 다 주먹을 들어 보인다. 나 참, 소풍 온 것도 아니고.
얼마나 걸었을까. 안영원이 불쑥 말을 걸었다.
“하준 님이 정말 부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