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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소울메이트-160화 (160/250)
  • 제160화

    제160편

    달콤하고 화사한, 그리고 포근한 향기가 난다.

    따뜻하면서 서늘한. 그래서 딱 좋은 느낌이다. 천천히 눈을 뜨니 어두운 보랏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보인다.

    별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은하수가 하늘 위를 흐르고 있다.

    나는 누워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이내 꽃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약간 멍한 느낌이 감기에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살짝 열이 오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처럼 편안한 감각.

    ‘보라색 꽃밭이다.’

    익숙한 보랏빛이 나를 잔뜩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보랏빛들 사이에 드문드문 흰빛의 구체가 떠 있다.

    ‘이건 그때 보았던 거다.’

    결이의 얼굴이 보인다.

    하케임도, 인화 선배도. 대호 형도, 은봉 할머니까지도.

    영혼인지 기억인지 모를 어떤 기의 형태가 보인다.

    ‘그래, 잠깐. 안사홍을 보자.’

    그의 것을 찾아 잠깐 헤맨다. 보랏빛의 꽃잎이 내가 움직일 때마다 흩날려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지독하다면 지독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짙은 향기다.

    ‘찾았다.’

    하얀 구체 위로 안사홍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와 쏙 빼닮은 사람. 그의 여동생.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모르는 사람이기는 해도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니까 찾기 쉽지 않을까.’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기억하는 이들의 구체가 내 근처에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안사홍의 여동생을 기억한다면 그녀의 구체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찾아보자.’

    일단 안사홍의 구체 주위로는 없는 게 확실했다. 나는 꽃밭을 찬찬히 훑기 시작한다.

    아는 얼굴들은 멀어져 가고 점점 모르는 이들의 얼굴이 비치는 구체가 주위에 가득하게 된다.

    ‘뭔가 다들 행복해 보여.’

    구체에 떠오른 얼굴들은 대부분 그랬다. 보는 사람마저 웃음을 짓게 하는 편안한 얼굴들.

    가끔 우는 얼굴도 있고, 슬퍼 보이는 얼굴도 있지만, 그 역시 행복을 기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대체 뭘까.

    안사홍이 말했다시피 다른 차원인 걸까.

    다른 차원이라면 어째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이, 혼이 보이는 걸까.

    ‘다른 차원이면서 우리 차원이다.’

    연결된 차원, 상관이 있는 차원.

    사후 세계와 같은?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보이는 것인데?

    만약 죽은 자들도 볼 수 있는 곳이라면.

    그렇다면 엄마 아빠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온몸이 꺼지며 바닥으로 쓸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깊은 낭떠러지로, 진득한 늪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 * *

    “꿈…….”

    “삐이엥! 까룩.”

    얼굴에 가득한 식은땀을 닦아내자 옆구리에 끼여 자고 있던 흑단이가 꼬물거린다.

    “그래, 그래……. 흑단이. 착하지…….”

    꿈. 꿈인 건가?

    아니면 정말 ‘그’ 차원에 접속했던 걸까?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3시다. 애매한 시간이네. 이불을 끌어모아 안고는 몸을 웅크린다.

    “끼우웅, 바바바.”

    “그래, 그래.”

    보들보들한 흑단이의 짧은 털을 쓰다듬는다. 순간적으로 확 깼던 졸음이 다시 스멀스멀 몰려들었다.

    아까 그건 정말로 꿈이었을까.

    꿈결에 정말로 다른 차원에 연결되었던 거라면 그럼 그때 안사홍의 여동생을 찾았어야 하는 건데. 내가 허튼 생각을 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약간 우울해진 기분으로 등을 더 동그랗게 말았다.

    * * *

    “정말 그런 상태로 던전 공략에 가시겠다고요?”

    “조금만 조심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대기실에서 몸의 앞과 뒤에 모두 포대기를 착용한 나를 보며 진보라가 눈을 가늘게 뜬다.

    “어차피 서포터 전문이라, 앞으로 나설 일만 없으면 크게 위험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하준 씨가 완전히 보조형은 아니잖아요.”

    “응? 완전히 보조형이죠.”

    “그렇게 잘 싸우고 강한 보조형이 어딨어요?”

    “아……?”

    진보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킬은 서포터형이 맞지만……. 지금은 거의 A급 헌터의 공격력을 갖추고 계시잖아요.”

    “음, 그건 그렇지만요…….”

    에이, 벌써 A급이라니 잘 쳐줘야 B급인데 진보라 씨는 나한테 정말 점수가 후하다.

    “그러니 애들을 데리고도 던전에서 무사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윽…….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요.”

    “그리고 애들이 던전을 좋아하잖아. 게다가 너무 둥기둥기하면서 키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인화 선배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죠. 애들은 강하게 키워야죠.”

    “암, 그렇고 말고.”

    “이거 정말 괜찮은가요?”

    진보라는 여전히 의구심을 갖지만, 흑단이가 잘 태어난 걸 보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괜찮아요. 괜찮아. 자, 그럼 출발하죠.”

    “또 뉴스에 떠들썩하게 올라올 모습이네요.”

    “그래도 여론이 항상 형한테 좋으니까요.”

    오랜만에 같은 자리에 마주한 염태규가 말을 거든다.

    “맞아, 대한민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지. 우리 하준이.”

    대호 형이 태규와 함께 전날 뉴스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우리 태규, 팀장 됐다면서.”

    “앗, 형……. 알고 계셨구나.”

    태규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어정쩡하게 서 있다. 짜식, 길드의 인원이 늘어나면서 팀도 여럿 생겼는데 그중 하나의 팀장이 되어 팀을 이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주치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게다가 팀원들에게 평판도 좋다는 것 같았다.

    “멋진 팀장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어린데도 강단 있고.”

    “에이, 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확실히 회귀 전에도 아무것도 아니진 않았거든요? 염태규 씨는 인성이 꼬여서 그렇지, 실력은 알아주는 헌터였거든요? 라고 놀려 주고 싶지만, 이미 없어져 버린 미래 아닌가.

    이대로 태규가 성실하게 성장해 주면 더는 바랄 게 없다.

    아니, 바랄 건 있어야 하나.

    좀 붙어 다니면서 싱크로율을 높여 놔야 넥스트 레벨로도 진입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짬짬이 이렇게 마주칠 때마다 스킬을 사용해 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 길드 사람들은 시간만 들이면 모두 넥스트 레벨로 각성시킬 수 있을 테지.

    ‘그나저나 공을 들인 거에 비해서 하케임은 늦네.’

    따지고 보면 인화 선배의 경우도 그렇다.

    결이만큼 붙어 다니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뭔가 여러 가지가 적용되는 모양이야.’

    이제까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영혼 등급이라든가.

    이놈의 시스템. 하여튼 불친절하다니까.

    * * *

    츠츠츳…….

    던전의 기운을 느끼며 포털 내부로 진입한다.

    “끼잇! 삐우, 바!”

    포털로 들어오자마자 등에 멘 포대기의 흑단이가 발을 구른다. 이 녀석 조금만 있으면 혼자서도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발 구르는 힘이 세다.

    어쩐지 앞쪽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알도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역시 몬스터들은 던전의 기운을 좋아하는구나.

    ‘음? 그렇다면 아예 낮은 던전을 개조해서 안에서 지내면 어떨까? 그렇다면 흑단이의 성장이 더욱 빨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부화시키지는 못하겠지만, 이 만티코어의 알도 더욱 건강해져서 빨리 넥스트 레벨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넥스트 레벨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넥스트 레벨로 각성시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알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던전 내부에 시설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상한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C급 던전이지만, 층수가 5층까지 있는 대형 던전입니다. 다들 충분히 숙지하고 왔으리라 생각하지만, 체력 배분 잘해 주시고요.”

    인화 선배의 지시에 따라 길드원들이 차례를 맞춰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 던전 내부는 아주 습하다. 열대 우림처럼 우거지고 잎사귀 하나가 사람보다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 우악스러운 점이 있다. 크기뿐만이 아니다. 괴상한 무늬와 모양을 가진 거대한 식물이 가득하다.

    이런 걸 뽑아 가서 키우는 애호가들도 있다고 들었다.

    하기야 지구에서는 그냥 구할 수 없는 식물이니까.

    마치 벌집처럼 생긴 것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벌집이 아니라 식물이다. 식물이 벌레 몬스터들이 살 수 있게끔 변화된 것.

    마치 공룡이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의 던전이다.

    “슬라임! 다들 호흡기를 조심해!”

    “C급 던전인데도 B급 몬스터까지 나오니까 다들 전투에 긴장하고!”

    주르륵.

    가장 일반적인 녹색의 슬라임이다. C급에서 B급 사이쯤이라고 볼 수 있으려나. 슬라임은 언제나 다루기 까다롭다.

    “우왓! 도와줘요!”

    “아아아!”

    짧은 함성과 함께 칼날 같은 바람이 쏘아져 나간다.

    쉬이익!

    취이익! 촤아악! 슬라임이 분해되며 내부에 있는 핵이 부서진다.

    김예리의 강화된 공격.

    “역시 예리 님. 강하시네요.”

    “에헤헤. 뭘요. 이 정도로.”

    김예리에게 도움을 받은 길드원 하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솔직히 김예리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F급인데도 A급 못지않은 성장을 이뤄낸 각성자. 단기간에 레벨 300을 돌파한 각성자.

    게다가 조금 전 사용한 스킬은 더 이상 F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특히 이 몸의 도움도 있었지.

    엣헴. 필드에서 의기양양한 김예리의 모습을 보니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처음부터 너무 스킬 남발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 마나 통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은 것 같은데.”

    장난기 섞어서 말을 걸자, 김예리가 소녀처럼 우헤헤 하고 웃는다. 그러고는 멋쩍은지 죄 없는 안경을 꼼지락거린다.

    “오랜만에 같이 전투라,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예리 씨가 멋지다는 건 평소에도 잘 알고 있는걸요.”

    “하준 님…….”

    “그나저나 브이로그가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요?”

    “앗, 걱정하지 마세요. 신선 길드 내부나 기밀 사항 등에는 절대 절대 절~대로 접근하지 않았어요!”

    “아니, 뭐라고 하려던 게 아니라……. 정말로 궁금해서 물은 것뿐이에요.”

    “아하하, 그러시구나. 뭐, 이전부터도 채널 구독자는 많았으니까요.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시작했을 뿐인데도 다들 관심을 두시더라고요.”

    “참 신기하다니까요. 어찌 됐든 잘 풀리고 있으니 좋네요.”

    김예리는 신이 나서 브이로그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구독자가 훨씬 많이 늘었다느니 외국 길드에서 연락이 온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이러다가 해외 길드에 스카우트되어서 가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전 신선 길드랑 은하준 님한테 완전 충성을 맹세했잖아요?! 알겠어요. 저를 못 믿으신다면 브이로그에 당장 이 사실을 공표해야겠어요.”

    “아,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일단 진정하고.”

    “주인님! 잠시만요! 저길 좀 봐요.”

    “응?”

    망량이가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망량이의 시선 끝에는 우거진 풀숲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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