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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소울메이트-135화 (135/250)
  • 제135화

    제135편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보랏빛 꽃밭.

    그 위를 유영하는 회색의 불꽃들. 그 안의 기억들.

    내가 불꽃 안의 모습을 기억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안사홍과 여성의 모습이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어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학생 정도 되어 보였다.

    닮은 외모와 분위기로 보아 친밀한 관계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 더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 이건…….”

    안사홍의 불꽃에 집중하느라 미처 다른 불꽃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시선을 돌리니 온통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결이잖아.”

    불꽃 안의 결이는 안사홍과는 달리 지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음, 길드인가.”

    결이 주변으로 은봉 할머니나 김예리가 보인다. 두 사람이 유독 결이를 잘 챙기는데, 보아하니 점심을 뭐 먹을까 고민하는 것 같다.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낄 수 있다.

    애초에 이 공간은 낯설면서도 그리운 느낌이 있고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려 또 다른 불꽃들을 살펴본다.

    “하케임이다.”

    의상을 보니 지구에 온 시점이 틀림없다. 한데 불꽃 내부에 어두운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있다. 하케임 주변으로 사람들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시야가 좁아 본인 외에 다른 이들이 잘 비치지 않는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일까.”

    다른 불꽃에 비해 타오르는 위력도 약한 것 같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불꽃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내 주위에 있는 것들이 온통 내가 아는 사람들의 불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인화 선배, 염태규, 대호 형…….

    다른 불꽃을 더 확인하기 위해 움직이자 내가 아는 사람들의 불꽃이 천천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걸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친분이 낮거나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세희네.”

    이쯤 되자 뭔가 기분이 이상해진다.

    남의 기억을 함부로 헤집는 것 같달까. 허락 없이 이렇게 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물론 불꽃이 보여 주는 기억은 아주 단편적이지만…….

    “주인님!”

    사방을 울리는 망량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순간 모든 것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마치 내가 이 공간의 불순물처럼.

    “주인님, 거기서 나오세요!”

    망량아, 어디…….

    조금 전까지 나왔던 목소리가 꽉 막힌 것처럼 입안을 맴돈다.

    그리고 곧 물속에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손발을 허우적거리자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주인님! 나오세요! 빨리요! 거기 더 있으면 안 돼요!”

    “컥, 허억.”

    나도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이 외침이 망량이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안간힘을 쓰는데 돌연 가슴팍이 뜨거워졌다.

    “윽?!”

    후우웅!

    터억!

    무엇인가에 세차게 밀리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튕겨 나왔다.

    돌아보니 안사홍이 내 어깨를 받쳐 주고 있었다.

    “윽.”

    뜨거움이 채 가시지 않은 가슴팍을 매만지니 작고 딱딱한 게 만져진다.

    ‘이건 하케임이 줬던 나무 조각이잖아.’

    나무 조각은 불에 탄 것처럼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손에는 까만 재가 묻어 나온다.

    불길한 것으로부터 지켜 준다던 하케임의 말이 떠올랐다.

    “하하, 히히히. 흐흐흐…….”

    안사홍의 거래자가 나를 보며 참는 듯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하……. 정말 재밌는 자로구나. 어떻게 이런 저능한 차원에서 이런 존재가……. 하기야 그대 같은 접선자도 존재하니, 생각보다 대단한 차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흐흐흐…….”

    “장난이 너무 심하십니다.”

    장난? 장난이라고?

    나는 안사홍을 노려봐야 할지 거래자를 노려봐야 할지 고민했다.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소. 인도자여.”

    인도자라니. 무슨……이라고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내 상태 창에 늘 떠 있는 칭호. 혼백의 인도자. 내 시스템 창 설명을 읽을 수 있기라도 하는 건가? 그리고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말해도 좋아요.”

    안사홍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것이 눈앞에 있는 거래자에 대한 두려움인지, 내가 본 것에 대한 기대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 그게……. 꽃밭을 봤는데요. 거기에 사람들의 기억이 불꽃처럼 떠다니고 있었어요.”

    “사람의 기억?”

    “더 자세히 말해 다오, 인도자여.”

    여러 개의 머리가 달린 거래자가 고개를 숙여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마치 내 영혼이 빨려 나가 그대로 거래자에게 삼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윽!”

    “오호라, 호오……. 그렇군. 그랬구나.”

    거래자는 여러 개의 고개를 한꺼번에 끄덕거리며 키득거렸다.

    “그만, 그만!”

    버둥거리는 나를 진정시키려 안사홍이 어깨를 꽉 붙든다. 뇌가 훑어지는 듯한 감각은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고 더할 수 없이 불쾌했다.

    두개골 속에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달까.

    더는 지속되지 않았으면 하는 끔찍한 감각.

    “후후후……. 재밌군. 인간 주제에.”

    탐색을 끝낸 거래자가 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그가 만족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끔찍한 감각에서 해방되었다. 그러고는 다리의 힘이 쭉 풀려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젠장…….”

    “그래. 그래. 오늘의 나들이는 꽤 재미가 있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 무리하면 망가질 테니까. 나는 너희 인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지. 두고 보도록 하지, 인도자여.”

    두고 보다니. 누구 마음대로.

    한마디 쏘아 주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목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

    “거래품은…….”

    안사홍은 내 등을 다독이며 거래자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갖고 가도록 하겠다. 재밌는 걸 보게 해 줬으니 보상은 후하게 쳐주지. 그나저나 기쁘겠군. 자네도 원하고 있지 않았나.”

    스스슷.

    순식간에 거래자의 인영과 함께 방 안의 반짝임이 모두 사라졌다.

    캄캄한 어둠만 남은 그때 안사홍의 능력이 다하고 평범한 방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안사홍이 입을 열었다.

    “뭘 봤는지 제게도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말한 게 다예요.”

    지끈지끈한 머리를 감싸 쥐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밭과 불꽃, 다른 사람의 기억. 그것 외에는 특별한 것도 없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방에 들어올 때 망량이의 소환을 해제해 두었는데 녀석은 어떻게 나를 찾아 부른 걸까?

    어쨌든 안사홍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혹시 여동생이 있나요?”

    “……!”

    어둠 속이라 안사홍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깜짝 놀랐다는 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게, 불꽃을 봤어요. 그 안에 사람의 기억 같은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안사홍 씨를 봤습니다. 당신을 아주 닮은 여성과 함께 있는 모습을요.”

    “……그렇군요.”

    “누구죠?”

    “하준 님의 예상이 맞습니다. 제 여동생이죠.”

    “놀랍네요.”

    정말이라니.

    그렇다면 내가 본 것이 헛것이 아니라는 거다.

    사실 한편으로는 내 기억으로 재현된 무언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꿈같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만 이곳을 나가죠.”

    안사홍이 어둠 속에서 나를 부축해 일으킨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보이는 밝은 빛이 이렇게 감동적일 수 있다니.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꽁꽁 얼어붙었던 것 같은 손발이 따스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본 게 뭔지 사홍 씨는 아시는 겁니까?”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안사홍은 말을 고르는 듯 머뭇거렸다.

    “아마 하준 님도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능력을 가진 듯합니다.”

    “차원이요?”

    “제 능력을 보면서 대충 어느 정도 감은 잡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느끼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지.

    안사홍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 거래한다는 걸.

    그가 사용하는 스킬은 그저 조금 독특한 순간이동 같은 것과는 달랐다.

    그가 상대하는 거래자들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도 그와 같은 능력이 있다니.

    그건 너무나 의외였다.

    나는 단 한 번도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와 교류한 적도, 마음대로 차원을 여닫은 적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하나 짚이는 건 있었다.

    내가 회귀자라는 것.

    어쩌면 내가 가졌던 그 능력 때문에 회귀가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홍 씨와는 다른 거죠? 전 제 마음대로 뭔갈 할 수 없는걸요. 조금 전에도…….”

    “네. ‘그분’ 때문에 강제로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신 거죠. 압니다.”

    안사홍은 그제야 빈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지금은 그럴 겁니다. 당연해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이 세계에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몇 명의 차원 술사가 있습니다. 저와 비슷하거나 조금씩은 다른 형태로요. 은하준 님도 그중 하나고요.”

    그는 장갑을 벗으며 꼿꼿하게 정리했다. 그러면서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내용을 들을 수는 없었다.

    나는 머쓱하게 서 있으면서 다른 차원, 보랏빛이 가득하던 꽃밭을 떠올린다.

    ‘그게 다른 차원이라고. 내가 봤던 것도 전부 진짜고.’

    내가 회귀한 것, 그리고 넥스트 레벨이니 뭐니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 그 모든 게 다른 차원과 관계된 탓인가 보다.

    그리고 보니 하케임의 경우도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다른 차원이 있는 거야? 차원에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나나 안사홍을 제외하고도 더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내가 멍청하기 때문일까?

    ‘아냐, 뭐가 됐든. 지금은 할 일에 집중해야 해.’

    지금 당장 다른 차원의 비밀까지 풀 수는 없겠지만, 당장 닥친 문제들은 해결할 수 있으니까.

    넥스트 레벨로 강해지는 것.

    “오늘 제 거래자가 무례한 행동을 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준 님께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오늘 함께 가지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다른 분을 모시는 게 나았겠죠. 거래자분의 취향을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안사홍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미안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위험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경호 일을 맡은 것이었고.

    “괜찮아요. 물론 불쾌한 경험이긴 했지만, 저도 모르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다른 차원과 연결된 힘.

    이 힘을 어떻게 잘 사용한다면, 좀 더 쉽게 시스템을 파악하고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나저나……. 사홍 씨도 원하던 일이라는 건 무슨 이야기인가요?”

    내 말에 안사홍의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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