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제111편
“그 브이로그라는 건 온종일 찍는 거예요?”
조그만 카메라로 길드 내부 이곳저곳을 찍어 대는 김예리를 보며 묻자 그녀는 카메라를 내 쪽으로 확 틀며 씨익 미소 짓는다.
“네, 이렇게 찍어 봐야 몇 분 안 나와요. 그래서 제가 영상 편집 후에도 원본 영상을 삭제하지 않는 이유죠. 그걸 다 보관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요.”
“일종의 집착증 같아 보여요.”
“그럴지도 모르죠. 뭐, 상관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밝다.
김예리를 길드에 영입하고 나서 오스킬 채널은 다시 복구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영상을 기다리고 또 이런저런 사건을 제보하기 때문에 테러 단체를 쫓는 데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 것이다.
“흐음……. 비공개 영상으로 업로드하고 있는 거 맞죠?”
“아, 당연하죠! 어차피 제 신상 드러날까 봐 공개로 못 올려요. 단지 추억 기록용이니까요. 내가 헌터로 던전 안에 들어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녀는 촉촉해진 눈으로 멍하니 있다가 주먹을 불끈 쥔다.
“브이로그는 모두에게 공유할 테니까요. 멋지게 싸워 주세요.”
“참 나. 어차피 던전 안에서는 기계가 작동하지 않는걸요.”
“그래도요!”
김예리 그녀가 이렇게 들뜬 이유는 드디어 오늘, 그녀와 함께 던전에 나가 실전 훈련을 하기 때문.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아침부터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었다. 들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물론이죠. 내가 있잖아요.”
“엄청 든든해요. 그러니까 한결 님도 하준 님 곁에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겠죠.”
“…….”
곁에 서 있던 결이가 민망한지 고개를 쓱 돌린다.
“그래! 은하준 곁에 있으면 뭐랄까 안정감이 든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정확한 말이다, 김예리!”
“역시! 뭔가 있는 거예요!”
하케임은 김예리와 제법 장단이 맞는 것 같다.
“사실 하케임 너까지 갈 필요는 없는데.”
“싫다! 내가 따라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시간에 너한테 맞는 훈련을 하는 게…….”
“나는 훈련이 필요 없다!”
으름장을 놓는 하케임을 김예리는 열심히 찍고 있다. 특히 얼굴을 중점적으로.
“어쭈, 건방진 소리를 하네.”
“……물론, 기억을 되찾으려면 열심히 훈련하는 게 맞지만. 어쨌든 지금 이것도 훈련이니까!”
“오늘 가는 김예리 씨 수준에 맞춰서 D등급으로 갈 거야. 얼마나 적응하는지 보면서 단계를 올릴 거니까.”
“괜찮다! 응, 응!”
하케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준이가 당신 등급에 맞춰 움직여 주는 걸 고맙게 생각해. D등급 정도면 이제 하준이한테 들어오는 경험치는 거의 있으나 마나니까.”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결이가 무미건조하게 김예리를 향해 말했다.
“결아, 한참 누나한테 너무 쌀쌀맞게 굴지 마.”
“흥.”
“겨, 결이 님 말씀에 틀린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가 길드에 영입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김예리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보다 10살이나 많다니. 그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엄청나게 동안인 데다 어쩐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해서 또래인 줄 알았다.
‘그래, 나이를 먹는다고 다들 성숙해지는 건 아니니까.’
어쩐지 마음속으로 욕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떨쳐 버린다.
‘나도 집중해야지. 오늘은 김예리가 직접 전투로 나서야 할 테니까.’
그때 하케임이 약간 미간을 구기며 외쳤다.
“그러고 보니 한결도 따라가는데 또 나한테만 뭐라고 하지, 은하준!”
* * *
츠츠츳.
포털의 빛이 시야를 삼켰다가 흩어진다.
던전 안이다.
“으아아! 떨려요.”
“진정해.”
결이의 한마디에 김예리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눈을 감지도 말고요.”
“네, 네에…….”
“오늘 S급이 둘이나 우릴 따라왔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너희들은 김예리 씨가 전투를 주도할 수 있도록 너무 나서지 말고 뒤만 봐줘.”
“응.”
“알았다!”
솔직히 두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만, 따라와 주어서 아주 든든하다.
파스락.
“몬스터다.”
목소리를 낮춘다. 츠츠츳. 그리고 소울메이트를 발동시킨다.
선 세 개가 동시에 각각 결이와 하케임, 김예리에게 가, 달라붙는다.
‘이제 세 명에게 동시에 소울메이트를 사용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군.’
김예리를 상대로 소울메이트를 계속 사용한 덕분에 나도 꽤 숙련도가 쌓인 것이다.
파스락, 파스락.
“컹, 크엉, 컹컹.”
모습을 드러낸 건 빅피그다. 거대한 돼지 모양의 이 야수종 몬스터는 영리하며 사납기로 유명하다.
피부는 코뿔소만큼 단단하고 머리에 달린 혹은 어지간한 검에 맞아도 깨지지 않는다.
“놈은 영리해서 상대하기 조금 까다로울 겁니다. 하지만 김예리 씨 능력으로 놈을 당황하게 하면 쉬울 거예요.”
“네.”
우리는 모두 수풀에 숨은 채로 숨을 죽였다.
김예리는 숨을 가다듬고선 손을 살짝 내밀어 손가락을 따악! 하고 튕겼다.
그 순간, 빅피그가 이상함을 감지한다. 하지만 우뚝 선 빅피그는 그저 주위를 살필 뿐이다.
순식간에 찾아온 적막.
빅피그는 왜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하아앗!”
검을 든 김예리가 앞으로 튀어 나간다.
터어엉!
검으로 베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이건 별로 좋지 못한 소리다.
“끼에에엑!”
빅피그는 갑자기 나타난 김예리를 보며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웠다가 갑자기 돌변해 그녀를 향해 돌진한다.
“하앗!”
나는 앞으로 튀어 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선 뒤 스킬을 사용한다.
억압의 손길. 차르르륵!!
투명한 사슬이 땅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빅피그의 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연이어 불길한 예감을 사용한다.
빅피그의 머리 위로 붉은 글자가 솟아오른다.
[집중력 -15%]
[신체 능력 –5%]
“자, 다시 한번.”
“넷!”
김예리가 달려 나와 다시 공격을 시도한다.
챙! 채앵!!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아직 일격에는 안 되는군.’
D급이면 F급인 김예리보다 두 단계 위의 상대니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채앵! 챙!
“하아앗!!”
그녀의 검이 움직이는 모습이 안정될 때쯤 억압의 손길을 해제한다.
“키엑! 키엑!! 킁킁!”
빅피그가 다시 돌진해 오자, 이번에는 김예리가 아슬아슬하지만 제대로 피해낸다.
“좋아, 계속 그렇게 해요.”
“네!”
휘익, 챙! 채앵!
전투가 계속될수록 빅피그는 급격하게 지치기 시작했다.
따악!
그녀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며 재빨리 빅피그의 뒤로 가 선다.
빅피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놓친 모양인지 사방으로 거칠게 고개를 휘젓는다. 하지만 빅피그가 완전히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그녀의 검이 더 빨랐다.
퍼걱!!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빅피그의 뒷머리가 으깨진다.
“껙!”
단말마와 함께 빅피그가 쓰러졌다.
“후우, 후우. 하아. 으아아!!”
빅피그가 쓰러진 직후 김예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전투 직후에도 긴장을 늦추면 안 돼요. 방금 그 소리를 듣고 다른 몬스터가 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더는 못 싸우겠는걸요.”
“아닌 거 알고 있는데.”
“으아아. 지독해!”
김예리는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허공을 응시한다.
분명 레벨이 오른 거겠지.
“대박.”
그녀는 흘러내리는 안경을 쑥 밀어 올리고는 고양된 목소리로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레벨이 10이나 올랐어요. 방금 전투로 말예요!!”
“그럴 만하죠. 빅피그는 D급 중에서도 꽤 강한 녀석인데 F급이 혼자서 해치웠으니.”
“혼자서라고 하기는 뭣하지만요.”
그렇게 말하는 김예리의 표정은 밝기만 하다.
그녀는 10년 만에 레벨이 두 배가 된 거다.
“진짜 대박…….”
“자, 그럼 쭉쭉 레벨을 올려 볼까요?”
“좋아요! 아, 아니. 좀 쉬었다 가요!”
“이 뒤로는 더 센 몬스터들이 나올 거예요. 앞으로는 빅피그 외에는 혼자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첫 타격을 한 뒤에 도트딜을 넣어 주세요.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레벨이 오를 테니까.”
오늘은 김예리에게 빅피그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 던전을 나갈 때쯤에는 충분히 가라고스를 상대할 수 있게 되겠지.
* * *
“그어어어어!”
거대한 사슴 형태의 몬스터가 쓰러진다.
“후우, 후우.”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날카로워진 김예리가 검을 털어 가라고스의 피를 떨쳐냈다.
“가라고스는 이 던전에서 보스 몹을 제외하고 가장 강한 몬스터예요.”
“후우우……. 알아요.”
그녀는 가라고스의 피와 뒤섞인 땀을 닦아내며 숨을 골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어요. 솔직히 보는 나도 재밌었으니까요.”
“이런 괴물을 처음부터 혼자 상대하라니. 정말 너무해요.”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요? 그만큼 예리 씨가 강해졌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한 건데요. 지금까지 레벨이 얼마나 올랐죠?”
“……맙소사, 믿을 수가 없네. 저 이제 레벨이 99예요.”
“예리 씨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레벨이 높다고요.”
물론 레벨만 높다고 해서 랭크를 무시하고 강해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F급보다 강해졌을 거다.
F급들 대부분이 50 이후로 레벨 쌓기를 그만두고 은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F급들은 다른 랭크들보다 훨씬 레벨을 올리기 쉽기에 이렇게 김예리처럼 두 등급 높은 던전에 오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물론 F급을 데리고 두 단계 높은 던전에 들어올 각성자는 없겠지만 말이다.
“나보다는 높지 않다.”
하케임이 끼어들었다.
정말 눈치가 없기는.
“지금은 예리 씨의 성취를 칭찬해 주자고.”
“아, 그런 건가. 알겠다! 나보다 높지는 않지만, 대단하다.”
커다란 손으로 손뼉을 치자 김예리가 활짝 웃는다.
“정말 고마워요. 다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맙소사,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이런 행운을 제가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레벨 100을 앞에 두니 감상적인 기분이 되나 보죠?”
“하아, 지금 누구보다 무드를 깨고 있는 건 은하준 님이거든요.”
김예리와 한바탕 웃고 나니 나 역시 기분이 무척 좋다. 처음 한결이와 던전을 돌면서 레벨을 올리던 때가 생각난달까.
“이제 보스 몹만 남은 거죠?”
“맞아요.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보스 몹까지 저 혼자 맡으라고 하는 건 아니죠? 저 이젠 진짜로 지쳤어요.”
“하하하, 그렇게까지는 안 할 겁니다. 예리 씨가 지치는 것도 사실이고요.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 넷이서 단번에 해치우고 귀가하도록 하죠. 그래도 다들 예리 씨가 타격할 타이밍은 줘야 한다?”
“그래.”
“물론이다!”
그때 망량이가 뒤통수를 톡톡 건드린다.
“응? 왜?”
“주인님, 수수께끼를 발견했는데요.”
“뭐?!”
망량이가 가리킨 곳에서 졸졸졸. 작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