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제108편
탁. 오스킬이나 아니면 관련자로 추정되는 그녀가 아파트 화단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뒤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다.
“안 되지.”
휘이익! 쉬익.
재빠르게 그녀를 추적한다. 터억. 단숨에 그녀의 앞을 막아선다.
“히, 히이이익!!”
그녀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내가 성큼 앞으로 다가가자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뭐야, 각성자 맞아?
“이봐! 왜 도망가는 거야?!”
“자,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다는 거지?”
“그, 그게에…….”
그녀는 겁에 질려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일단 진정하고. 내 이야기 좀 들어 봐요. 이렇게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남의 집 앞에 다짜고짜 나타나면 당연히 사람이 놀라지 않을까요…….”
말을 잘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할 말은 다 하고 있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내 연락을 무시했잖아?”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찾아와도 되는 건 아니죠…….”
“…….”
“으, 으아앗! 그렇게 노려보면서 위협하는 것도…… 곤란하거든요!”
“진짜 할 말은 다 하네. 이럴 거면 왜 도망쳤던 겁니까?”
“그야……. 그야……. 제가 한 짓이 있으니까…….”
그녀는 두꺼운 뿔테안경 안의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뭔가 되게 독특한 캐릭터네.
“그러니까 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자각하고 있는 거죠?”
“무, 물론이죠……. 하지만 그에 관해서 어떤 보상을 원하시든 간에…….”
“어쨌든 당신이 오스킬이 맞죠?”
“헉, ……네, 네.”
“딱히 보상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그럼 왜 이렇게 위협적으로 등장하셨죠?”
“딱히 위협적이진…….”
“이렇게 등장한 것 자체가 위협적이라고요.”
“…….”
“…….”
“그러니까 난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온 거라니까요.”
“……네에.”
그녀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힘들게 다시 입을 연다.
“그럼 차 한잔하실래요?”
황당한 여자다.
* * *
쪼오오오옥.
커다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빨아들인 뒤 오스킬은 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캬하. 역시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아아메지.”
“당사자인 사람 바로 앞에서 일이 안 풀린다고 하지 마요.”
“에헴, 헴…….”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침착한…… 아니, 침착보다는 약간 참담한 표정을 했다.
아파트 근처 아주 귀여운 분위기의 개인 카페에 앉아 있는 우리 두 사람은 그 모습이 아주 어색하고 이상해 보인다.
왜인지 테이블 중앙에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까지 놓여 있다.
한 조각이라면 그래도 그러려니 할 텐데 두 조각인 데다 하나는 내 쪽으로 살짝 밀려 있다.
나보고 지금 이 상황에 이걸 먹으라는 건가?
너무 강압적인 분위기가 될까 봐 결이와 하케임은 멀리 떨어진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물론 멀리 떨어졌다고 하기에는 카페가 너무 작아서 거의 옆 테이블 거리지만.
“그러니까 찾아오신 이유가…….”
“당신이 또 연락받지 않고 도망칠까 봐.”
“제 주소는 어떻게 알고…….”
“그건 몰라도 됩니다.”
“역시 불법적인 루트군요.”
“이봐요. 우리 제발 다음 대화 좀 해요.”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얹자 그녀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넵.”
“일단 위협하려던 건 아닌데 본의 아니게 겁을 줘서 미안합니다. 그만큼 나는 당신을 꼭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요.”
“네엡. 저에게 무슨 볼일이…….”
“당신 영상이 필요합니다. 잠깐, 내 메일을 안 읽어 봤어요?”
“제, 제 영상요?!”
오스킬은 깜짝 놀라면서도 어쩐지 기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읽기는 했는데요. 사실 은하준 님이라고 하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서 제대로 못 읽었거든요. 그래요. 수사에 협조하라고……. 절 고소하시려는 줄 알고 채널을 지워 버렸어요.”
“맙소사……. 대체 왜…….”
“그야…….”
“애초에 유명한 너튜버라면서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겁니까?”
“이거 봐요.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니까?”
“네?”
“아뇨……. 은하준 님은 그, 저기. 너튜브를 잘 안 보시는 것 같길래…… 방심하고 있었죠.”
“뭐라고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나한테 도청기라도 설치했어요?”
인상을 찌푸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자 오스킬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때 병원에서 반응이…….”
“병원?”
“첫 각성하셨을 때요.”
“아, 맞아. 그때도 당신이 우릴 촬영했었죠?”
“그, 그래도 그때 제가 좀 도와드렸어요!”
“도왔다고요?”
“놀이……. 두 분을 빨리 발견하지 못하도록 제가 공간 음소거 스킬을 사용해서…….”
“아.”
기억이 난다.
그때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대피에도 놀들이 선뜻 공격하지 않았었다.
그때 오스킬이 놀들에게 스킬을 걸었던 모양이다.
“……그랬군요. 기억나요. 고마웠어요.”
“대신 영상을 좀 찍었죠.”
“도와줬다고 영상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되죠.”
“……넵.”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여튼 이때까지 저와 제 동료들의 영상을 함부로 찍고 게시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에 대한 보상이나 책임을 묻는 건 아니지만 부탁할 게 있어요. 메일에 적혀 있었다시피, 나는 당신 영상을 모두 살펴보기를 원해요. 편집 안 된 원본으로요.”
“에엑?! 그, 모두라면 얼마나…….”
“전부 다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영상 모두.”
“그걸 다 살펴보겠다고요? 말도 안 돼요. 그건 몇만 시간이나 될걸요.”
“하지만 필요해요. 그리고 살펴보는 건 당신이고요.”
“에에엑?!”
생크림 케이크를 가르던 그녀의 포크가 테이블로 툭 떨어진다.
“금색 꽃문양을 지닌 사람들이 찍힌 게 없는지 확인해 줘요.”
* * *
“그 여자,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다.”
하케임이 커다란 종이 가방에 담긴 과자 세트를 보며 방긋 웃는다.
오스킬에게 받은 수제 쿠키 세트다.
이런 걸로 봐줄 생각이 전혀 없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동안 쌓인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다며 억지로 건넨 물건이었다.
“게다가 은하준, 네 팬이라고 하던데.”
“팬이고 뭐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남의 영상을 함부로 찍어서 너튜브에 게시한 대가로 다른 각성자들에게도 몇 번이나 고소를 당했다잖아.”
결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 가방을 노려본다.
“뭐, 사실 나는 크게 상관없어. 어차피 결이나 하케임은 S급이니까 오스킬의 너튜브가 아니더라도 유명세를 탈 수밖에 없거든. 이번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야 오히려 이득이랄까.”
“하지만 하준이 넌…….”
“뭐야. 내가 D급인 주제에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오스킬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결이에게 장난식으로 툭 쏘아붙였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너도 하니까…….”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는 결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그 유명한 S급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D급이라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오스킬 채널에서 나를 꽤 집중해서 조명해 준 덕분에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D급이라 할지라도 S급을 꽤 받쳐 주네, 라는 이미지가 퍼진 것 같더라고.
회귀 전보다 이미지가 훨씬 낫다고 해야 하나.
그때는 어딜 가나 쓴소리만 들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오스킬을 놀라게 한 것이 꽤 미안해진다.
‘그래. 손예원이 갑작스레 찾아왔을 때도 얼마나 놀랐다고.’
반대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놀랄 만하고 무서울 일인데. 다음에 만날 때는 이쪽에서도 뭔가 준비해서 제대로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그 여자가 테러 단체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면 좋겠군.”
“그러게. 뭔가 나오긴 해야 할 텐데.”
그전까지는 마땅히 추적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안사홍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고객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겠지만, 이번에 일어난 테러 상황을 보면 협조할지도 모르잖아.’
그는 불법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하는 상인이다. 하케임을 위한 위조 신분을 만들어 주었을 뿐 아니라 본인 목숨까지 위협받는 무서운 사람들과도 거래를 주고받는 인물이니까.
부르르르.
안사홍에게 들러 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안사홍이잖아.’
툭.
[안사홍입니다. 잘 지내고 계시죠? 뉴스로 봤습니다. 테러 현장에서 대단하시더군요.]
“뭘요. 무슨 일이세요?”
[전에 말씀드린 계약 건에 관한 겁니다.]
“아아.”
[거래가 잡혔으니 호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되나요?”
[일주일 후입니다. 장소는 늘 보던 곳으로 하죠.]
“필요한 인원은요?”
[이번 거래에서는 큰 인원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S급 두 명이면 충분하겠군요.]
S급 두 명이라니, 거기서부터 이미 엄청난 병력인데 대체 어떤 사람들을 만나서 거래하는 거야?
간단한 통화가 끝나고 나니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안사홍 이 사람의 비밀은 대체 뭘까?”
“응? 비밀?”
“아아, 뭔가 비밀이 많은 사람 같아서.”
그에게 영혼 감별사가 통하지 않았던 게 떠오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스킬은 발동되었지만, 측정을 할 수 없었던 거지만.
“이번 임무에는 나랑 결이, 하케임까지 셋이서 가야겠어.”
하케임의 얼굴이 밝아진다.
“난 좋아.”
“좋은 게 아니……. 아니다, 그래. 좋으면 됐지. 하지만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 알겠지?”
“알겠다, 은하준.”
결이는 어쩐지 나와 하케임을 무진장 걱정하는 얼굴로 바라본다. 안사홍과 관련된 일이 내키지 않는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헤헤.”
하케임의 미소만 맑을 뿐이다.
* * *
“비밀 임무 같다.”
하케임은 밝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다.
사실 비밀 임무가 맞기는 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지 않았으면 한다.
“긴장을 늦추지 마.”
결국 결이가 한소리 한다.
“하준이 너도. 위험하니까 절대로 방심하지 마.”
아예 이 임무가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성실한 결이다. 역시 우리 결이지.
회귀 전보다 훨씬 착실해진 것 같다. 대견하구만.
“어서 오시죠.”
단홍 상사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평소보다 격식 있는 옷차림의 안사홍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번 손님들은 그렇게 난폭하신 분들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난폭이라……. 떨리네요.”
“후후후. 그저 제 뒤만 잘 지켜 주시면 됩니다.”
안사홍이 앞서서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또 전에 없던 새로운 문이 보였다.
“자아, 여러분. 저 문을 통과하고 나서는 입을 열면 안 됩니다. 이건 중요한 일이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내가 눈짓하자 하케임과 결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말을 하지 말라니. 어차피 중요한 거래 앞에서 떠들 생각도 없었지만, 어쩐지 미리 고지받으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안사홍이 커다란 가죽 캐리어를 손에 들고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끼이익.
새카만, 문 안쪽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