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제95편
쿠광! 쿠과광!!
공중이나 모함의 바로 위, 아래 할 것 없이 언데드 와이번들과의 전투가 시작됐다.
가지각색의 공격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휘익! 휙! 공중 이동기를 가진 헌터들이 날쌔게 움직여 언데드 와이번의 뼈를 망가트리고 완전히 분해한다.
그 현란하고 처절한 전투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있다.
쉬우우우우!
퍼버버버벅!!
거대한 창검으로 언데드 드래곤의 뼈를 단번에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남자.
카시우스 하케임의 강력한 기본 공격에 주변 헌터들의 눈이 크게 뜨인다.
“엄청나잖아?”
“저 사람 누구야? 못 보던 얼굴인데?”
“그보다…….”
콰르르릉! 콰르릉!
하케임의 주변으로 미친 듯이 떨어지는 낙뢰.
그건 한결의 것이었다. 낙뢰는 하케임의 창검처럼 한 번에 와이번을 깨부수지는 못했지만, 놈들이 주변을 피해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한결이 터 준 길로 은하준이 천천히 활강하며 나타났다.
“조심 좀 해. 지금 일부러 주변으로 잔뜩 끌어당기고 있잖아.”
“흠? 한결이 이렇게 처리해 주는데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게다가 너 내가 적당히 싸우라고 했지. 실력을 다 드러내면 어떡해.”
“아.”
하케임은 놀라며 자기 이마를 짜악 하고 내리쳤다.
“깜빡했다.”
“못살아…….”
하준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각자의 전투 때문에 하케임에게 집중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몇몇의 시선이 이쪽을 힐끔대는 게 느껴졌다.
‘이미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A급 고레벨로 보이도록 조절하면서 전투에 임하라고.”
“알겠어. 그래도 방금까지는 어떻게 넘어가 줄 수 있지 않을까. 평타 공격이었으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하준 곁으로 한결이 바짝 붙었다.
“3초.”
“헛. 우리 먼저 간다.”
한결이 하준의 허리에 손을 두르자마자 점멸해 어느새 두 사람은 모함에 착지했다.
“아~ 둘이 손발이 척척 맞네. 샘나게.”
하케임은 입을 삐죽이며 괜히 옆에 있는 와이번을 향해 창검을 휘둘렀다.
* * *
“좋아. 이런 식으로 너랑 나는 모함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싸울 거야.”
“그래.”
결이는 모함 근처의 몬스터들을 공격하기 위해 짧은 전멸을 쓰며 공중전에 투입된다.
‘너무 흥분해서 깊게 들어가면 안 된다.’
분명 빠른 수습이 필요한 사건이지만,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각성자들이 해결 가능한 일이다.
나는 이곳에서 사상자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헤르메스의 이동기 쿨 타임이 아직 3분.’
3분마다 공격과 방어를 번갈아 가며 전투를 진행 중이다.
“크아아악! 도, 도와줘!!”
와이번에게 물려 하늘로 끌려 올라가는 각성자가 비명을 질렀다.
“억압의 손길!”
차르르르륵!!
반투명한 사슬이 각성자를 붙잡은 와이번의 몸에 꽁꽁 휘둘린다.
터억! 사슬의 반대편은 모함과 연결해 그 무게로 와이번을 잡아 둔다. 녀석은 모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움직임이 봉해지고 벗어나지 못해 끙끙대기 시작했다.
와중에 스킬을 하나 더 건다.
‘불길한 예감!’
내 눈에만 보이는 희뿌연 안개가 와이번을 감싼다. 녀석은 버둥거리다가 결국 붙잡았던 헌터를 떨어트린다.
‘이 스킬이 은근히 잘 먹힌단 말이야. 걸리면 무조건 실수가 터지지.’
차르르르륵!! 억압의 손길을 다시 한번 사용해 떨어지는 헌터를 받아 내는 동안, 모함 위에 있던 헌터들이 와이번을 향해 스킬을 쏟아 낸다.
언데드 와이번은 A급 중에서도 상위권의 강력한 몬스터지만 헌터들의 집중 포격으로 엄청난 대미지를 때려 맞는다.
“끄르르르……! 키에에!!”
그렇게 언데드 와이번 하나가 산산조각이 났다.
“헉,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상우 씨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길드 사람이거든요.”
구출된 헌터와 동료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전투를 위해 제 위치를 찾아간다.
“망량아. 나 이제 마나 바닥났다.”
“무, 무아앙…….”
망량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어깨에 툭 떨어진다.
“괜찮아. 좀 쉬어 가면서 하면 되니까.”
와이번의 수가 너무 많고 보통 근접 무기로는 전투를 이어 나가기 힘들어 스킬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덕분에 마나가 바닥을 보이기 일쑤.
아무리 망량이가 마나를 회복시켜 준대도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거다.
‘그래도 망량이랑 같이 명상하면 마나가 두 배로 빨리 회복되니까…….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모함 위에 있어야겠군.’
목이 탄다. 모함 내부로 들어가서 뭐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분명 피할 수 있는 속도였다. 이미 모함을 타기 전에 영혼석을 소울 포인트로 바꿔 민첩에 모두 투자했으니까.
하지만 리치의 마법을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쉬웠으면 리치가 S급 몬스터가 아니었을 테니까.
“이히히히!!”
소름이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리고 리치가 타고 있던 와이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를 낚아챈다.
‘젠장!’
입까지 순식간에 굳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지독한 마법이다.
다행히 독은 아닌지라 마법을 깨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와이번은 순식간에 고도를 높인다.
리치가 타고 있기에 지능이 더 높은 것인지 리치가 조종을 잘하는 것인지 모함 위의 헌터들이 쏟아 내는 공격을 모두 피해 낸다.
이렇게 황당하게 납치당하다니.
어째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납치만 당하는 기분이 드는데 이거 기분 탓이겠지?
‘한결아! 나 잡혀간다!!’
눈으로 한결이를 좇지만 보이지 않는다. 분명 다른 헌터들을 구하고 있을 거다.
이놈의 구름만 아니었다면 쉽게 한결이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한결아아아~!!’
리치의 와이번이 구름 안개 사이를 쏜살같이 비행하며 중심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하케임의 모습을 찾는다. 하지만 이내 하케임이 있을 위치에서 더 깊이 들어왔다는 걸 깨닫는다.
‘아, 이런. 젠장. 이렇게 깊이 들어오면 곤란한데.’
순식간에 모함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이 정도면 다른 헌터에게 구해지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하는 정도다.
시선을 내려 명치 쪽을 보니 선명하게 소울메이트 스킬의 선이 보인다.
두 개.
결이와 하케임에게 연결된 거다.
가끔 텔레파시 비슷하게 직감이 전달되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가능한데 이렇게 마법에 걸린 채로 붙잡혀 가는 동안에는 거의 성공할 확률이 없다.
‘크윽. 제발~!!’
안간힘을 써 보지만, 뭔가 전달되는 느낌이 전혀 없다.
“무앙! 무아앙~!”
목덜미에 붙어 있던 망량이가 급하게 소울메이트 선을 따라 반대편으로 튀어 나간다.
‘오, 그래. 망량! 똑똑하다!’
선을 따라 날아가서 두 사람 중 하나라도 불러올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
“케헬헬헬헬!!”
하지만 망량이를 눈치챈 리치가 지팡이를 들어 올린다.
쉬이이익! 퍼어억!
망량이는 그대로 리치의 마법에 맞아 바다로 추락한다.
‘망량아!! 안 돼!!’
추락하는 망량이가 구름에 가려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키헬헬헬헬.”
리치가 뭐라고 중얼거리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아마 한국어로 이야기했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망량이가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쩌저저저저저적!
순간 귓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한기가 느껴졌다.
‘어라?’
힘차게 날갯짓하던 와이번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와이번은 추락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주위를 둘러보지만 구름이 짙어져 사태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하아.’
내쉬는 숨이 허옇게 눈에 보인다. 춥다.
쩌적, 쩌저적.
와이번의 몸에 성에 같은 것이 끼는 게 보인다. 리치는? 고개를 확 돌려 놈을 확인하면서 깜짝 놀라고 만다.
리치의 하반신이 이미 얼어붙어 있다.
쩌적, 쩌저적…….
“키헤에에엑!!”
리치가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지팡이를 흔들지만, 순간 어둠 속에서 나타난 흰 손이 리치의 손목을 잡아챘다.
스으으으.
그리고 잡아챈 손목이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헉, 저건…… 대체.’
쩌적. 투둑.
리치의 손목이 또각.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부러진다.
“케에에에……!!”
그리고 리치의 몸이 완전히 얼어붙는다.
스윽.
구름 속에서 흰 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한세희!’
검은 구름 사이의 새하얀 남자는 마치 몸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토옥. 한세희가 얼어붙어 굳어 버린 리치의 코를 건드리자 와르륵. 리치가 약하게 뭉쳐 놓은 눈송이처럼 흩어진다. 그 충격으로 아래의 와이번까지 완전히 박살 나 버린다.
‘어, 어어……!’
와이번이 망가지자 내 몸은 자유로워졌다. 그러니까 추락하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누군가 내 몸을 받아 낸다.
당연하게도 한세희다.
“음, 은하준 씨던가?”
그의 비행 스킬은 매우 안정적이다. 하케임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공중에서 그대로 떠 있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한세희의 옷깃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린다.
추워서 그런 것인지 납치당하느라 긴장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좀 쪽팔린다.
그런 내 손을 한세희가 슬쩍 보더니, 자기 코트를 벗어 내 몸에 덮어 준다. 그리고 모함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공중을 걷듯이 빠르게 달렸다.
솔직히 고맙긴 한데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코트를 덮으니 떨림이 줄어들었다.
정말로 추웠던 모양이군.
“미안해요. 내 능력이 좀 그래요.”
“네?”
갑자기 한세희가 말을 걸어 몸이 움츠러들 만큼 매우 놀랐다.
“춥죠?”
“아, 아뇨.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다친 곳은 없나요?”
“아, 네 뭐. 가벼운 타박상 정도?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화낼지도 모르지만, 당신 등급에 비해 너무 위험한 전투예요.”
그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 나왔다.
“맞는 말이죠. 사실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서.”
“아, 괴물 특수부대 때문이군요. 그자들은 항상 일을 이렇게……. 이번 일은 걸고넘어져도 좋을 것 같군요.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말해요. 증인이 되어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해 주겠다고?
갑자기 한세희와의 거리가 확 좁혀진 것 같아서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하는 말인가?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할 사이도 없이 저 멀리로 튕겨 나갈 뻔했다.
후우우욱! 작은 토네이도 같은 것이 빠른 속도로 한세희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한세희는 누군가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나를 놓지 않았다.
“아아, 유감이네요.”
머리 위에서 들려온 건 중국어였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이 한세희를 죽일 수 있는 기회인 줄 알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살기를 지닌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숨이 다시 희뿌옇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