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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S급 소울메이트-91화 (91/250)
  • 제91화

    제91편

    붉은 하늘, 피로 빚은 것 같은 짙은 노을이 공격적으로 하늘에 퍼져 있다.

    그리고 무너져 내린 대지도 마찬가지로 붉었다.

    언뜻 노을빛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피였다.

    살아 있던 것들이 흘린 피.

    그리고 세상은 모두 망가져 있었다.

    검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케임은 생각했다.

    ‘모두 끝났구나.’

    멸망.

    하케임이 바라던 것이 그것이었을까? 어쩐지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마음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끝나 버린 세계에 홀로 서 있었다.

    더는 슬픔도 행복도 괴로움도 느낄 수 없음을 확신하면서.

    그가 쓸쓸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명치에 연결된 희뿌연 선을 발견한다.

    ‘이게 뭐지?’

    정체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몸에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 선은 하케임이 지나온 뒤를 향해서 쭉 이어져 있다. 하케임은 선이 이어져 있는 곳을 돌아보며 고민하지만, 역시 선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쩐지 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허억!”

    하케임이 눈을 떴을 때, 이곳은 던전 안이었다.

    끝나 버린 세계는 어디에도 없고 곁에는 은하준과 신선의 길드원들이 있었다.

    ‘그래, 나는 이들과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고…….’

    분명 그냥 꿈이 아니었다.

    하케임이 꾼 꿈은 그가 겪었던 기억의 일부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아도 확신했다.

    모든 것이 일어났던 일이었다. 단 하나만 빼고.

    지구로 오기 전에는 은하준을 만나지 못했으니 몸에 소울메이트의 선이 연결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억과 환상이 뒤섞인 것이리라.

    ‘내가 있었던 세계는 멸망해 버린 걸까?’

    그렇다면 돌아갈 수 없는 걸까?

    “하케임. 괜찮아?”

    은하준이 물어 온다.

    지구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인간. 병원이라는 곳에서 눈을 떴을 때도 가장 먼저 마주친 얼굴. 그리고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다.

    “무서워…….”

    하케임은 자리에 누운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가장 크게 다가오는 감정은 공포였다. 되찾은 기억은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왔다. 지구에 혼자 뚝 떨어졌을 때조차도 이만큼 무섭지는 않았는데.

    하케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뭐?”

    “기억이 돌아왔어.”

    “…….”

    “우리는 일단 각자 쉬고 있을게요.”

    “일단 건강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하케임의 상태를 보더니 길드원들이 눈치를 보며 각자의 자리로 떠나간다.

    “기억이 전부 다 돌아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강렬한 한 가지만 떠올랐어.”

    “……나쁜 기억인가?”

    “잘 모르겠어.”

    은하준은 하케임이 어서 말하도록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하케임을 기다릴 뿐.

    “난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

    “어째서?”

    “아주 황폐하고 모든 것이 무너진 곳에서 혼자 서 있었어. 살아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것도 깨달았지.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 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런데 한편으로 무척 후련했어.”

    “…….”

    “내 세계는 멸망한 것 같아. 내가 떠올린 것이 망상이 아니라면 말이야.”

    “이런,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다시 말하지만 난 기뻐했던 것 같아.”

    “…….”

    “내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악당이라면 어떡할 셈이야?”

    “뭘 어떡해. 내가 어떡할 방법이 있나? 재수 더럽게 없네, 라고 생각할 듯?”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하준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하케임은 마음이 놓였다.

    “세계를 멸망시킬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니 이길 수 있을 리가……. 뭐, 그래도 궁리는 해 보겠지. 어떻게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

    “푸하하. 은하준은 사람이 헐렁하게 굴다가도 그런 끈질긴 구석이 있는 거 같다니까.”

    하케임이 떨리는 몸을 손으로 비비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닐 것 같아.”

    은하준의 목소리에 하케임은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뭐가 사실이든, 지금까지 내가 봐 온 너는 그래. 뭐 진짜로 나쁜 놈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지금도 나쁜 놈이고 싶어?”

    “아니. 나는…… 나는 너랑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러니까 그냥 좋은 놈…… 응? 나랑? 뜬금없네. 뭐…… 그런데 우리 친구 아니냐?”

    “어?”

    “네가 계속 친구라고 했었잖아. 지금 와서 밑장 빼기냐? 섭섭하네.”

    “아, 아냐! 우리 친구 맞아!”

    “하여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의지만 있다면 사람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고. 그걸 믿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게다가 기억을 다 되찾은 것도 아니잖아? 뭔가 착각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하케임답지 않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정확하게 기억을 다 되찾을 때까진 미리 걱정하지 마. 참 나, 내가 남한테 이런 소릴 다 하고.”

    타닥, 타닥.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느리고 길게 들리고 주변으로 벌레 우는 소리가 커진다.

    누군가를 위로하면서 스스로도 위로받는 기분을 하준은 느끼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어졌어도 뭐, 여기 새 친구들이 생겼으니까. 이곳에서 지내면 되고. 정 찜찜하면 여기는 멸망하지 않도록 네가 도와주면 되지.”

    “뭐?”

    은하준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면서 웃어 보였다. 하케임 역시 따라 웃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엄습한 공포가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은하준이 말한 대로 하고 싶었다.

    새로운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이 있는 세계를 지키고 싶어졌다.

    * * *

    “자, 다들 빠진 거 없는지 잘 챙기고!”

    드디어 던전 공략 마지막 날이 밝았다.

    툭.

    조용히 다가가 결이의 어깨를 쳤다.

    어느새 나보다 훨씬 높아진 어깨가 깜짝 놀라 돌아본다.

    “하준아.”

    “오늘 조심해.”

    “……응.”

    “내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초조해할 필요 없어, 결아. 넌 강해. 강해질 거고. 그 옆엔 항상 내가 있을 거야.”

    벌건 대낮에 이런 말을 하려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지금 이 순간 솔직해지고 싶다.

    “우린 가족이니까.”

    “……나도 가족 하고 싶다.”

    “하케임?”

    “왠지 부럽다.”

    “뭔 소리야. 우린 친구 했잖아.”

    “나도 더 특별한 거 할래.”

    “친구도 충분히 특별해.”

    갑자기 끼어든 하케임 때문에 분위기가 붕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어쩐지 결이의 표정은 편안해진 것 같았다. 아무렴 어쩌랴. 어찌 되었든, 너만 잘되면 나는 좋다.

    끼이이익…….

    골짜기를 파고들어 거대한 돌문을 발견한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연다. 그 안에는 던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포털이 있다.

    “응? 보스 몬스터는?”

    “여긴 이렇게 문만 찾고 끝인가?”

    “설마…….”

    “아녜요. 분명 몬스터가 나온다고…….”

    드드드드…….

    골짜기 전체가 울리기 시작한다. 빅풋을 만났을 때와는 급이 다른 울림이다.

    산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 같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골짜기 너머에서 노여움이 가득한 커다란 목소리가 울린다.

    구구구궁.

    골짜기를 넘실대며 구름을 뚫고 등장하는 보스 몬스터는 용이다.

    서양의 드래곤이 아니라 동양의 용.

    뱀처럼 비늘이 있는 기다란 몸체에 매처럼 짧으나 강력한 팔다리, 사슴의 뿔과 사자의 얼굴을 한 용이다. 하지만 놈은 완벽한 용이 아니다.

    “이 훼룡의 침소에 인간 따위가 발을 들이다니.”

    훼룡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가는 과정 중 하나.

    아직 여의주가 없어 하늘로 오르지 못한 늙은 이무기인 것이다.

    스스스슷.

    훼룡이 움직일 때마다 골짜기의 바위가 부서지고 나무가 부러졌다.

    “너희들을 모두 삼켜 여의주를 만들 힘으로 삼아야겠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단숨에 모두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다.

    보아하니 성격이 무진장 급한 이무기인가 보다.

    “시선 분산시켜 주세요!”

    메인 딜러들이 앞으로 튀어 나가고 전투가 시작된다.

    ‘여기서 팁이 있지.’

    세월이 흘러 한 6년쯤 후에 밝혀지는 보스 룸의 비밀이 있었다. 이무기를 최대한 오래도록 지치게 만든 뒤, 특정 체력까지 낮추고 말 피를 뿌리면 여의주를 얻을 수 있는 이벤트다.

    여의주를 얻으면 뭐가 좋은가.

    이 여의주라는 것이 이름은 여의주이지만, 효과는 랜덤 박스랄까? 각성자가 여의주를 발동시키면 레어 아이템을 준다.

    물론 100%의 확률로 레어 아이템을 주는 것은 아니고 C급 이상의 아이템을 주는데 그중에 레어 아이템을 얻을 확률도 있다는 거다.

    랜덤 박스를 얻기 위해 이미 길드원들에게는 보스 룸에 관한 설명을 마친 상태.

    모두의 허리춤에는 포션 병이 하나씩 달려 있는데 안에 든 것은 포션이 아니라 말 피였다.

    ‘말 피를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안사홍 표정이…… 위조 신분증을 구해 달라고 했을 때보다 이상했지.’

    휘익! 이번에는 초장부터 메인 딜러들의 뒤를 따른다.

    결이와 하케임에게 연결된 두 선을 따라 주변을 살피니,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지형이다.

    “좋아, 가자!”

    * * *

    “분하다……!!”

    말 피를 모두 뒤집어쓴 훼룡이 부들부들 떨더니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똬리가 점점 더 격하게 뭉쳐진다.

    뿌득, 뿌드득.

    안으로, 안으로. 계속해서 파고드는 똬리는 훼룡의 크기를 점점 더 작게 만들었고 서서히 훼룡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다.

    파아아앗.

    그리고 사람 머리통보다 큰 여의주로 변모한다.

    “이야! 끝내준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수고했어!”

    “대단한데. 이게 여의주인가.”

    랜덤으로 나오는 아이템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식으로 정했다.

    “하준 씨, 아까 그 디버프 스킬 뭔가요? 그것 덕분에 엄청 수월했어요!”

    “불안한 예감이라는 디버프 스킬이에요. 평범한 건데요, 뭘.”

    “뭐가 평범해요. 대상의 집중력을 디버프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했죠? 장난 아녔어요. 그 스킬 들어가자마자 훼룡의 스킬은 전부 미스가 났잖아요.”

    “맞아. 오히려 2페이즈일 때 상대하기가 더 좋더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보다가 결이랑 눈이 마주친다.

    결이가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들어 올린다.

    “자, 그럼 랜덤 박스를 한번 까 볼까?”

    “제일 재밌는 시간이네요!”

    “와아! 내 아이템 나오면 좋겠다.”

    “두근두근!”

    “하준 씨가 열어 봐요.”

    “네? 제가요?”

    “이번 던전에서 고생 제일 많이 한 것 같은데.”

    “사실 항상 하준이가 제일 고생을 많이 하잖아.”

    “에이, 다들 무슨 소리예요.”

    어느새 내 손 위에 올려진 여의주,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무겁다.

    “두구두구두구.”

    스으읏.

    마력을 약간 불어 넣자 쩍, 쩌적. 여의주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오, 오오!”

    여의주의 모양이 녹아내리고 아이템의 형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빠바밤!

    요란하게 시스템 알람이 울리고 모두의 앞에 완전한 형태의 아이템이 완성됐다.

    [랜덤 아이템 (태산 각반)을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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