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제90편
“도망, 쳐! 빨리!!”
결이의 외침에 미간이 왈칵 일그러진다. 도망치긴 뭘 어떻게 도망쳐.
지금 입에서 피를 토하는 사람이 할 말인가?
그걸 보고도 도망치리라 생각하는 건가?
휘익!
헤르메스의 신발을 이용해 결이가 붙잡힌 빅풋의 손으로 바짝 다가간다.
스릉.
새벽의 검이 검은 칼날을 빛내며 살벌한 궤도를 만들어 낸다.
결이를 옥죄고 있는 손가락을 단번에 썰어 버릴 것처럼 강력한 한 방이다. 손가락 피부는 빅풋이 가지고 있는 가죽 중 가장 얇은 곳이다. 그러니까 관절을 잘 노리면, 잘하면 절단해 낼 수도…….
몸을 한 바퀴 돌려 회전력을 더해 내리친다.
촤아악!
빅풋의 검붉은 피가 솟구친다.
“그어어어!!”
거대한 비명이 울리지만, 빅풋은 결이를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칫.”
마침 헤르메스의 신발 사용 시간이 모두 소요되었다.
추락하기 전에 빅풋의 팔을 타고 오른다.
“그르르르……. 그어어어……!!”
내가 올라탄 것을 느꼈는지 빅풋이 반대편 손을 뻗어 온다. 하지만 저 정도 속도는 손쉽게 피할 수 있다.
휙! 휘익! 타다닷!
빅풋의 손을 피해 가며 재빠르게 달려 머리 근처에 다다른다.
“귀!”
또다시 빅풋의 약한 부위.
스걱!
이번에는 한 방에 잘려 나간다.
“크아아아!!”
결이를 쥐고 있는 손 방향, 그러니까 남는 손의 반대편 귀를 잘랐기 때문에 빅풋은 아픈 귀를 부여잡기 위해 몸의 중심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귀를 감싼 팔의 겨드랑이가 무방비해진다.
타다닷!
빅풋의 어깨를 타고 달리면서 회전, 다시 힘껏 벌어진 겨드랑이를 베어 낸다.
“크어어어!!”
그러면 빅풋의 무게중심이 한 번 더 바뀌고.
“억압의 손길!”
이때 사슬을 이용해서 다리를 걸어 주면…….
구구구구. 쿠우우웅!!
빅풋이 바닥으로 넘어진다.
이러면 손을 놓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손가락을 한 번 더 친다.
차르르르륵.
억압의 손길을 빅풋의 몸에 휘감은 뒤 밧줄처럼 잡고 놈이 쓰러지면서 가장 위로 솟아오른 손을 노려 벤다.
촤아악! 다시 한번 피가 튀면서 놈이 드디어 손을 놓았다.
“결아!”
결이를 받아 드는데 녀석 몸이 이상하다.
덜렁?
“결아, 너 팔이…….”
“쿨럭.”
다쳤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심하게 다친 결이의 모습은 너무나 오랜만에 본다.
벌컥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지만, 지금 당장은 빅풋의 사정거리에서 빠져나가는 게 먼저다.
분명 놈이 따라오겠지만…….
후우웅.
거센 바람이 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니 하케임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됐다!’
하케임의 창검이 빅풋의 무엇인가를 잘라 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결이가 죽을까 봐 무서워서.
“하준아!”
다행히 자이언트 울프 무리를 뚫고 대호 형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형! 결이가!”
“이쪽으로 따라와. 길을 정리해 뒀으니까.”
“네!”
형을 따라 조금 뛰자 길드원들이 자리를 잡고 싸우는 곳에 도착했다.
“하준아!”
“창희 님! 치유 좀!”
“네, 천천히 내려놓으세요.”
“쿨럭……. 크읏…….”
그저 바닥에 내려놓는 것뿐인데도 결이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대체 얼마나 다친 걸까.
“내상도 심한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척 봐도 그렇네요.”
류창희가 손으로 결이의 몸을 간단하게 체크하고는 스킬을 발동한다.
“위그드랏실의 눈물.”
파아앗.
류창희의 손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양손을 모아 결이의 몸 위에 올려 두었다.
득, 드득.
뼈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결이가 경련했다.
“윽, 크윽!”
“힐이라는 게 마법처럼 뾰로롱 하고 일어나지 않죠.”
류창희의 말에 다른 길드원들이 놀란 눈을 했다. 나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힐러들의 스킬을 상상하면 그저 환한 빛이 잠깐 있고 다쳤던 몸이 순식간에 나아 눈 깜빡할 사이에 다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줄 안다.
하지만 힐러 계열에도 종류가 있다.
제일 흔한 타입이 류창희와 같은 부류인데 재생술사다.
“부러진 뼈와 찢어진 살을 재생시켜 다시 붙여 놓는 겁니다. 베인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면 어떤가요. 가렵죠? 힐을 사용하면 대상자는 그걸 한순간에 겪어야 하는 거랍니다.”
“히, 히익……. 그거 엄청 고통스럽게 느껴져요.”
“맞아요.”
진보라의 말에 류창희가 방긋 웃으며 말을 잇는다.
“게다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다쳤다면 재생하고 다시 이어지는 데 세포의 소모가 크거든요. 물론 결국에는 힐 스킬이 채워 주긴 하지만…….”
“그러니까 요점이…….”
“재생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아프다는 거예요.”
진보라와 염태규의 얼굴이 싸해진다.
득, 드드득. 지이익.
뼈와 살이 새로 돋아나 들어맞아지는 소리. 그리고 결이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한동안 이어진다.
“크윽! 윽…….”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네요.”
진보라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염소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여러분 다들 다치지 말아요.”
“앗, 네에…….”
“이 정도의 부상이 아니라 기력이 쇠한 거라면 고통 없이 회복 가능하니까요.”
힐이 끝나자 결이의 숨이 천천히 고르게 돌아온다.
쿠우웅!!
뒤에서 뭔가 커다란 소리가 들린다. 하케임이겠지.
이미 자세가 무너지고 엎어진 빅풋을 처리하는 건 하케임에게 쉬운 일일 터.
“다들 자이언트 늑대의 처리를!”
“앗, 마, 맞아!”
“아차.”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진보라와 염태규가 서둘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다.
결이가 치료를 받는 동안 인화 선배의 방어막이 버텨 주었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
“으으…….”
“한결.”
“……하준아.”
나는 한결이를 노려보았다. 속이 끓지만, 완전히 결이를 탓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의 결이는 너무 어리니까.
“미안하다.”
“응? 하, 하준이 네가 왜…….”
“내가 이 던전의 위험성을 좀 더 제대로 전달했다면 네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야. 빅풋이 어떤 몬스터고 어디가 약점인지 빨리 전달했다면 네가 다칠 확률이 훨씬 줄어들었겠지.”
“아니야, 하준아. 이건 내가…….”
“네가 죽는 줄 알았어.”
“…….”
“각성자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너무나 무서웠다고.”
“하준아…….”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도…….”
트라우마라는 게 정말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 지도 한참 지났고 이미 한 번 죽어 보기도 했고 회귀까지 했지만 나는 내 친한 사람이 죽는 게 너무나 두렵다.
주르륵.
결이 눈에서 눈물이 왈칵 흐른다.
‘응? 울려거든 내가 울 타이밍 아닌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결이가 벅벅 눈을 비빈다.
“우, 운 거 아니야.”
녀석의 반응을 보며 약간 짐작이 가는 게 생겼다.
업적 보상으로 받은 특성. 내가 죽음을 이야기하면 상대방에게 엄청 크게 와닿는다고 했던가.
그래서 결이가 놀랐나 보군. 그 덕에 나도 놀랐지만, 어쨌든 우리 둘 다 정신이 번쩍 들었겠지. 아직 전투가 끝난 게 아니니까.
치료가 끝나고 정신을 차린 결이가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뗐다.
“구해 줘서 고맙다. 조심할게.”
“그래. 다치지 마라. 가만 안 둘 테니까.”
장난을 보태 말하자 결이가 픽 웃는다.
퍼억! 퍽! 퍼어억! 퍽!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나 결이와 함께 돌아보는데 방어막 너머에 있는 자이언트 울프들이 날고 있다.
그러니까 날려지고 있다?
그리고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금발의 미인이 등장한다.
“다녀왔습니다!”
* * *
“이번에는 진짜 좀 위험했다. 그렇지? 한결은 괜찮았어? 그 녀석이 그렇게 반격할 줄은 몰랐네.”
하케임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빅풋 사건 이후로 훨씬 더 텐션이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역시 은하준의 브리핑이 도움이 많이 된다. 이런 식으로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주 편해!”
그리고 저렇게 자꾸 낯간지럽게 칭찬해 댄다.
“알겠으니까. 적당히 해. 벌써 10번은 말한 것 같다고.”
“하지만 사실인걸.”
“알았어, 알았어.”
“칭찬을 소중히 해라, 은하준.”
“네네,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곧 보스 룸이 나올 테니 다들 채비하세요!”
보스 룸이라는 말에 길드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드디어인가.”
“충분히 쉬었다가 들어갑시다.”
“너무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기운이 팔팔한 건 하케임뿐이다. 든든한데, 든든하긴 한데 왜 기가 빨리는 느낌이지?
‘사실 기가 빨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지.’
구석에서 눈치 보고 있는 결이.
빅풋 이후로 저런다. 딴에는 내색을 안 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이때까지 중에 가장 크게 다쳤었으니까 본인도 놀랐을 텐데 너무 분위기를 잡고 이야기해 버렸나 싶다.
업적 효과를 내가 끌 수가 없으니까 좀 곤란하긴 하다.
앞으로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더 조심해서 말해야겠달까.
‘힐러까지 마나가 바닥났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넉넉하게 보스 룸을 깨야겠는걸.’
벌써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던전 공략이 드디어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길드원들은 능숙하게 짐을 풀고 야영지를 만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개인 휴식 시간, 망량이와 함께 명상이나 하면서 마나를 급속으로 채울 생각으로 앉아 있는데 저 멀리 결이가 보인다.
어쩐지 빅풋 사건 이후로 어색하네.
“은하준!”
명랑하게 말을 건 사람은 하케임이다.
“응? 할 말 있어?”
“아니.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
“하케임은 정말 솔직하구나.”
“응? 칭찬이지?”
“칭찬이야.”
나도 적당히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문화권이 달라서 그런가 하케임은 정말정말 솔직하다. 그 솔직함이 부럽긴 하다.
강하기 때문에 저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내가 강하다면 나도 솔직할 수 있을까.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비밀을 혼자서 곱씹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말해서 함께 짊어질 수 있을까.
또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진다.
슬슬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라 주변은 조용하고 모닥불 타는 소리가 ASMR처럼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준다.
강한 사람에게는 뭐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든다.
“있지. 하케임은…… 멸망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응? 멸망?”
보기 드물게 하케임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만약에 이 모든 일이 결국에는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거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는 거라면 어떡할래?”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은하준? 고민이라도 있나?”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하케임 너는 강하잖아. 너라면 멸망 같은 건 거뜬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달까. 기억이 없는 지금도 이렇게 강한데, 기억만 완전히 돌아온다면 무적인 거 아냐?”
너무 진지한 것 같아서 피식 웃으며 약간 장난스레 말해 보지만, 그래도 뭔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내가 속한 세계가 완전히 멸망한다는 걸 나만 알고 있다면, 모두의 죽음을 알고 있는 건 나뿐이라면…….”
“윽.”
“응?”
“크……으윽.”
하케임이 갑자기 머리를 꽉 쥐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하케임?”
“크으으……!!”
급기야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왜 그래, 하케임!!”
“뭐예요?!”
“무슨 일이야?!”
“하케임?”
급하게 하케임을 일으켜 얼굴을 확인하니, 눈에 초점이 없다.
젠장, 뭐지? 나 또 뭔가 업적의 능력을 사용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