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제78편
“왜요, 형?”
“사실은…… 과정이 빨리 끝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
“응? 왜, 왜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호 형이 따로 한 말이 없어서 몰랐다. 센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
“하아. 다들 내가 S급이라서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고. 길드에 내 정보를 넘기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 하더라고. 너무 피곤했어.”
다른 사람들이 상에 음식을 펼쳐 놓는 사이 대호 형은 작게 속삭였다.
“모두에게 걱정시키기 싫어서 말은 안 했지만…….”
“형, 그런 건 바로 말하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내가 형인데.”
“참 나, 저한테까지 그러실 거예요?”
“……하긴, 넌 내 형이나 다름없다.”
“그건 또 너무 나가셨고.”
형이 들려준 이야기는 가관이었다.
결이의 경우는 천사라고 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든 시선이 따라붙고 그 시선들이 노골적이었다.
‘물론 우리 기수에서도 그런 사람이 아주 없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대호 형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화장실 칸까지 쫓아 들어오면서 말을 걸거나(물론 이 경우에는 기자가 난입한 것이긴 했다) 대호 형을 두고 자기들끼리 정치 싸움을 벌여 기수 내 분위기가 완전 박살이 났다든가 했다.
형으로서는 그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고 다행히 그 피로와 스트레스를 수업에 집중하면서 풀었다고 한다.
‘역시 대호 형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운동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가.’
만병의 치료제가 운동이라 하지 않은가.
“여기저기 얼마나 전화가 오는지. 직접 찾아오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모르지. 이미 센터 앞까지 쫓아왔던 그 사람일지. 업무용 휴대폰이랑 개인적인 휴대폰을 따로 쓰고 모르는 번호는 어지간하면 받지 않게 됐어.”
“그래도 방법을 찾으셨네요. 대단하세요.”
“하아. 이제 우리끼리 길드를 만들면 더는 이상한 사람들이랑 부딪칠 일이 없겠지?”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호 형의 얼굴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형은 길드장이니까요. 아무래도 엄청나게 만날걸요. 애초에 계속 마주치게 될 한국의 길드장이란 놈들은 죄다…….
한숨이 푹푹 나오지만, 이제 막 한고비를 넘긴 형 앞에서 티를 내지 않기로 했다.
“한결 낫겠죠. 물론 일은 많아지겠지만요.”
“일이 많아지는 건 좋아. 뭐든 할 수 있지.”
“좋은 자세네요!”
환희가 끼어들어 눈을 빛낸다.
“둘이서만 계속 속닥거리고 질투 난다고~? 대호 삼촌! 아니, 길드장님! 건설적인 이야기는 저랑 하셔야죠. 제가 부길드장인데!”
“미성년자도 부길드장을 할 수 있던가?”
“흥, 결이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부길드장은 미성년자도 할 수 있을뿐더러 곧 나는 미성년자가 아니야.”
“너 또 만 나이 잊어버린 거 같은데 일 년 더 기다려야 한다니까?”
“아…… 아아!!”
결이와 환희가 투닥댄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대호 형이 피식 웃으며 갈비찜을 하나 집어 내 밥 위에 올려놓는다.
“참 뭐랄까. 넌 점토 같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감사……. 네?”
“네 덕분에 이 별난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재밌게 보내고 있잖냐.”
“아…….”
“모두 행복해 보이고.”
“에이, 행복까지야……. 그건 제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아니야. 나는 하준이 네 덕분에 정말 행복해.”
“앗…… 형님, 갑자기 그러시면 저 감동받아요?”
“정말이야.”
대호 형은 내 밥 위에 갈비를 하나 더 얹으며 말했다.
“우리 길드. 잘해 보자. 열심히 하마.”
“형은 잘하실 거예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활동할 테니까요.”
“그래. 하하하. 하준이 넌 정말 든든한 동생이야!”
밥 위에 갈비가 하나 더 올라온다.
이러다가 갈비 탑이 쌓이겠다.
“그럼 우리 길드 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아요?”
“아, 그렇네.”
환희와 인화 선배가 손뼉을 탁 치며 우리 쪽으로 모여들었다.
“가, 같이 정하시게요?”
염태규의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뭐 길드가 별거냐.”
“사실 별거긴 한데.”
내가 받아치자 환희가 노려본다.
길드를 창설한다는 게 웬만한 사업 일으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얼마나 많이 가고 돈도…….
“내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
이 중에 가장 어린 건 환희인데, 이럴 때 보면 전혀 어려 보이지 않는달까.
어쩌면 우리 중에 제일 일을 잘하는 사람일지도.
“다시 돌아가서! 길드 이름으로 뭐 생각해 둔 것 없어? 인화 언니?”
“흐음, 나는 이름 짓는 걸 잘 못해서……. 환희는 뭐 생각해 둔 것 없어? 가장 바라던 사람인데.”
“사실 길드가 중요하지. 이름은 대충 지으려고 했거든요. 음…… 환희하우스. 이런 거?”
“우와아! 구려!”
염태규가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어떡해? 좋은 수라도 있어?”
“헬파이어 그룹. 이런 건…….”
“장난치냐.”
환희가 집어 던진 티슈가 태규의 무릎을 가격한다. 분위기가 금방 산만해진다.
손을 뻗어 태규를 앉히고 모두를 다독인다.
“다들 진정하고, 조금 더 진중한 이름은 어떨까? 그래도 회사 이름인데.”
“흐으음……. 그것도 그런데 또 너무 진지하면 좀 그렇잖아?”
“뭐가 그래? 하여튼 요즘 애들은…….”
“어이, 한결 씨. 요즘 애들 어쩌고 하는데 저랑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시거든요.”
“뭔가 새로운 느낌을 풍기면 좋겠는데. 어쨌든 신생 길드니까.”
대호 형이 한마디 거들자 드디어 사람들은 조금 집중하는 듯했다.
“새롭다라……. 새거, 생생하고 방금 나와서 푸뤠시하고 따끈따끈하고…….”
“흐으음…… 신선 식품?”
“너 진짜.”
환희가 태규의 머리를 쥐어박으려 했지만 태규 쪽이 조금 더 빨랐다. 그러고 보니 태규가 더 연상 아니던가.
“오, 신선 어때, 신선. 왠지 기업 이름 같지 않나?”
“아닌데요.”
대호 형은 신선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든 것인지 계속 웅얼거렸다.
“귀신 신 자를 쓰지 말고 새로울 신을 쓰는 거지.”
“그래 봤자 새로운 신선이지 않나?”
“신선이라니 이상하잖아요~!”
태규와 환희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대호 형은 생각보다 강경했다.
“그런가? 신선은 우리처럼 기묘한 힘을 쓰는 데다가 사람이나 동물이 득도하면 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우리랑 비슷하잖아!”
“듣고 보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은화 선배까지 거들자 환희와 태규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슬슬 사라졌다.
“형은 그게 마음에 드셨군요. 뭐 길드장께서 원하신다면 전 아무 상관 없는데요.”
솔직히 뭐, 이름이 중요한가.
중요하긴 하겠지만, 적당하게만 지어지면 된다. 그 안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난 그 사람들과 함께 멸망을 막아야 하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개발될 신무기에 길드 이름이 박혀 나갈 텐데 신선이면 좀 그런가?
무기가 되게 신선해 보일 것 같은데.
“나는 신선(新仙)에 한 표.”
대호 형은 자기 의견에 굉장히 만족한 것 같았다.
“그럼 나도 대호 씨 의견에 따라 신선에 한 표. 자아, 다들 이름을 내 봐요. 그래야 투표를 하든가 하지.”
환희가 멋들어진 이름 몇 개를 내놓았지만, 의견은 좀처럼 모이지 않았다.
“신선 괜찮네, 신선.”
“뭔가 확 기억에 남기도 하고.”
“안 돼, 안 돼~!”
그렇게 환희의 실망과 함께 새로운 길드의 이름은 신선(新仙)이 된 것 같았다.
* * *
그리하여 새로 출범한 길드 신선의 총 길드원이 처음으로 던전 공략에 함께 나서는 날이 밝았다.
“길드 신선이다! 길드장님!”
“차대호 길드장님!”
“안녕하세요! XBS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좀 봐주십시오!”
“창립부터 S급 각성자가 셋이나 있습니다! 화끈한 시작인데 앞으로의 각오 말씀해 주시죠?!”
“한결 씨! 한결 씨!”
던전의 포털로 들어가는 입구는 기자들로 북적였다.
괴물 특수부대에서 열렬하게 저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길드장인 대호 형을 선두로 인화 선배, 한결이, 나, 태규와 환희, 보라 씨까지. 게다가 환희가 알고 지내는 몇 헌터를 포함해 겨우 파티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아무리 신생 길드라고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적은 수로 시작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
기자들은 무엇이라도 하나 더 따내기 위해서 고성과 몸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적은 수로 길드를 출범하신 이유는 뭡니까?! 띵벤저스, 뭐 그런 겁니까?”
한 기자가 외치자 주위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왜 다른 길드로 편입하지 않으시고 개인 길드를 내신 겁니까? 자신이 있으시기 때문이겠죠? 차대호 길드장님을 스카우트하려던 길드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찍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다른 길드들의 반응은 기자님께서 제일 잘 아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한낱 길드장이고 기자님은 대단하신 기자님이지 않습니까?”
우리 길드에게 쏟아지던 웃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리고 띵벤저스 맞는데요.”
대호 형이 질문을 했던 기자를 노려보았다.
휘청. 기자가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주위에서 그를 부축하느라 소란이 잠깐 이는 사이에 대호 형과 우리는 빠르게 그곳을 지나쳤다.
“형님, 기세는 일반인에게 사용하면…….”
“기세 아니었는데?”
“헉. 정말요?”
염태규가 순식간에 잔뜩 상기된 얼굴로 펄쩍 뛰었다.
“저도 형님처럼 운동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우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걸 보니 태규도 참 어리다 싶다.
이렇게 귀여운데 회귀 전에는 왜 그랬을까. 피식 웃다가 태규와 눈이 마주친다.
“어…….”
“응?”
한데 생각보다 무척 당황한 얼굴이다.
“저, 어, 형 그게…….”
뭐라도 잘못한 사람처럼.
“그래도 형이 제일 멋져요.”
“응?”
“운동 안 하셔도 형이 최고니까요!”
“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당장 눈앞에 포털이 나타났기에 굳이 걸고넘어지지 않고 알겠다며 웃어 보이고 말았다.
“떨리네…….”
“뭘 떨고 그래. 류창희 넌 내 옆에만 붙어 있어.”
“……아까 보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는 오빠라고 부르던데.”
“그게 뭐?”
“…….”
길드가 만들어진 후 합류한 류창희도 오늘 던전 공략에 함께다. 남매가 사이좋은 걸 보니 나도 기분이 좋다.
“길드 신선. 랭크 B 던전 입장하시는 것 맞습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는 괴물 특수부대원이 진지한 어조로 묻는다.
“본 던전은 상위 던전입니다. 던전 내부에서 생기는 모든 일은 국가에서 책임질 수 없으므로 각별하게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늘 듣던 안내. 솔직히 나는 회귀 전까지 쳐서 엄청나게 많이 들었던 말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게 들린다.
‘내가 꾸린 길드…….’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내가 다 모았단 말이지. 물론 운도 나를 도와주었지만 말이다.
행운도 준비가 된 자만이 잡을 수 있는 것.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친다.
‘모든 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잘하자. 잘할 수 있다. 이대로만 쭉……!’
* * *
“그래서 결국 차대호가 길드를 만들었다지?”
“예, 길드장님. 해서 지금 길드 커뮤니티에선 난리가 났습니다. 언론이고 뭐고 다들 난리죠.”
넓은 공간에 책상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사무실이다.
방은 온통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방 안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그 풍경에 마치 배경처럼 녹아들어 있는 건 한세희였다.
흰 머리카락과 피부, 심지어 오늘은 흰 양복을 입은 탓에 일반인이라면 그가 움직이더라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
“거기엔 은하준이 있고.”
의자에 앉아 감고 있던 한세희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