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제73편
벽조목 친구들을 만들어 준다니, 웃기긴 했는데 도덕적으로 좀 문제 있는 발언 아냐?
물론 언제부터 몬스터들 앞에서 도덕을 들이댔냐마는.
‘그렇지만 스노우퀸과 이야기한 후로는 뭐랄까……. 좀 그렇단 말이지.’
조금 찜찜한 마음으로 결이의 뒤를 따른다.
츠츠츠츳.
소울메이트가 연결되고 시선을 고정하는데 결이 등이 한층 넓어진 것 같다.
‘짜식, 회귀 전보다 빠르게 자라는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성장통 있는 거 아냐? 열받네.’
쉬이익, 퍼어어억!!
결이가 검을 휘두르자 엔트들의 나무 팔과 잔가지들이 처참하게 썰린다.
“우어어어!”
“크으으아아아!”
헤르메스의 신발을 이용해 높이 점프해 엔트의 수를 가늠한다.
‘흠, 결이 혼자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래를 살피자 환희 주변으로 접근하는 픽시들이 보인다. 놈들은 고블린보다 하위 몬스터로 아주 작은 체격에 요정 계열이다.
동화책에서 본 것처럼 등 뒤에는 잠자리의 것처럼 보이는 날개가 퍼덕이고 있다.
다만 요정이라고 해서 절대 귀엽거나 얌전한 성격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키르륵.”
“키야악!”
환희에게 덤벼드는 픽시들은 비쩍 말라비틀어진 손과 발로 그녀를 할퀴려 든다. 말끔했던 얼굴 위로 끔찍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떠오르는 걸 보면 정말로 고블린의 소형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으, 으아!”
청각 손실 상태 이상을 얻은 환희는 녀석들이 접근하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휘익!
곧장 낙하하여 새벽의 검을 꺼내 든다.
“키이이!”
“히익?!”
“아기를 건드리면 어떡해.”
쉬이익!
검을 휘두르자 픽시들이 깜짝 놀라며 뒤로 훌쩍 물러난다.
“응?”
픽시가 원래 이렇게 겁이 많았던가? 내 기억으로는 그렇지 않은데 놈들은 의아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어 댔다.
‘전에 결이랑만 왔을 때는 엔트들을 깨우지 않아서 픽시도 만나지 않았지. 이 숲은 그저 지나치는 장소였어.’
그래서 놈들의 이런 반응을 볼 수 없었던 것.
우연하지만 환희 덕분에 이 던전에서도 뭔가 다른 방식으로 공략이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스노우퀸 때와 같이 뭔가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면 기대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쒜에에엑!
“캬아아아!!”
잠깐 움츠러들었던 픽시들이 용기를 내 반격을 시작한다.
쉬익! 츠각!
날카로운 검은 검이 픽시들의 날개를 잘라 낸다.
“응?”
“연구해야지.”
“아! 오오~ 센스 있는데?”
류환희가 마치 ‘이것 봐라?’ 하는 표정으로 찡긋거린다. 참 나, 애초에 연구를 위해 왔다는 걸 잊은 건가.
츠츳!
좀 전에 보았던 거대한 주사기의 형상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대로 날개를 잃어 우왕좌왕하고 있는 픽시들을 향해 내리꽂힌다.
“키이이익!”
“케에엑!”
픽시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지만, 일단 한번 주사기에 걸리기만 하면 경직되어 움직이지 못했다.
쭈욱. 쭈우우욱.
주사기가 픽시들의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하고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놈들 역시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역시 끔찍하구나.”
“어머, 지금 내 기술이 그렇다는 거야? 어이없네.”
환희는 투덜거렸지만, 표정만큼은 신나 죽겠다는 아이 같았다.
휙, 슈욱!
츄아악!
내 공격이 픽시들의 발을 묶고 환희의 스킬이 픽시들의 마력을 흡수한다.
한참 공략이 진행되는 사이에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손발이 척척 맞네.”
파츳, 파츠츳.
주위로 작은 스파크가 튀고 있는 결이의 모습이다. 스킬을 사용해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벼락처럼 떨어진다.
“엔트들은 다 처리한 거야?”
“직접 눈으로 봐.”
한결이 뒤로 새카맣게 탄 나무 거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마치 산불이 난 것 같다.
“그때 스킬에 생긴 화상 추가 대미지가 아주 쏠쏠하더라.”
“오. 그렇지! 그게 엔트한테 특히나 잘 먹혔겠네.”
“응.”
결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환희를 아니꼬운 표정으로 본다.
“하준이는 내 서포터란 말이야.”
“어머. 누가 뭐 어쨌대?”
대충 흘려들을 줄 알았는데 환희는 조금 생각하더니 입을 삐죽거린다.
“자기 서포터라는 게 어딨어. 우린 한 팀인데. 그렇지, 하준 오빠?”
“어?”
“그리고 지금은 던전 조사가 더 중요한 임무잖아. 그래서 나랑 같이 맞춘 건데. 그렇다고 완전히 안 봐준 것도 아니고. 뭔 버프 걸어 줬잖아. 남자가 쪼잔하긴.”
음? 싸울 거냐, 얘들아? 장난인 줄 알았던 분위기가 조금 날이 서 있다.
“조사 대상이 못 움직이게 하는 것쯤은 스스로 할 줄 알아야지. 뭐……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나 대형 몬스터도 아닌데. 랭크가 A 아니던가? 그것도 나보다 훨씬 오래됐으니까.”
“참 나! 넌 S급이잖아!”
“너?”
“어, 어이! 얘들아. 싸우는 거 아니지? 왜들 그래. 내가 좀 더 신경 써 볼게. 결이가 혼자 처치하기에는 엔트 수가 많긴 했지.”
“아닌데?”
“응?”
결이는 무심코 툴툴대며 말했다가 이내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아니…… 그렇진 않은데. 아무래도 네가 바로 뒤에서 서포트해 주는 거랑은 좀 다르니까. 좀 불안하기도 하고.”
“그래, 그래.”
“……결이 오빠는 하준 오빠 앞에서는 늘 징징거리더라?”
“뭐?!”
환희의 말에 수그러들었던 결이가 발칵 언성을 높인다.
“참 나, 하준이 오빠 없을 땐 그렇게 쌩쌩 바람이 불고. 어? 눈앞에 있는 사람 하나 죽여 버릴 것처럼 굴더니.”
“……뭐야? 결이가 언제?”
“응? 말 안 했어? 결이 오빠 며칠 전에 성현준이 불러서…….”
“야, 류환희.”
“아.”
환희가 입을 쏙 다문다.
이 분위기는 뭐지.
“나한테 비밀이야?”
“…….”
결이가 나한테 비밀이 있다?
“…….”
“…….”
“저기, 하준 오빠. 천천히 가! 뭐야 이 분위기?”
비밀이 있을 수도 있지. 나도 비밀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비밀로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였지만.
어쨌든 그래 다 큰 성인이고 어차피 서로에 관해 전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전부 알고 지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 류환희 진짜.”
“아니. 하준 오빠 진짜로 삐졌어? 이게 이럴 일인가?”
“삐지다니. 뭔 소리야. 안 삐졌어.”
“그럼 천천히 좀 가! 삐졌잖아!”
어차피 한결이는 나보다 빨라서 따라잡을 수 있는데 뭐가 문제람. 물론 환희는 A급치고 민첩이 느리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삐지다니 진짜 아니다. 조금 놀랐을 뿐이지.
이게 뭐 삐질 일인가.
“하준아,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네가 걱정할까 봐 그랬어.”
“응.”
“그리고 그 사람이랑은 개인적으로 내가 갚아 주고 싶은 게 있기도 했고.”
“그렇구나.”
“그냥 너랑 더는 엮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아하.”
“……성현준이 하는 제안 거절하고 온 것뿐이야.”
성현준의 제안.
늘 내게 연락하던 사람이었는데 왜 이번에는 하준이한테 먼저 접근한 걸까?
그래. 한결이는 S급에 미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각성자니까. 군에서 안달복달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지만.
이렇게 치사하게 뒤로 작업하다니.
그래, 어쩌면 길드나 언론사에서 떠들어 대게 둔 것도 군으로 포섭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성현준이 뭐라고 했는데?”
“별건 아니고…….”
* * *
별거 아니긴.
군에서는 결이를 데려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반협박도 포함해서.
힘이 있는 길드에 들어간다면 단번에 해결될 일이지만, 지금 존재하는 길드엔 들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문제는 성현준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금룡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말이지?”
“응.”
“금룡의 힘줄을 산 지가 한참 됐는데 그 직후부터 들렸다고 하면…….”
“……응.”
“결아.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숨기는 게 있다거나 비밀이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잘못해서 네가 어떻게 되기라도 하면 난 정말…….”
끝장이지.
인류 멸망을 막는 일도 물 건너간다. 이번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다시는 기회가 없을 거다.
이렇게 한번 회귀한 것만도 얼마나 큰 행운인가.
전 우주적으로 아주 특별한 일일 거다. 아마 전 우주적으로 특별하다는 말도 내가 겪은 일에 비하면 모자란 말이겠지.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거니까.
내가 뭐 소설 속 주인공도 아니고.
“그래서 금룡이 해를 끼친 적은 아직 없다. 이게 맞지?”
“응.”
대답하는 결이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다.
“혹시 지금 말을 걸고 있는 거야?”
“……응. 실망이라는데. 자기는 도움을 주고 있다고 계속 어필하고 있어. 엄청나게 시끄럽게.”
“으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윽.”
금룡이 소리라도 지르나 보다.
‘흐음, 그나저나 회귀 전에는 이런 적이 없어서 약간 당황스럽긴 한데.’
결이의 말로는 일단 금룡은 귀찮게 굴지만, 아직 해를 끼친 적도 없고 오히려 검술이나 싸우는 방법 등을 조언해 준다고 한다.
‘앞으로도 계속 도움을 줄 존재냐 하면…….’
살면서 겪은 여러 매체를 생각해 본다. 소설이라든가 영화라든가.
자신에게만 들리는 인격이 붙어서 잘된 경우를 떠올려도 그다지 긍정적이었던 상황은 없었던 거 같은데.
‘막 육체를 빼앗긴다든가 세뇌당한다든가.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영혼을 감별하는 스킬이 있으니 눈치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결이가 털어놔 줘서 고마운걸.
“뭔가 이상하면 항상 말해.”
“응, 알겠어. 하지만 내가 제어할 수 있어.”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금룡이 자기를 의심하는 짓은 그만두라는데. 널 좋게 봤는데 실망이래.”
결이는 곤란하다는 듯 웅얼거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결이의 뇌에 갖다 대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모양이다.
“너. 우리 결이 너무 괴롭히지 마.”
“……!”
놀란 까만 눈이 나를 본다.
“반말하지 말래…….”
“참 나, 알겠으니까 결이 괴롭히지 마세요. 아주 큰 일을 할 사람이란 말입니다. 알겠어요? 같이 잘 키워서 세계 일짱으로 만들자고요.”
이번에는 금룡이 뭐라고 대답했을까?
결이의 얼굴이 점점 새빨개진다.
“아유, 인제 그만 가자~!”
저 멀리 떨어져 바위 뒤에 기대 있던 환희가 재촉한다.
“무슨 남자들이 말이 그렇게 많아? 정말 웃겨. 뭐 대단히 큰일이라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둘 다 지금 애착 형성이 잘못되어 있다고. 알아? 안정 애착 불안정 애착.”
“류환희 헛소리 그만하고. 우리 끝났으니까. 가자고.”
그렇게 말하더니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결이.
이제 다 해결된 거냐고 묻는 거 같아서 씩 웃어 주자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벌떡 일어나 앞으로 척척 걸어간다.
“아이 참! 같이 가자니까!! 진짜 이 오빠들 싫어!”
* * *
“휘리요요요요!”
“피히오 피히오!!”
새 울음소리 같은 엘프들의 목소리. 하지만 날이 잔뜩 서 있다.
“표본 수집 감사합니다! 호호호!”
거의 반쯤은 광기에 차 스킬을 연발하는 류환희 때문만은…… 아마 아닐 거다.
“최고야! 이렇게 연구 재료가 넘치는 건 오랜만이거든!”
환희가 다시 성현준 대위나 자기 오빠인 류창희 욕을 하기 전에 나는 재빠르게 새벽의 검을 휘두르며 숲 엘프 사이를 누볐다.
쉬익, 휙!
까만색으로 그어지는 검의 궤도가 결국에는 붉은 엘프의 피가 바닥에 쏟아지게 만든다.
‘엘프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없으니 원.’
스노우퀸과 대화가 가능했던 건 놈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희에게도 통역 스킬 같은 건 없다고 하고.’
이미 던전 내부의 시간도 훌쩍 지나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다.
“대충 이번 턴은 정리가 됐나.”
“그래, 결이랑 환희 둘 다 좀 쉬어. 슬슬 마나가 바닥났을 것 같은데.”
“마나가 바닥나는 줄도 몰랐어!”
던전에서의 밤을 지새울 야영지를 만들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