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제72편
“응?”
화기애애한 이사 겸 집들이가 끝나고 다음 정식 집들이를 약속한 뒤 그날은 자리를 파했다.
원래 잠자리가 달라지면 잠을 설칠 수도 있는데 그날은 나도 한결이도 무척 푹 자고 일어났다.
침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심지어 이사 날 옮길 짐도 없어서 그냥 떠들고 논 게 다였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살았던 것처럼 푹 잤다.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계속 싱숭생숭했다.
분명 도장도 찍고 이사도 했고 신고도 하고 할 걸 다 했는데 심지어 우리 집인데. 정당하게 돈을 주고 샀는데.
이걸 사려고 미발견 던전을 얼마나 뺑뺑 돌았는데.
계속 다시 이 집을 떠나야 할 것 같고, 누군가 이제 체험 시간이 다 됐으니 나가라고 할 것 같고. 원래 살던 그 좁고 어두운 지하 투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계속 그랬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참 묘하다.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인데도 잠깐 예전 집에서 살았다고 금방 거기에 적응해 버리다니.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스노우퀸?”
일주일 하고도 하루 더 지나 방문한 던전은 뭔가 달라져 있었다.
「침입자를 처단합니다.」
위이잉.
살벌하게 움직이는 기계 몬스터들. 레이저도 에너지탄도 저번보다 훨씬 매섭게 몰아친다.
“스노우퀸! 다시 대화를 하러…….”
투타다다! 피융! 피융!
공격이 쏟아진다. 재빠르게 피해 내며 인상을 찌푸리지만,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째서 이번에는 대화를 들어 주지 않는 거지? 장난감이 없기 때문은 아닐 거 아냐.’
사실 이상한 건 이것뿐이 아니었다.
보스 룸으로 입장할 때 키패드의 비밀번호.
토냐의 생일이었던 것이 이번에는 들어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 사용했던 방법대로 키패드와 문의 일부를 박살 내고 진입하게 됐다.
‘너는 다시는 날 만날 수 없을 거다. 그때 스노우퀸이 그렇게 말했지. 그렇다는 건…… 지금 이 보스 룸에 있는 게 스노우퀸이 아니라는 걸까?’
하지만 던전의 다른 부분은 이전과 같았다. 달라진 부분이라고는 보스 룸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비밀리에 시도하라. 이미 시스템이 눈치를…….’
스노우퀸은 시스템에 의해 제거당한 것일까?
“하준 오빠. 뭔가 이상한데? 어떻게 된 거야?! 보스 몬스터랑 이야기시켜 준다면서!”
“그게…….”
“하준이는 거짓말 안 해.”
결이가 나를 보며 말한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랑 대화하는 걸 나도 봤으니까.”
“그럼 지금 이건 뭔데!”
“비비빕. 비빕. 빕!”
데스 휠이 우리를 향해 긴 다리를 뻗어 온다.
쉭, 스각!
결이의 벽조목 검으로 한차례. 내 새벽의 검으로 한차례.
데스 휠이 베어진다.
“일단 할 수 있는 모든 연구는 해 보라고.”
“흥.”
류환희가 스킬을 발동하자 보랏빛의 레이저가 공간을 샅샅이 훑기 시작한다.
그리고 전투를 계속할수록 더욱 확신이 든다.
이곳에는 내가 대화했던 스노우퀸이 없다.
* * *
“나 정말 실망했어, 오빠들. 진짜 뭐야 그 이상한 힐러는. 던전 공략 내내 나한테 집적대는 거 봤어? 미친놈 아냐? 왜 그런 걸 달고 다녀. 차라리 우리 오빠를 데려가지.”
류환희는 뾰로통한 얼굴로 우리를 쏘아보았다.
집이 넓으니까 분위기가 더 싸늘해지는 느낌이다.
“민철 씨 일은 정말 미안하다. 생각을 못 했어. 스노우퀸에 정신이 팔려서. 다음부턴 민철 씨 있을 때 널 부르지 않아야겠다.”
“참 나! 그럼 내가 연구를 어떻게 해? 앞으로는 오빠들 매번 따라가야겠다고. 어떻게 딱 내가 가니까 던전이 이상해진 건데.”
류환희 때문에 던전이 이상해진 건 아니라고 본다.
그 일주일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
불길한 생각만 머릿속으로 떠오른다. 왜냐하면 스노우퀸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을지언정 모르는 척을 하거나 숨어 버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역시 짚이는 건 하나뿐이다.
시스템.
“우리가 하루 늦게 와서 뭔가 꼬인 걸까?”
“글쎄. 그 하루 때문에 뭔가가 바뀐 건 아니라고 생각해. 시스템이 스노우퀸을 차단했다거나? 없애 버렸다거나?”
“그렇게 말하면 정말 오싹하긴 하는데.”
영 찜찜하지만, 방법이 없다. 정말로 매번 류환희가 함께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식으로 시스템이 훼방을 놓는다면 그마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방법이 없네. 대체 어떻게 비밀리에 하라는 거야.”
“그러게…….”
셋이 머리를 싸매지만 그럴듯한 해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스노우퀸이 그렇게 됐는데도 내게는 시스템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아.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 정도는 괜찮다는 건가. 이 정도 선에서 계속 비밀을 파헤치되, 스노우퀸과 접촉한 것처럼의 일만 없다면.’
어쩐지 시스템이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름길로는 가지 말라는 걸까.’
지금 당장 나올 답이 없으니 묵묵히 전진할 수밖에 없다. 대신 의지를 다진다. 반드시 던전의 비밀을 모두 알아내겠다고. 그래서 인류의 종말을 더욱 확실하게 막아 내겠다고.
“불닭이나 시켜 먹자.”
류환희가 능숙하게 배달 앱을 켠다.
‘일단은 미발견 던전에 류환희도 데려가야겠어.’
한 톨의 정보도 이제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
* * *
“지금까지 이런 걸 숨기고 있었단 말이지?”
이번에도 환희의 눈빛은 날카롭다.
바닷가의 바위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좁은 통로를 통해 도착한 이곳에는 미발견 던전의 포털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애초에 류환희를 미발견 던전에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의 단서가 될 수도 있고 어차피 류환희가 신무기를 개발해 내는 것은 정해진 미래이기에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데려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스노우퀸을 만난 후 모든 건 달라졌다.
던전이 가진 비밀. 이번 생에서는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진짜 너한테만 알려 준 거야. 결이 말고는 그 누구도 데려온 적 없어. 그만큼……. 이게 불법이라는 건 알지?”
“당연하지. 게다가 미성년자인 나를 데려왔으니 잡히면 그야말로 하준 오빠는 각성자 교도소 신세야.”
“……그런 걸로 날 협박할 거면 그냥 돌아가자.”
“아이 참,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어? 어차피 정부도 다 어기는 이상한 법. 아니지. 사실 완전히 불법은 아니잖아. 특수 상황에는 미성년자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투입할 수 있다! 이걸 들먹여서 군에서도 나를 쓰려고 했던 거고.”
“그렇긴 한데…….”
“이번이 특수 상황이지 뭐가 특수 상황이겠어? 어디에다가 일러바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후, 게다가 이런 거라면 성현준 시야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너무 좋은데?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데려왔어야지.”
“그럴 수 있었겠냐. 포털을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건 특별 상황이라고 해도 허락되지 않는데.”
“그야 그렇지만. 어쨌든! 좋아. 미발견 던전이라……. 그럼 그 누구도 들어가 보지 않은 따끈따끈한 던전을 내가 제일 처음 연구하는 거잖아?! 정말 대박이다!”
포털의 불빛에 비친 환희의 눈을 초롱거리는 걸 떠나서 번들거린다.
연구 이야기를 할 때 환희는…… 조금 무섭다.
“자, 일단 들어가자고.”
“좋아! 간다!”
해맑게 포털을 통과하는 환희에게 결이가 바짝 붙더니 귀에다 속삭였다.
“사실 나랑 하준이가 이미 한 번 와 본 데야.”
환희가 매섭게 돌아보며 악다구니를 쏟으려는 찰나에 그녀는 완전히 포털 안으로 쑥 들어갔다.
키득거리며 포털로 따라 들어가는 결이를 보면서 애들은 참 애들이구나 싶다.
츠츠츳.
시야가 금방 뒤바뀌고 던전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숲, 그리고 바위산.
엄청나게 울창한 곳이다. 한눈에도 한국은 아닌 것 같은 풍경.
“엘프라도 나올 것 같다.”
환희가 중얼거린다.
“역시 천재라 그런가, 눈치가 빠르네.”
“응? 진짜로 엘프가 나와? 아, 맞아. 둘은 이미 와 본 곳이라고 했지? 후후후…….”
“어, 으응…….”
눈치를 보며 슬쩍 앞으로 나선다. 이곳은 한결이와 나 둘만으로도 공략할 수 있는 적당한 등급의 던전이다.
다만 길이 너무 험해서 이동하는 데 체력을 모두 소진할 정도로 산세가 험하다. 그러니 엘프가 사는 곳이 되었겠지.
엘프들은 인간이나 산업화에서 완전히 떨어져 인적이 닿기 힘든 이런 곳에서 자연과 어울려 진화한 요정 종족이니까.
“이곳 나무들에는 마력이 담겨 있네.”
환희는 벌써부터 연구와 기록을 시작했다.
“나노 시린지!”
그녀의 손 위에 사람 팔뚝만 한 주사기가 소환된다.
푸욱.
나무에 꽂힌 주사기가 동작하며 내부가 푸른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쭈우우욱. 쭈욱.
나무의 외형이 쭈글거리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거 괜찮은 거야?”
“응, 죽지 않을 정도로만 채취하니까. 걱정하지 마. 꼭 필요한 거니까. 이렇게 표본들을 수집해서 마나를 관찰하고 분류해서 비교하는 거야. 아주 기본적인 단계지.”
그러면서 환희는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이 마력들을 수집해서 어떻게 연구가 진행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인지.
‘사람이나 생명체가 당하는 모습은 좀 더 끔찍할 것 같은데…….’
파스스스.
나무가 떨리며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버린다.
“주, 죽은 거 아냐?”
“아냐. 죽기 직전이니까. 살려고 잎사귀를 떨어트린 거야. 이 녀석이 마력을 많이 품고 있기에 이런 모습이 된 거니까…….”
파스락.
환희의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인기척이 들린다.
“이거…… 환희 네가 숲 친구들을 화나게 한 모양인데?”
“뭐어?!”
파스슷. 파스락, 파스락!!
주변의 나무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껍질들이 갈라지면서 기괴한 모양의 눈과 입이 만들어진다. 마치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우득, 우드드득. 뿌드드득.
뿌리가 흙 위로 솟아오른다. 가지들이 기지개를 켜듯 으적거리고 놈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
“그린 엔트다.”
“그거라면…… 나무 거인?”
“전에 결이랑 왔을 땐 이놈들이 깨어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뭐, 뭐어?! 그, 그럼 내가 이랬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씩 웃어 보이자 환희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그어어어어!”
“으어어어어!!”
마침내 모두 깨어난 엔트들이 마치 숲을 쓸어버릴 듯이 고함을 지른다.
“으아아! 귀가 떨어질 것……. 으아?!”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환희의 표정을 보니, 상태 이상에 빠진 게 틀림없다.
엔트의 외침은 일시적인 청력 손상 상태 이상을 불러올 만큼 강력하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말렸어야지!”
“네 연구가 그렇게 과격할 줄은 몰랐지.”
내 대답에도 환희는 못 알아듣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보인다.
“뭐, 어쩔 수 없지. 시작부터 숲 친구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걸. 엘프들과는 대화하지 못할 수도 있겠어.”
“어쩔 수 없지. 내 손잡이 친구를 만들어 주는 수밖에.”
한결이가 검을 뽑아 든다.
츠츠츳. 영롱한 번개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