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제57편
인벤토리 창을 살폈다.
‘좋아, 있다! 단번에 얻다니 운이 좋은걸.’
‘매드 크리피 아이볼’의 외안근.
이게 필요했다.
‘이제 슬슬 한결이가 레벨 10을 달성했을 때를 대비해야지.’
한달음에 결이 곁으로 뛰어간다.
“결아! 너 레벨 지금 몇이냐.”
“어, 나 지금 9.”
“음, 좋아! 잘하고 있어.”
이제 막 헌터 자격증을 땄는데 레벨이 9다? 이건 완전 미친 속도라고 볼 수 있었다.
회귀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
“괜찮냐? 분명 고통스러운 환각에 시달렸을 텐데.”
“고통……. 글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시절의 기억이었어.”
“응? 뭐야! 너 나를 만난 게 악몽이었던 거냐?!”
“그럴 리가 있겠어!”
결이는 약간 발끈해서 목소리를 키웠다. 이때쯤의 이야기는 그리 밝은 게 아니니 끌려 나온 건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금룡의 힘줄 덕분일지도.”
“아.”
“이게 정신력을 고양시켜 주잖아. 그래서 고통스러운 악몽 대신 그럭저럭 버틸 만한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거 아닐까? 한결이 너는 무서워하는 것도 없으니까.”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되네.”
결이는 납득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에 뒤쪽에서 곡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 으아악……. 으으으……. 죽겠어요…….”
김민철이다.
그는 매드 크리피 아이볼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놈의 정신 공격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이는 아주 바람직해. 금룡의 힘줄 아이템 효과가 확실히 있어.’
김민철은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힐러는 스스로 힐을 못 하나?”
염태규가 껄렁하게 말하자 김민철은 오만상을 다 찌푸리며 노려보고는 쏘아붙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가능하죠. 하지만 생각해 보라고요. 당신네 딜러들도 크게 다치면 컨디션이 좋을 때 넣을 수 있는 대미지 그대로 못 내잖아요?”
“흐응.”
“멍청하긴.”
그는 짓씹듯이 중얼거리고는 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김민철이 완전히 회복한 후 우리는 던전 공략을 다시 시작했다.
예상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원하던 아이템을 얻었으니, 힘이 모자라면 정말로 그냥 후퇴할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보스 룸 앞에 서 있었다.
김민철의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정말이지……. 나만 자꾸 매드 아이볼한테 걸린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요. 아이템으로 정신력 스텟을 좀 보강하시는 게 좋겠어요.”
“뭐……! 그렇게 전문적으로 접근하겠다고요?”
그럼 어떻게 접근하라는 건가. 조언하고도 욕을 먹는 상황이 황당했지만, 슬슬 던전 공략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단 말이지.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보스 룸의 문을 열었다.
고오오…….
고딕풍 저택의 가장 상층부에 있던 방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와 건조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정중앙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관. 커다란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끼이익.
소름이 끼치는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관이 열리고 안에서 굳지 않은 타르 덩어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흡혈 슬라임. 앞서 설명한 대로 움직여 주세요!”
나의 외침에 인화 선배가 모두의 몸에 보호막을 씌워 준다.
“절대로 신체가 닿아서는 안 됩니다!”
철퍽! 주르륵……. 철퍽!!
검은 타르 덩어리 같은 슬라임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어!”
김민철이 놀라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의 머리 위 천장에서 주욱 늘어진 흡혈 슬라임이 보인다.
“방심하지 마요!”
“으아아!”
그가 열심히 피해 보려 하지만, 마치 곱게 간 호박죽처럼 흘러내린 슬라임은 그대로 보호막에 들러붙어 버렸다. 그리고 보호막 전체를 삼켜 버린다.
“이런! 대미지가 거의 없이 부드럽게 달라붙는 바람에 보호막이 터지는 형식으로 발동이 안 됐어.”
“저대로 뒀다간 보호막을 흡수하고 김민철 씨마저 흡수해 버리겠죠.”
슬라임은 게임이나 각종 매체에서 하급 몬스터, 약한 몬스터로 취급당하기 일쑤인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놈들은 몸에 닿는 건 뭐든지 녹여 흡수해 버린다. 물론 이 녀석은 흡혈 슬라임이기 때문에 피를 비롯한 체액만 빨아 먹고 껍데기는 버리지만, 보통의 슬라임들은 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녹여 먹어 버린다.
김민철이 당했던 것처럼 소리 소문 없이 천장에 붙어 있다가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흡수는 둘째 치고 저 점액질의 젤리 같은 몸으로 산소를 차단해 질식사시킬 수 있는 거다. 게다가 한번 들러붙으면 떼어 내기가 쉽지 않다.
슬라임의 몸은 정말로 액체와 비슷한 데다 점액질 부분은 베어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는다. 들러붙은 점액질을 떼어 내려 잡아당겨 보아도 그저 일부분만 뜯겨 나갈 뿐인 거다.
“놈을 처리할 방법은 오직 핵을 노리는 것. 정말 작아서 거의 보이지 않으니까 찾기 어렵지만 제게 방법이 있어요.”
n번째 시야를 이용하는 거다.
아까 사용했던 에스퍼 시야. 놀랍게도 에스퍼 시야로 볼 때 슬라임의 핵 부분의 주변으로만 ‘색’이 보인다.
‘그래. 잘 보이네. 보라색.’
휘이익!
새벽의 검이 김민철을 삼켜 버린 슬라임의 핵을 베어 낸다.
뿌각. 촤르르륵.
핵이 박살 나자 점액질 부분이 완전히 녹아내려 바닥으로 쏟아져 버린다.
“하나 처치했고.”
이 던전의 보스 몹은 한 마리가 아니다.
슬라임은 군체를 이루는 경우가 허다하고 흡혈 슬라임 역시 예외는 아니다.
“흐아악! 죽는 줄 알았어요!”
“안 죽었잖습니까! 다시 당하지 말아요.”
징징거리는 김민철에게 쏘아 주는 사이.
스멀스멀스멀…….
한 놈이 당하자 벽과 천장 곳곳에서 검은 점액질들이 일렁이기 시작한다.
“뇌격.”
츠츠츳!!
파지지직!!
결이가 검을 사용하는 대신 사방으로 전격을 뿜어낸다. 그러자 전기 공격에 당한 흡혈 슬라임들이 성게처럼 뾰족뾰족하게 부들거린다.
‘이게 바로 일렉트릭 쇼크다!’
강력한 점액질이 S급의 전격에도 핵을 보호한다. 그냥 보스 몹으로 나오는 게 아니란 말이지. 녀석들의 점액질은 대부분의 공격을 흘려 보내고 버틸 수 있도록 강력하다.
하지만 그것도 핵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이 안 될 때나 강력하지.
타앗! 휘익. 슥, 스걱, 서겅. 촤아악!!
‘나처럼 핵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면 어쩔 도리가 없지.’
그중에서도 제일 내성이 약한 ‘베기’ 공격을 하는 나에게는 더욱 손쉽게 당하는 거다.
결이를 따라 인화 선배나 염태규 역시 슬라임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핵을 갈라낼 때까지의 시간을 벌기 위한 것.
“으아아!”
지금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는 김민철은 내가 슬라임을 다 베어 낼 때까지 흡수만 안 당하면 된다. 그 정도는 좀 해 줘라.
* * *
보스 몬스터인 흡혈 슬라임까지 사냥이 끝난 뒤, 신비롭고 영롱한 탈출 게이트 앞에서 김민철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서인화는 무척 뿌듯한 얼굴로 기쁜 듯이 말했다.
“어떻게 이 던전의 공략을 죄다 알고 있는 거야? 정말 너무 대단해! 하준이가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끼리 이 던전을 공략하지 못했을 거야.”
“아, 조금 알고 지내는 정보통이 있어요.”
김민철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서인화의 칭찬을 들었어야 하는 건 바로 자신인데, 던전 공략 내내 짐이 될 것 같았던 D급이 독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하, 솔직히 말해서 저 D급의 활약이 대단하기는 했어. 저 녀석 자체가 아주 강한 것은 아니지만, D급 중에서는 꽤 실력이 있는 것 같고. 무엇보다 던전에 관해서 너무 잘 알아.’
3년이나 헌터 일을 해 왔던 자신보다 던전이나 몬스터에 훨씬 능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던전 내부에서 길을 잃는 일도 없었고 몬스터들의 약점을 하나같이 꿰고 있었다.
보스급 슬라임을 사냥하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공략한 적이 있었던가?
‘센터에서 그런 것도 다 가르치나. 요즘은 정보가 업데이트되어서 초보들도 알 건 다 아는 건가?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너무 저 녀석만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은하준을 제외하고서는 일반적인 편이었다. 일반적이라 함은 딱 헌터 자격증을 얻은 풋풋한 초보 헌터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냥 초보 헌터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등급이 높았다. S급, A급. 랭크만으로도 최상위 헌터들이다. 그러니 강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놈들이 모인 거야?’
김민철의 시선이 한결에게 가 닿는다.
‘특히나 저놈은 초보 같지도 않고. 역시 S급이라 이건가?’
S급과 친해지겠다는 김민철의 야심한 계획은 거의 수포가 되었지만, 눈앞에서 S급의 전투를 볼 수 있다니.
게다가 그는 얼마나 성장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형. 진짜 대단하세요.”
염태규 역시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단 다섯 명으로 C급 던전을 공략하다니.”
“뭐, 그런데 여기는 C급 중에서도 소수 인원으로 공략 가능한 타입이어서.”
“에이, 그래도요!”
은하준의 말에 김민철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소수 인원으로 공략 가능한 타입이라고? 그냥 너네가 캐리한 거 아니냐고.’
지금까지의 전투를 뒤돌아보면 조금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어지간한 등급의 던전에서는 항상 힐러는 왕 대접을 받았었는데.
“게다가 김민철 님이 계셨으니까 공략할 수 있었지.”
“응? 네? 저요?”
“네, 민철 님.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파티원들 모두가 이렇게 무사히 귀환할 수 있는 건 민철 님 덕분입니다.”
“어, 어어……. 감사합니다.”
소극적으로 변했던 김민철의 마음이 사르르 풀어졌다.
‘뭐야, 괜찮은 녀석이네. ……알고 지내기 괜찮겠는데?’
김민철은 한층 밝아진 얼굴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S급과 A급들, 게다가 등급은 조금 낮아도 실력 좋고 싹싹한 D급. 그들과는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오늘 공략도 일찍 끝났는데 같이 식사나 하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당신이 한결이지? 나랑 이야기 좀 할까.”
모델처럼 큰 키에 쭉쭉 뻗은 팔다리. 도드라진 광대 옆으로 흘러내린 칠흑 같은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왔다.
흰 정장 차림의 여성이 분홍색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 사이에 끼우며 팔짱을 꼈다.
여성은 방치된 공사 현장처럼 보이는 이곳에선 절대로 마주칠 것 같지 않은 외모였다. 오히려 이곳이 콘셉트가 정해진 잡지 표지 촬영장이라면 어울리겠지만.
“다, 당신은…….”
김민철의 떨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굴려 위를 바라보았다가 옆을 흘겨보며 그를 향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허억!”
그 순간 공간을 압도하는 기세에 한결을 포함한 모두가 가슴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김민철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처럼 보였다.
그러다 일순간 기세가 사라지자 김민철은 기어코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하네. 내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
“콜록, 콜록.”
“그러게. 남의 대화에 끼어드는 건 별로 좋지 않아.”
그녀는 거만한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고는 한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볼일이 있는 건 바로 너야. 계속 서 있게 할 건가?”
“당신이 누군데.”
“어머. 들은 대로 성깔이 있네? 보고도 모르겠어? 해령 길드의 손예원이잖아.”
자신을 손예원이라고 밝힌 여자가 분홍색 잇몸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