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제54편
‘어쩐지 뜬금없이 C급 던전 공략에 S급이 하나, A급이 둘이나 되는 녀석들이 파티를 구하더라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민철 역시 거저먹으려고 온 것이었다.
물론 S급이나 A급들의 레벨이 낮긴 하지만, 그것 정도야 헌터 몇 명 더 채워 넣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명단에 있던 D급 헌터가 병풍처럼 서 있어도 경험치를 배분받도록 버스 태워 주려는 파티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예상대로 들어맞았다고 김민철은 생각했다.
게다가 S급과 친분을 쌓을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그 S급이 맨 처음에 눈길을 끌던 아이돌같이 생긴 녀석인 데다 어쩐지 성격이 냉해서 과연 친해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지만.
‘에이 씨, 그래도 D급이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S급이나 A급이 나서서 쩔해 주려는 걸 보고 분명 아주 귀여운 여자애일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 파티원이 적네요. 하하.”
김민철은 큰 실망감을 감추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게…… 민철 님이 힐러셔서요. 힐러가 없으면 헌터 몇 더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귀하신 힐러분이 지원해 주셔서 이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아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좀 버겁지 않을까요.”
되게 빡빡하게 팀 구성을 했다 싶었다.
힐러로서 귀한 대접을 받는 건 당연히 좋았지만, 귀여운 여자애한테 받는 대접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원이 적긴 한데, 그러면 얻는 경험치랑 아이템이 늘어나니까요. 혹시 중간에라도 안 되겠으면 포기하고 나올 생각인데 괜찮으실까요?”
“예, 예에.”
모든 희망이 사그라진 김민철이었지만, 언제나 운이 좋은 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오늘은 대충 시간이나 때우다가 집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 * *
“저, 형. 오늘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아, 나야 나와 줘서 고맙지. 너라도 와 줘서 다행이다.”
염태규는 쑥스러운 것인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사실 염태규 무리를 죄다 소환하려고 했는데, 염진혁이 가기 싫다고 X랄을 했단다. 그래서 다른 녀석들도 눈치 보여서 못 나왔다.
‘뭐, 힐러가 구해졌으니까 염태규 혼자만으로도 괜찮겠지만.’
사실 어지간한 힐러들은 길드에서 가만히 두지 않는다. 아무리 하급 랭크일지라도 힐러라면 우선 영입하고 보는 거다. 그래서 힐러는 일회성으로 파티를 꾸릴 때 만나기 힘든 타입이었다.
류창희의 경우도 강경하게 헌터 일을 거부했지만, 성 대위 측에서 일을 돕도록 하지 않았는가.
김민철이 특별한 케이스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왜 혼자 활동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쓸 만하면 꼬드겨서 계속 같이 작업하는 것도 좋겠는데.’
물론 힐러들의 몸값이 워낙 높기에 비위를 맞춰 주기 어렵겠지만 말이다.
“오늘 전리품은 마지막에 정리해서 민철 님에게 35% 분배하고 나머지는 저희 네 명이서 나눠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40% 해 주시죠.”
김민철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 외에는 다들 놀란 것 같았지만, 별로 놀랍지도 않다.
‘흠, 그래. 어쩔 수 없지. 특히나 이 시기에는 힐러가 너무너무 귀해서 부르는 게 값이니까. 힐러 의견에 맞춰서 움직이는 경우도 많고. 어쩌면 이런 걸 노리고 혼자 활동하는 걸까.’
그래도 양반이다 싶었다. 경력도 3년 차니 60% 정도를 원하면 어쩌나 했다.
내가 직접 겪어 보진 않았지만, 이 시기에 힐러 대접이 진짜 미쳤다고 들었었다.
이제 안에서만 잘해 준다면 좋겠군.
“자, 그럼 바로 던전으로 가 볼까요?”
* * *
“헌터 자격증 보여 주고 들어오니까 감회가 색다른데.”
후우욱.
인화 선배의 목소리와 함께 포털을 넘어오자 어두운 보랏빛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오…….”
“좀 오싹한데?”
염태규는 어쩐지 좀 신이 난 것 같았고 인화 선배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민하게 주위를 살폈다.
주위로는 검게 말라비틀어진 나무들과 뿌연 안개, 그리고 듬성듬성 솟아 있는 묘비가 보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던전은 에스퍼 계열 몬스터가 나와요. 다들 바짝 긴장해야 합니다. 놈들은 기척 없이 다가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게다가 정신 공격을 사용하는 놈들도 있으니까 더욱 조심…….”
김민철은 설명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을? 뭔가 궁금하신 게 있으신가요? 민철 님.”
“아뇨. 헌터 자격증 나온 지 얼마 안 되셨다더니 되게 잘 아시는 것 같아서요.”
“아하. 뭐, 조금 전까지 한참 공부하다가 나왔으니까 잘 아는 거 아닐까요. 하하. 고 3들이 수능 문제에 제일 빠삭한 것처럼요.”
“아아……. 그러실 수도 있겠구나. 흐음. 일단 진입하기 전에 버프 하나씩 걸어 드릴게요.”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모두의 손등 위에 빛의 고리가 생겨났다.
“첫 타격 때 맞은 대미지의 절반을 회복시켜 주는 버프예요.”
“와, 엄청 좋은 스킬이네요.”
인화 선배의 말에 김민철의 표정은 단번에 밝아졌다.
“아유, 뭘요. 인화 씨. 필요하면 바로바로 더 요청해 주세요. 물론 제가 알아서 다 힐 넣어 드리고 있을 거지만. 하하하!”
“어머. 힐러가 있으니까 정말 의지가 되네요. 힐러랑 함께 던전에 들어온 건 처음이거든요. 제가 들었던 헌터 자격증 과정 4기 반에는 완전히 힐러 타입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정말요? 참……. 힐러들이 귀하긴 하죠. 하하하!”
그의 웃음이 안개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무왕~!”
“망량아 뭔가 여기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오늘도 길 안내 부탁한다.”
“무옹! 무오!”
망량이가 어른거리는 푸른 빛을 내며 묘지 사이를 앞서 나갔다.
저 녀석 탓에 이곳이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망량이 모습과 똑같은 몬스터가 나오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물론 나는 이곳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다 알고 있지만.
“그으으……. 그어어.”
주변에서 무엇인가가 앓는 소리가 멀찍이 들려왔다.
“모두 전투태세.”
푸우욱. 푸훅!
흙 밑에서 손과 머리가 튀어나온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섬뜩한 안광을 발하며 썩은 듯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후드득, 후드드득…….
흙이 떨어지는 소리로 보아 놈들은 한두 마리가 아니다. 시작부터 열렬하게 맞아 주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구울이다!”
염태규가 몬스터를 알아보고 외쳤다. 대충대충 수업을 듣는 것 같더니 그래도 아주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군.
구울은 식시귀라고도 불릴 정도로 시체를 좋아하는 몬스터다. 무덤가에서 주로 출몰하며 새로운 시체를 만들기 좋아한다.
좀비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려나.
스릉. 한결이가 검을 뽑아 드는 사이에 염태규가 전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가 한번 쓸고 시작하시죠.”
“잠깐……!”
“맹염풍(猛炎風)!”
염태규의 손끝에서 거친 불길이 인다.
회귀 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작고 얌전한 불꽃이지만, 그 위력은 눈앞에 있는 것을 순식간에 태워 버릴 무시무시한 불바람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이 장소에서 저 기술을 사용했다는 거다.
화르르륵! 화륵…… 퍼어엉!!
엄청난 폭음을 내며 전방에 폭발이 일어났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곳은 구울이 자체적으로 생성해 내는 가스로 가득하다. 게다가 구울이 사냥해 잡아먹은 시체가 썩어 만들어진 가스도 뒤섞여 작은 불꽃만 일어도 이렇게 터져 버리는 거다.
“큭!”
“비켜.”
쉐에에에액!
결이가 뇌검으로 우리 쪽으로 몰아치는 폭발을 베어 낸다.
파촤촤촤촤!!
폭발이 베어진다.
염태규가 만들어 낸 불꽃이 가스와 합쳐져 일으킨 폭발보다 결이가 단 하나의 동작으로 만들어 낸 검기가 더 강력한 것이다.
“허, 허어억.”
“태규야. 구울 근처에는 항상 가스가 많다는 걸 잊어버렸구나.”
“……! 그, 그런…….”
불길 때문인지, 내 설명 때문인지 염태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괜찮아, 괜찮아. 원래 초보 땐 다 실수하는 거야.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앞을 봐.”
“……!”
“그으으……. 으그가악!”
불길을 뚫고 구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억압의 손길!”
촤앗, 촤르륵!
사슬이 불붙은 구울의 움직임을 잠시 막아선다.
“불 말고 다른 공격으로!”
“네, 넷!”
염태규는 내 지시에 따라 육체 강화 스킬을 사용한다. 그러고는 맨손 격투.
‘소울메이트.’
츠츠츳.
내 몸에서 두 가닥의 에너지 선이 삐져나와 결이와 선배에게 들러붙는다.
소울메이트가 연결된 걸 깨달은 결이와 선배가 돌진하는 구울을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나도.’
촤앗, 촤앗.
드디어 사용해 볼 수 있게 됐다.
새벽의 검.
영롱하게 어두운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 녀석의 데뷔전으로 오늘의 이 던전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와라.”
나는 깊이 들어가진 않는다.
힐러인 김민철을 지켜야 하니까. 다른 딜러들이 놓쳐 우리 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놈들만 처리해 주면 된다.
‘무릇 파티플에서 딜 욕심만 너무 내면 안 된다는 말씀. 역량만큼 하고 포지션을 잘 지킬 것.’
아무리 회귀 전과는 비교도 안 될 강한 힘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것에 정신이 팔려서 나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아니,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이지.
퍼벙! 파바바박!
인화 선배의 버블 붐이 터지는 소리.
파칫, 스겅!
결이의 검이 구울을 베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밸런스가 생각보다 괜찮네요. 역시 S급이랑 A급인가.”
김민철이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안개를 헤집고 나타난 다섯 마리의 구울.
구울의 수가 많아 난전인 데다가 안개 탓에 시야가 흐르니 딜러들이 놓친 놈들이다.
“어엇!”
김민철이 당황하는 사이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휘이익!
검고 어두운 검날이 뿌연 안개를 가르며 선회한다.
검을 이런 식으로 다뤄 본 적은 없는데 마치 검이 내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궤적을 만든다.
스각, 스걱.
검이 지나는 자리에는 물체가 잘리는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검은 잔상이 남았다.
투욱. 툭.
“그아아! 키아아악!!”
구울 중 한 놈은 목이 바로 날아갔고 다른 놈은 복부가 갈려 내장이 쏟아져 나왔다.
휘익.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빙글 돌아, 터진 배로 멀뚱히 서 있는 구울의 턱을 벤다.
서걱.
썩은 구울의 턱이 단번에 잘려 나갔다.
투욱. 턱밑에서부터 정수리로 반듯하게 잘린 구울의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세 마리 남았다.’
내게 어그로가 끌리리라 생각했지만, 나머지 세 놈은 곧장 김민철이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구울은 공격력이 제일 낮은 자를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몬스터.
“허억!”
재빨리 공격 스킬을 시전하려는 김민철이 보인다. 그야 대부분의 힐러나 서포터들은 자기를 지킬 공격 스킬 몇 가지는 가지고 있으니까.
딜러만큼 대미지가 나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힐을 하면서 사냥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나는 예외지만.
“크르르륵! 키에에엑!!”
하지만 김민철보다 구울의 움직임이 훨씬 빠른 것 같다.
땅을 딛는 다리에 힘을 주고 김민철을 향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