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제49편
“여러분 이리로! 미끄럼틀을 타듯이 내려가시면 됩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쉿, 몬스터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용히 대피해 주세요.”
사람들은 내 부축을 받아 차례로 사슬 미끄럼틀을 타고 바닥에 안착했고 옥상에 고립된 인원은 모두 대피가 완료되었다.
‘좋아, 또 고립된 사람은 없나.’
건물 위에서 주변과 기가스 오거의 움직임을 훑는다.
‘기가스 오거의 약점. 인간형 몬스터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 녀석도 머리와 목 명치 등이 있겠지만, 지금 공격력으로는 급소를 타격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낮은 공격력으로는 두꺼운 기가스 오거의 피부 가죽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이의 강력한 뇌검으로도 고작 생채기를 내는 정도가 다였다.
‘쳇…….’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당장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억압의 손길로 최대한 움직임을 막고 시민들을 구조하는 데 집중하자.’
얼마나 버텼을까. 이제 더 대피할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건물이 몇 개나 무너지고 도로는 파괴되었다.
슬슬 결이와 인화 선배의 체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허억, 헉.”
“지원이 늦네요.”
“아직 좀 더 버틸 수 있지?”
“물론이죠.”
결이와 인화 선배는 애써 괜찮은 척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가스 오거 역시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조금 전부터는 거의 이동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신고하기 위해 휴대폰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왜 지원이 늦어지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젠장, 포털이 열린 게 여기만이 아니야.”
“뭐? 다른 곳에도 기가스 오거급이야?”
“아뇨…….”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남산 쪽에 와이번 떼와 드래곤이…….”
“드래곤이라고?”
“맙소사.”
결이의 미간이 확 찡그려졌다.
우리는 아직, 그러니까 회귀 후에는 단 한 번도 드래곤을 만난 적이 없었지만 그게 얼마나 강한 몬스터인지는 알았다.
S급과 A급들로만 이루어진 정예 팀도 다섯 이상의 그룹이 붙어야 공략 가능한 놈들이었다.
‘그래. 이런 사건이 있었지 참.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해서 미리 체크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그날이 오늘이라니.’
이곳까지 올 여력이 없을 것이다.
사태를 파악하고 나니, 스멀스멀 기억이 올라왔다.
이때 서울의 모든 길드가 힘을 합쳐 겨우 드래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남산이 대부분이 소실되다시피 했으며 수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드래곤이 공략되자마자 생성되었던 포털은 사라졌다. 드래곤이 계속해서 생성되는 크랙이라면 아마 서울 전체가 불바다가 됐겠지.
“지금 모든 인력이 거기로 다 모였대요. 그마저도 쉽게 잡히진 않고 있나 봐요.”
“그렇겠지. 드래곤이라니…….”
세컨드 오픈이 일어난 지 이제 겨우 한 달을 넘었을 뿐이었다.
다시금 이런 큰 재난 상황이 발생하다니.
‘회귀 전보다 지금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끔찍한 시간들을 버티며 인류가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경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퀘스트 하나로 인류 멸망이 끝이라니.
‘후우. 일단 지금 상황에 집중해야 해.’
짜악. 양손으로 볼을 때렸다. 사실 집중한다고 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르르르……. 크르르르…….”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던 기가스 오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나, 버틸 수 있죠?”
“당연하지. 누나가 A급이라도 너보다 밥을 몇 공기나 더 먹었는데. 하하.”
결이와 인화 선배는 의지를 다지기 위해 같은 말을 곱씹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대미지를…….’
그때 좋은 생각이 났다.
“누나! 결아! 놈을 완전히 한강 쪽으로 끌고 가자!”
“한강?”
“드래곤 하니까 생각났어. 저 한강 속에도 아직 드래곤이 남아 있잖아?”
“아……!”
내 말을 이해한 결이와 선배의 얼굴이 밝아졌다.
세컨드 오픈이 열리던 날, 한강 아래에서도 포털이 열렸고 거기에서 거대 어룡종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그중에는 지금 남산을 공격하고 있는 드래곤급의 몬스터도 있었다. 하지만 수중 몬스터의 경우 물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굳이 사냥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이다.
물론 그날 이후로 한강 주변은 통행이 금지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이 오거를 한강에 빠트리기만 한다면, 적어도 물가 가까이 데려갈 수만 있다면 어룡과 맞붙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몬스터가 몬스터끼리도 싸울까?”
인화 선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미 몬스터끼리 붙여 놓으면 싸움이 벌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당장 해 볼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좋아, 해 보자!”
“응.”
나는 고개를 끄덕인 결이와 인화 선배에게 포션병을 던져 주었다.
“준비성 철저하네.”
인화 선배가 웃으며 포션을 목에 털어 넣었다.
“이리 와라, 덩치!”
“핫!”
“그어어어!!”
한강으로 이끈다는 분명한 목표 지점이 생겨서 그런지 몰라도 한결이와 인화 선배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차라리 지금 더 가벼워 보였다.
‘조금만 더……!’
한강에 가까이 가는 순간 억압의 손길로 물 쪽으로 당기고 결이와 선배가 놈의 등 뒤를 밀 작정이었다.
그 뒤론 한결이의 뇌격으로 어룡에게 어그로를 끈 다음에…….
“그르르…….”
한강으로 진입하기 위한 대로를 건너던 오거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어?”
“이 녀석 왜 이래?”
오거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더니,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오거의 시선이 멈춘 끝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300미터가량 떨어진 도로 한복판에 10살은 되었을까 싶은 남자애가 홀로 서 있었다.
“어째서?”
너무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대피 도중 길을 잃은 것일까? 부모는 어디에 있지? 하다못해 다른 어른이라도 아이를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
“으아아앙~! 엄마아아!”
아이 역시 오거와 우리를 발견하곤 울음을 터트렸다.
“그르르르…….”
오거는 우리와 아이를 번갈아 보더니 곧장 방향을 바꾸어 아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막아!”
냅다 소리를 지른 뒤, 나는 전력을 다해 아이 쪽으로 달려갔다.
쿠웅! 쿠웅!
쿵쿵쿵쿵쿵!
오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결이의 전격과 인화 선배의 버블붐이 터지는 소리가 뒤섞여 마치 폭죽놀이를 하는 것처럼 폭음이 터져 나왔다.
타악!
나는 아이를 낚아채 안아 들고 헤르메스의 신발을 사용했다.
휘이익, 휙.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당장 아이를 보고 눈이 뒤집힌 오거를 피해야 했다.
“너, 너 부모님은?!”
“몰라요. 으허어엉!”
“모르면 어떡해!”
“으아아앙!”
“이, 일단 진정하고.”
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내가 올라온 건물 바로 밑에 오거가 도착해 있었다. 그나마 선배의 버블붐과 결이의 공격 탓에 놈보다 먼저 아이를 구할 수 있었던 거다.
“이런 씨.”
‘오거는 어린아이 고기를 좋아한대.’
과거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오거가 보스로 나오는 던전을 돌면서 들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아느냐고 했더니 책에서 읽었다는 둥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그런데 그게 영 실없는 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쿠우웅! 쿠웅! 쾅! 쾅!
오거는 내가 아이를 데리고 올라간 건물을 부술 모양이었다.
“하준아! 이 녀석 완전히 거기에 꽂혔어!”
결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파칫, 파지짓!! 결이의 전격이 계속해서 오거를 향해 떨어지고 있지만, 그 크기가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결이도 이제 마력이 거의 바닥났을 거다. 검으로 계속 공격을 할 수 있긴 하겠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유의미한 대미지가 들어가지도 않아.’
“세이프티 버블!”
인화 선배의 외침과 함께 내 주위로 동그란 보호막이 생겨났다.
오거의 공격에서 한 번 정도는 지켜 줄 수 있을 거다.
“치잇.”
지금 확실히 어그로가 끌린 상황이니까.
곧장 한강으로 간다면? 하지만 어린아이를 미끼로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거를 한강으로 몰아가기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속도로 따지면 한결이가 아이를 이동시키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
“결아!! 나랑 교대해서……!!”
외치는 동시에 오거가 결이를 움켜쥐었다.
콰악!
“크윽……!”
“결아! 이동기로……!!”
“못 써!”
큰일이다. 결이의 마력이 바닥나고 만 거다. 구름의 아들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면, 저 무식한 오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다.
오거는 지금까지 저를 정신 사납게 만든 한결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녀석은 결이를 쥔 채 건물에 주먹을 내다 꽂았다.
쿠웅!
쿠우웅!!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오거가 작정하고 나를 쫓아온다면 수치상 내가 이길 가능성은 없다.
“으어어엉! 무서워!!”
품에 안긴 아이가 나를 끌어안으며 바짝 매달렸다.
쿠콰앙!!
우르르르르……!!
오거 놈의 공격에 드디어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신발은 쿨 타임이 돌기 전까지 다시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상황에서 오히려 더 부릅떴다.
가 보자고.
“야, 꽉 잡아라. 어떻게든 형이 구해 줄게.”
아이의 손이 내 옷을 더 꽉 그러쥐었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러날 수가 없다. 요행을 부릴 수도 없다.
파앗! 한강을 향해 멀리 뛰어올랐다.
전력 질주다.
“억압의 손길!”
곧장 따라오려는 오거의 발목을 사슬로 끄집어 당겼다. 거의 잡힐 뻔했던 나를 놓쳐 다급해진 놈은 미처 사슬을 발견하지 못하고 휘청이며 쿵! 하고 넘어진다.
지금이 기회다.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헉, 허억!”
한강을 향해 달리는 데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으드득, 어금니가 깨지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시스템의 힘으로 강화된 신체가 마치 일반인이었던 때처럼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낼 수 있는 최대 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심장이 뛰다 못해 비수가 찌르듯이 고통스럽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쿠웅. 쿠웅!!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오거의 발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돌아볼 여유 따윈 없다.
후우웅!
놈의 주먹이 나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헤르메스의 신발 쿨 타임은 3초.
‘조금만, 조금만 더!!’
콰악!
오거의 손이 나를 붙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인화 선배가 내게 둘러 주었던 세이프티 버블을 잡았다.
퍼엉!
버블이 오거의 손에 약한 대미지를 주며 나를 튕겨 낸다. 가까스로 오거의 손에서 벗어나 휘청거리며 잔디밭에 착지한다. 그리고 또다시 달린다.
‘허억, 허억!’
온몸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심장이 깨져 버릴 것만 같고 내 다리를 스스로 컨트롤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품에는 아이를 제대로 안고 있기는 한가?
“그아아아……!!”
뒤에서 오거의 포효가 들린다.
죽을 것 같다. 정말로. 몸이 죄다 찢길 것 같았다.
후욱.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쓰러진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서 반투명한 사슬이 나를 향해 뻗어 온다.
억압의 손길.
사슬이 내 몸에 휘감긴다. 그리고 처음 지하철에서 놀을 상대했을 때처럼 힘껏.
나를 한강 쪽으로 잡아당겼다.
후우욱! 시선이 뒤집히고 뒤를 쫓아오는 오거가 보인다.
그리고 내 머리 위에는 새카만 한강.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