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제48편
아무래도 인화 선배를 그냥 방치하는 건 걱정이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서 지켜보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응? 그래도 되나?”
“당연하죠. 누나 랭크도 A급인 데다가 전투 센스도 좋고 방어랑 공격 다 커버 가능하시잖아요.”
“어머, 오늘 칭찬이 후하네?”
“에이 팩트인데요, 뭘. 완전히 혼자 활동하시는 거보다 그렇게 감 익히시면서 침착하게 길드 알아보고 들어가셔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 물론 위험한 던전엔 안 들어갈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준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어. 난 너 믿어.”
백미러로 보이는 인화 선배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나는 던전도 던전이지만, 바깥으로 나오는 몬스터 처리도 돕고 싶은 마음이 커. 첫 세컨드 오픈의 여파가 아직 곳곳에 남아 있잖아. 그리고 신규 게이트도 언제 어떻게 열릴지 모르는 일이라고 하고.”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도 인트루더들 사냥에 관심이 있거든요.”
인트루더. 세계에서는 포털 바깥으로 나오는 몬스터들을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한국 내에서는 그냥 침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놈들을 상대하는 건 오히려 좋다.
‘침입자 놈들한테서 영혼석이 더 회수되는 건지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겠어. 진짜라면 오히려 바깥에서 녀석들을 상대하는 편이 이득인 셈이고.’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니 선점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어차피 크랙인 포털이 어디 어디 있는지 대충 외우고 있으니까.’
이제 헌터 자격증도 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몬스터를 마주쳐도 마음 편하게 상대할 수 있다.
“정말? 다행이야. 너희들도 그렇다면 나는 너무 좋지!”
“선, 아니 누나 앞을 봐야죠!”
“어어어.”
잠깐 자동차가 덜컹거렸다. 도로에는 다른 차가 없었던 게 다행이었다.
“미안, 미안. 하아. 잘 이끌어 줘서 너무 고마워. 센터에서 팀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너희가 도와줘서였고. 참 좋다. 좋아, 먹고 싶은 거 뭐야? 이 누나가 간만에 솜씨를 발휘해 볼게.”
“하하, 그럼 다음 주에 갈비찜 해 주세요!”
내 말에 한결이가 눈을 빛냈다.
위이잉. 차 창문을 열자 한강이 보이고 시원한 밤공기가 빨려 들어왔다.
좋다. 선배의 말대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덜컥!
끼이이익!!
난데없는 급정거에 앞좌석에 부딪히고 말았다.
“누, 누나?”
“하준아……!”
앞자리에 앉은 인화 선배의 얼굴이 빛을 받아 희게 보였다.
“저건…….”
“포털이다.”
결이의 말대로, 도로 한복판에서 새로운 게이트 포털이 생성되고 있었다.
일렁이는 보랏빛 아지랑이는 순식간에 그 크기가 2미터를 훌쩍 넘도록 확장됐다.
“다들, 내려.”
선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와 결이가 차 안에서 튀어나왔다.
“망량!”
“무앙!”
츄르릇. 왼쪽 어깨 위로 푸른 불꽃이 피어올랐다.
부우웅!
인화 선배는 거칠게 후진하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대고 달려오며 외쳤다.
“일단 신고는 해 뒀어. 지원이 올 때까지 운이 좋길 바라야겠어.”
솔직히 말해서 어떤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셋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 몬스터가 나올지, 아니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강한 헌터들이 와도 힘에 부치는 전투를 치러야 할 수준일지.
하지만 몬스터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포털을 앞에 두고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우리는 각성자니까, 헌터니까.
그저 몬스터를 사냥해서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하고 도와야 할 위치니까.
즈즈즛. 즈즛…….
성장을 마친 포털이 아롱거렸다.
주우욱.
중앙 부분을 뚫고 느릿하게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단 인트루더 확정.”
내 말에 인화 선배는 미간을 찌푸리며 피식 웃었고 한결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동안 체력 올려놓길 잘했네.’
쯔어어억.
포털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건 겨우 손 하나였다. 이미 사람의 키를 훌쩍 넘은 크기의 손.
“저게 넘어올 수 있는 거야?! 물리적으로?!”
“포털에다 대고 물리적을 논하는 것부터 잘못된 거 같지 않아요?”
긴장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나 역시 경악하고 있었다.
터억.
비좁은 포털 입구에 손 하나가 더 걸쳐졌다.
쑤우우욱. 그러고는 마법 램프에서 요정 지니가 튀어나오는 것처럼 순식간에 몬스터가 정체를 드러냈다.
5층 높이의 거대한 몸집. 거대한 바위산처럼 느껴지는 인간 형태의 몬스터는 감히 고블린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은 수많은 상처와 지저분한 털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엉망진창으로 쑤셔 박힌 것 같은 모양새의 날카로운 이빨은 금방이라도 우리를 물어뜯을 듯 위협적으로 보였다.
놈의 허리춤에 걸친 천 조각에는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아주 식인 콘셉트라는 걸 숨기지 않네.
“기가스 오거.”
중얼거리는 인화 선배의 목소리에는 탄식이 섞여 있었다.
녀석은 거의 중하위 던전의 보스급으로 나올 만큼 강한 녀석이었으니까.
“이거 운이 안 좋네. 또 거인이랑 상대라니.”
“그러게요. 당분간은 거인형 몬스터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요.”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긴장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받아들여야지.
“계획 변경해야겠네요. 놈은 우리 셋으론 못 쓰러트려요. 지원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도록 하죠.”
“역시 네 생각에도 그렇지?”
아무리 S급과 A급이 있다고 해도 아직 레벨은 낮다. 지금 이 인원으로 놈을 상대하려면 두 사람의 레벨이 적어도 50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마 그것으로도 부족할 거다.
“큰일이야, 이 주변은 죄다 주택가라…….”
인화 선배는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흩뿌려지는 버블붐.
놈이 건물 쪽으로 붙는 걸 최대한 막기 위해서였다.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예상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그르르르…….”
완전히 포털을 빠져나온 녀석이 우리 세 사람을 발견한다.
“그어어아아아아!!”
“크읏!”
놈의 포효에 돌풍이 일 정도다.
가로수가 거의 부러질 듯 흔들렸다.
“와, 이 정도로도 체력이 닳네요.”
힘 스텟을 안 찍었으면 기절했을까 싶을 정도다.
“하준아, 조심해. 절대로 방심하지 마…….”
“오케이. 접수.”
“추가 신고 끝냈어.”
“역시 인화 누나세요. 포털에서 나온 놈이 기가스 오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아마 강한 헌터들을 보내겠죠.”
슬슬 주변으로 일반인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놈은 눈을 번들거리면서 주위를 살피기 시작한다.
“관심이 일반인들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츠츠츳!
소울메이트 스킬을 시전하고 연결되자마자 결이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더 빨라졌군.’
첫 실습 때 엄청나게 경험치를 많이 받은 덕분에 한결이도 레벨 9까지 올라갔다. 나에 비하면 겨우 몇 단계 레벨이 오른 것뿐이지만, 그 속도가 벌써 내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
‘역시 S급들은 사기야.’
파츠츳!!
뇌검(雷劍)이 오거의 겨드랑이를 노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오거가 더 빨랐다.
퍼어억!!
오거의 육중한 주먹이 파고드는 한결이를 내리쳤다. 결이는 놈의 공격을 막아 내지만 길게 뒤로 밀리고 말았다.
“빨라.”
한결이는 중얼거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 옆을 인화 선배가 빠르게 지나가며 오거와의 거리를 좁혔다.
“어휴, 무서워!”
선배의 주먹을 버블붐과 비슷한 모양의 거품이 감싸고 있다.
콰아앙!
한결이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오거에게 인화 선배의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그어어어!”
하지만 큰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았고 오거는 분노한 것 같았다.
쉬이익! 깊숙이 들어온 인화 선배의 머리 위로 오거의 주먹이 내리꽂힌다.
차르르르륵! 콰아아앙!!
이번에 오거의 주먹을 막아 낸 건 내 억압의 손길.
반투명한 사슬 하나가 부들부들 떨리며 오거의 주먹 궤도를 비틀리게 했고 인화 선배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파츳, 파츠츳!
그 틈에 구름의 아들을 이용해 오거의 뒤로 이동한 한결이가 놈의 뒷덜미를 검으로 베어 낸다.
콰과과과과!
엄청난 파찰음과 찌릿찌릿한 충격파가 전해진다.
“그으으으…….”
놀랍게도 오거는 기습적으로 꽂힌 한결이의 공격을 손을 뻗어 막아 냈다.
“젠장.”
결이의 검이 다시 빠르게 오거의 손을 튕겨 내고 뒷덜미에 강한 대미지를 넣기 위해 휘둘러진다.
카가가가!!
‘이번엔 먹혔다! 하지만 대미지는 인화 선배보다 약간 더 들어갔을 뿐이야. 오거 녀석. 생각보다 훨씬 강하군.’
내 공격 같은 건 하루살이가 부딪히는 느낌이겠지.
‘새로 얻은 검을 써 보고 싶었는데 이거 근처에 갔다간 으깨지겠는걸.’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영혼 감별사!
즈즈즈.
오거와 거리를 살짝 벌리고 틈을 노리고 있는 인화 선배의 등 뒤로 시스템 정보가 떠오른다.
[서인화]
영혼 등급: A
영혼 상태: 안정
싱크로율: 70%
‘좋아. 딱 커트라인이네.’
즈즛.
소울메이트 스킬을 사용하자 내 몸에서 뻗어 나온 희미한 선이 인화 선배의 등에 가서 달라붙었다.
“어?”
곧장 인화 선배가 뒤를 돌아본다. 고개를 끄덕였더니 바로 이해한 선배는 엄지를 들어 보이곤 다시 오거에게 돌진했다.
인화 선배는 어차피 이 스킬에 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
‘0.6% 보정 효과지만, 없는 것보다 낫지. 문제는 나다. 오거가 한결이 속도를 따라잡는 걸 보니, 정면 돌파는 절대로 안 되고. 그나마 억압의 손길도 레벨이 3까지 올라서 약간의 효과가 있는 것이고.’
그마저도 여러 개의 사슬을 사용할 수 없고 힘을 모아 단 하나의 사슬로 사용해야만 주먹의 궤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한결이가 지나친 복수자 스킬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얻으려면 아직 레벨을 한참 올려야 하고.’
저 주먹에 맞아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지만 말이었다. 지나친 복수자 스킬은 내가 맞은 대미지까지 한결이의 공격력 펌핑 용으로 쓰이는 거다.
‘그래도 영혼석으로 부족한 체력에 야금야금 투자하면 나중에 고레벨이 되었을 때 좀 쓸 만하겠는데?’
퍼버버벙!!
인화 선배의 버블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덕분에 오거는 주택가로 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우리가 의도한 대로 대로변을 향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퍼억! 퍼어어억!!
문제는 그 과정에서 결이와 인화 선배가 무진장 얻어터지고 있었다는 거지만.
‘저쪽 건물에선 오거 때문에 아예 나올 수가 없는 모양이군.’
오거 근처의 건물 옥상에 공포에 질린 일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헤르메스의 신발.’
나는 두 번의 도약으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헉, 허억……! 헌터!”
“각성자님! 도와주세요!”
“여러분! 일단 침착하세요!”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이러다가 어그로가 끌리면 큰일이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겠지만.’
나는 이미 사람들을 구조해 본 경력도 10년이 넘었으니까.
차르르륵!!
여러 개의 사슬을 뭉쳐 도로에서부터 옥상까지 끌어 올려 내 허리에 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