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제46편
심지어 검은 두 자루가 한 쌍이었다.
매끈한 가죽으로 덧대어 만들어진 손잡이까지 소환되고 나자, 나는 자연스럽게 검을 받아 들었다.
“우와…….”
검은 손에 착 달라붙었다.
무기 종류의 아이템을 사용해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까지 그립감이 좋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가볍다.”
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움직여 한번 휙 돌려 보았다.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적당한 무게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마치 나를 위한 물건이라는 느낌이랄까. 한 번 쥔 것만으로 이렇게 애착이 가다니.
“무앙!”
잠자코 구경하던 도깨비불이 신이 나선 검날 위에서 미끄럼틀을 탔다.
“야야, 다친다.”
살짝 밀어냈더니 도깨비불이 요리조리 몸을 피했다.
“그런데 너 정말 좀 작아졌다?”
“뭉!”
도깨비불은 자기 몸을 둘러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거울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울을 한참 바라보았다.
불꽃이 천천히 일렁거리다가 추욱 늘어졌다.
“무우웅…….”
역시 작아진 게 맞나 보다.
던전 안에서 내 머리를 삼킨 탓인가 싶었다.
지금껏 도깨비불이 전혀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으니까. 무리를 한 것일까.
녀석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냐?”
“무옹! 무오옹!”
도깨비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하늘거리다가 총총 날아와 내 뺨에 달라붙었다.
“……이름 지어 줄까?”
“……뫙?!”
생각해 보니 이 녀석과 만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런데 정 없게 계속 도깨비불이라고 불렀다.
녀석은 최선을 다해서 나를 서포트해 주고 있는데 말이다.
“뭐가 좋으려나. 사실 작명 센스가 있는 건 아닌데…….”
“무앙! 무앙!”
“흐으음…….”
심사숙고하는 동안, 도깨비불은 마치 강아지처럼 기다렸다. 넘실대는 불꽃의 움직임에서 녀석이 얼마나 기대하는지가 느껴졌다.
“……무왕이!”
“뭉?”
“어때, 단순하면서도 귀엽지.”
“……무아?”
모름지기 이름이라는 것은 투박하게 지어야 오래 산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 귀여운 도깨비불에게 개똥이나 덕배 같은 촌스러운 이름은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깨비나 파랑이 이런 건 너무 유치한 것 같고.
그래서 녀석이 내는 소리랑 비슷한 무왕을 선택한 거다. 나름 마음에 들었는데 도깨비불의 반응은 영 그런 것 같지 않았다.
“무아앙!! 무아앙!!”
격렬하게 거부하는 이 반응.
“끄으응……. 그럼…… 망량이?”
“무앙?”
사실 이 이름은 좀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도깨비를 부르는 다른 말인 이매망량에서 따온 것이다. 이거 뭐 강아지에게 아지라고 이름 짓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이매망량(魑魅魍魎).
그러니까 요괴나 정령 같은 것들을 총칭하는 말인데 이게 조금 껄끄럽게도 쓰였다. 귀신이나 기분 나쁜 것을 표현하는 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 귀엽고 착한 도깨비불에게 지어 주기에는 좀 찝찝하단 말이지.
“무앙!”
하지만 도깨비불은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은 반응이었다.
“뭐가 다른……. 어?”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도깨비불 녀석의 몸집이 서서히 커지더니 원래의 크기를 회복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입 위로 갸름하게 선이 두 개 생기더니, 눈이 생겼다.
천천히 깜빡이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눈이 맞다.
“너, 너어……!”
“무아앙!”
여전히 녀석이 낼 수 있는 소리는 무아앙 따위였지만, 이건 확실하게 도깨비불이 성장했다는 증거다!
도깨비불의 눈은 평범한 안구의 모양은 아니었다.
불 사이로 뚫린 구멍이라는 느낌? 얇게 휘어졌다가 동그랗게 뭉쳐져 깜빡였다. 그게 엄청나게 귀엽다.
귀여움이 한 3배로 뻥튀기가 되어 버렸다.
“어, 어째서지? 이름을 지어 준 것만으로?”
“뭐야? 혼자서 무슨 말을 그렇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아 슬쩍 열려 있던 틈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갔는지 한결이가 들어왔다.
“어…….”
“어, 결아.”
그러니까 나는 곧장 결이에게 손에 들린 검과 눈이 생긴 도깨비불, 아니 망량이에 관해서 설명해야 했다.
망량. 어쩐지 말랑이처럼 들리기도 하네. 귀엽게.
* * *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밝은 얼굴의 윤지한이 4기 헌터 자격증 수료 과정을 마친 각성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아!”
“다들 축하해요!”
“이제 드디어 헌터로서 첫발을 내딛는 거군요.”
첫 현장 실습에서 큰일을 겪은 10팀 팀원들이었지만, 다른 팀원들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 보였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팀원들끼리의 유대가 더욱 깊어졌고 다른 팀에 비해 우수한 협동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등급에 상관없이 10팀 팀원들은 대부분 상위권 성적을 받으며 헌터 자격증을 수료하게 됐다.
수료식 자체는 간단하게 끝났다.
자격증을 배부받고 윤지한의 수고했다는 말이 다였다. 그러나 수료식이 끝나고 나서도 4기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아, 여러분 모두 각자 인사들 나누시고! 알아서 귀가하시면 됩니다.”
윤지한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큰 징계를 받은 것 같지는 않네요. 물어봐도 괜찮다고만 대답하시고.”
“그러게, 다행이야. 한 사흘 정도 수업에 못 나온 것 말고는 별일 없었지?”
내 말에 인화 선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드디어 헌터 자격증이 나왔으니, 이제 길드에 지원해야겠지?”
“아, 누나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거에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인화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인화 선배의 뒤로 강민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 축하드려요. 여러분을 만나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당장 내일부터는 여러분과 만나지 않는다니, 너무 아쉬워요.”
강민혁과 진보라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렇군, 진보라 씨는 이제 결이랑 마주치기 힘들 테니까. 뭔가 진전이 없어서 아쉬웠네.’
마지막 수업이 진행될 때까지도 진보라의 시선은 늘 결이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걸 내가 알아차릴 때마다 눈이 마주쳐 버려서 황급히 시선을 거두던 그녀였지만.
“여러분은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인화 선배의 물음에 강민혁이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었다.
“사실 저는 아버지 아시는 분이 길드를 운영하고 계셔서 그쪽으로 지원하게 됐습니다.”
“오 정말 잘됐네요!”
모두가 작게 박수를 치자 강민혁의 얼굴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혹시 여러분들께서도 딱히 정해진 길드가 없으시다면 제게 말해 주세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길드 이름이 뭔가요?”
“어, 그, 그러니까…… 금성 길드입니다.”
“뭐라고요?!”
진보라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솔직히 나도 놀랐다.
미래가 어떻게 됐든, 금성 길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는 길드니까.
‘음, 강민혁 씨 실력이라면 금성에서도 꽤 괜찮은 대우를 받으면서 활동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좀 걸리는군…….’
당장에야 지원받으면서 폭풍 성장을 할 수 있을 터인데 오래 몸을 담을 곳은 아니니까 말이다.
“거, 거기는 완전 대기업 아닌가요? 우와! 민혁 오빠 인맥 장난 아닌데요?! 대단하다!”
“아이 참, 뭐 제가 대단할 게 있나요. 그냥 소개받은 것뿐인데요.”
“아니에요. 금성 길드는 소개받는다고 다 받아 주는 길드가 아니니까요.”
내가 거들자 강민혁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흠, 혹시 계약 조건은 이미 들으셨나요?”
“아, 네. 사실 이미 테스트와 면접을 봤거든요. 전속으로 10년 보장 계약입니다.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다른 길드의 계약 조건과 비교해서 임금 외 인센티브나 복지 등 조건은 정말 좋고요.”
“우와~! 이제 막 각성했는데 10년 계약! 시작부터 아주 안정적이고 좋네요.”
진보라는 부럽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계약 기간이 무조건 긴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건 초보 각성자들이 쉽게 하는 실수다.
한국인 절대다수가 좋아하는 안정적인 직장.
하지만 그건 각성자, 헌터라는 직업이 생겨난 지 1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던전의 상태가 시시각각 어떻게 변하는지, 거래 아이템의 시세가 어떻게 변하는지.
또한 헌터의 입지나 활동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특히나 지금은 세컨드 오픈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막 각성자가 된 사람들은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는 거다.
물론 길드라고 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기업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돌아가는 게 당연할 뿐.
하지만 나는 안단 말이지. 앞으로 1년, 2년. 날이 갈수록 헌터계는 격변한다.
10년 계약이라니. 말이 보장이지 저건 길드에서 각성자를 붙잡아 둘 족쇄다.
‘다들 몰라도 너무 몰라. 당연한 것을.’
나는 강민혁의 눈치를 보며 슬쩍 입을 열었다.
“금성 길드라니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만약 계약 기간을 지금이라도 수정할 수 있다면 하는 걸 추천해요.”
“어? 왜, 왜죠?”
진보라가 당황하는 것은 물론 강민혁의 얼굴도 약간 어두워졌다.
“아직 계약을 완전히 한 건 아니라…… 수정하려면 할 수는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영 어수선하잖아요? 지난 10여 년간 몬스터가 포털 밖으로 튀어나오던 일도 없었고 이렇게 많은 각성자가 한 번에 생긴 적도 없었죠.”
강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전체가 혼돈 속이라는 거죠. 사실 정부에서는 금방 안정을 찾은 것처럼 굴고 있긴 하지만요. 사실 아니거든요. 길드들 상황도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아…… 하긴, 하준 씨 말을 들어 보니 맞는 말이네요.”
“으음…….”
진보라가 강민혁의 눈치를 살짝 봤다.
“그러니 민혁 씨가 조금 더 조심스럽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금성 길드는 분명 좋은 곳이지만, 시기상 너무 오랜 기간을 처음부터 계약하는 건 오히려 민혁 씨에게 손해라고 생각해요.”
“흐음, 그렇군요.”
강민혁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성 면에서도 그렇지만, 강민혁 씨는 충분히 강하니까요. 게다가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굳이 경력이 없는 지금 10년을 저당 잡히는 것보다 짧은 계약 기간 동안 실력을 증명한 뒤 몸값을 올리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한 번에 10년을 계약하면 중간에 비율 조정을 하는 게 어려우니까요.”
“그런…….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또 공무원으로 일했었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약해서요.”
강민혁은 쑥스러운지 귀까지 붉히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하준 씨는 현명하십니다.”
“에이, 뭘요. 제가 괜히 찬물을 끼얹은 건 아닌가 걱정되네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하준 씨가 하신 말씀 중에 틀린 게 없는데요. 정말 도움이 됐습니다. 이번 수료 과정 내내요.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죠. 저도 민혁 씨가 잘되시면 좋겠거든요. 우린 동료니까요. 그렇죠?”
씩 웃어 보였더니, 강민혁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언젠간 꼭 다시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음, 아마 경쟁자로 만날 것 같은데요.”
모두 웃음을 터트렸지만, 강민혁의 머리 위에는 축 처진 동물 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결이의 표정은 더없이 의기양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