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제45편
“던전 하나를 망가트렸잖습니까.”
성 대위가 전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나를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은하준 씨 주위로 계속 사건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크흠흠. 생각해 볼 이유가 있나요. 요즘 참 혼란스러운 시기라 그렇죠.”
문제가 좀 있었다. 던전의 수수께끼를 풀고 새로운 방법으로 공략을 한 것 말고도 말이다.
10팀 팀원 모두가 포털을 넘어온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변수가 있었지만, 4기 각성자들의 실습수업은 그대로 이어졌다. 곧장 대기하던 9팀이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던전 안에 몬스터가 없었다.
원래 양쪽으로 두 번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었기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지나쳤던 길 외에 다른 길에는 몬스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던전 안은 고요했다.
반대편에 있던 보스 룸이라도 발동되어야 했는데 그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던전은 더 이상 던전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러니 9팀은 첫 실습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됐고 모두 각성자 센터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다시 각성자 센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그 앞은 특수 괴물 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갔던 던전 역시 특수 괴물 부대가 파견되어 새로운 조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사실 애초에 크랙이 아닌 던전이라면 공략 후 사라지게 되어 있다. 크랙이었는데 크랙이 아니게 됐다. 한데 사라지지도 않는다.
지금 이 상황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 말이다.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초유의 사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황당하다고. 뭐 이런 경우가…….’
몬스터가 없는 아공간, 던전이 영원히 상태를 지속한다면 그건 축복일까?
“애초에 이번 말고는 그쪽에서 시킨 일에 문제가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해도 위에서는 더욱 은하준 씨에게 관심을 가질 겁니다.”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제가 의도한 사건이 아니니까요.”
정부에서 뭔가 제한을 걸거나 한다면 곤란하긴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얻은 게 훨씬 많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걸 좀 확인하게 풀어 주면 좋겠지만…….
일부러 성 대위의 눈치를 슬쩍 본다.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뭔가 저한테 제재를 가한다거나…….”
“사실 은하준 씨에게는 책임을 묻기 어렵습니다.”
“아,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예. 은하준 씨 말대로 운하준 씨는 휘말린 사람일 뿐입니다. 그건 10팀 팀원들 전부가 그렇고 엄연히 책임을 져야 하는 실무 담당자가 있지 않습니까.”
윤지한의 핼쑥해진 얼굴을 떠올리며 그가 당할 고초를 가늠해 보았다.
아무래도 공무원이니까, 징계를 면하지 못하려나.
“그를 처벌할 건가요?”
“글쎄요.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밀입니다.”
“네? ……그럼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뭔가요?”
“뭐, 제가 은하준 씨한테 관심이 많이 생긴 탓입니다.”
인상을 찡그리니 성 대위가 피식 웃는다.
“몸은 건강해 보이십니다. 걱정했습니다.”
걱정을 안 했으면 사이코패스겠지. 하지만 그가 걱정했다고 해도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다. 나 생각보다 이 남자를 싫어하고 있는지도.
“아아, 뭐.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죠.”
“특수부대 관련 업무를 하시다 그런 일이 발생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죠.”
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을 하지,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말았다.
“아, 그리고 류환희를 만나셨습니까?”
걱정했다면서 걱정했다는 이야기가 이렇게 금방 끝나나? 정말 정 없는 사람이라니까.
“환희에게 길드를 만들자고 부추기셨다 들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애초에 류환희 씨가 우리 집에 쳐들어왔고요. 길드 이야기도 환희 씨가 꺼낸 이야기라고요.”
“흐음.”
류환희 이 여자가 대체 뭐라고 말을 전한 거야? 게다가 둘이 대화는 전혀 안 할 것 같은 분위기더니, 그새 일러바친 건가?
아, 류환희가 아닐 수도 있겠다. 류창희라면 성 대위에게 말을 전하고도 남았을 거다. 친한 친구라더니.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환희는 제 친구의 동생입니다. 저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짐작을 하면서도 얼추 짐작되어 불길했다.
“위험한 일에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대체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흘러가냐고.
“애초에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까?”
“네. 전 누군가를 위험에 빠트릴 생각도 없고요. 제가 류환희 씨에게 길드를 만들라고 부추긴 일도 없어요. 그리고 만약 류환희 씨가 길드를 만든다고 해도 성 대위님이 무슨 상관입니까? 환희 씨는 미성년자이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과 목적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내 말에 성 대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약간 쫄리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 그녀가 해낼 일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녀는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던전의 비밀들을 연구해서 성과를 올린다.
성현준이나 내가 없어도 그녀 혼자서 해내는 일이란 말이다.
“미성년자는 길드를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요.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지만, 환희를 믿는다는 거군요.”
딱히 대화를 깊게 나누진 않았다. 내가 미래를 알고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 줄 수도 없고.
“그럼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네?”
“환희가 당신에게 길드 창설권을 요청한다면, 물론 당신 친구인 한결 씨가 S급이니 그렇게 하기로 정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니까요. 그런 부탁이 들어온다면 거절하십시오. 한결 씨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성 대위가 이곳까지 찾아와 나를 만난 건 이유가 없지 않았다. 협박하러 온 거잖아!
“부탁입니까?”
“부탁입니다.”
어련하시겠습니까.
“성 대위님이 제게 생겼다는 관심이 그리 좋은 쪽의 관심은 아닌가 보네요.”
내 말에 성 대위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하준아!”
“어, 결아.”
성 대위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니 문 바로 앞에 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난 괜찮아. 대위가 뭐래.”
결이는 던전에서 나온 뒤 곧 의식을 되찾았고, 센터에 도착한 직후에는 몸에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받으러 갔었다.
나는 성 대위가 불러서 이곳으로 먼저 왔지만.
“별말 없었어. 그냥 보고받은 사실이 맞는지 더 특별한 것은 없었는지 물어보는 정도?”
성 대위가 늘어놓은 이야기에 관해서는 결이에게 딱히 털어놓지 않아도 되겠지. 안 그래도 성 대위를 싫어해서 안달인데.
물론 그의 상황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친한 동생이 걱정되기도 하겠지. 나이 차이도 크게 나고. 나야 아직 그에게 의심쩍은 인물일 테니까.
‘나도 기분이 안 나쁘다면 거짓말이겠지. 분위기로 봐서는 당분간은 성 대위가 일 관련으로 부르지 않을 것 같고.’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성 대위 성격상 지켜보기 위해 곁에 둘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결이도 반대하는 입장이고 해서 조금 거리를 둬 볼까 싶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헌터 자격증을 따자마자 길드에 들어가야겠고. 성 대위에게 부탁을 들어주겠다고는 했지만…….’
반쯤은 협박인 그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류환희가 있는 길드에 들어가야 한다.
내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하지만 성 대위와의 약속을 지키면서도 내 큰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 방법이 어디 있냐고?
당연히 있지. 성 대위 말대로 미성년자인 류환희가 길드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아니면 된다.
원래 미래대로 길드장이 되는 ‘그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거다.
헌터 등록증을 따느라 그간 그를 찾아 헤매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막막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왜 굳이 너를 불러서 그런 걸 물어봐. 너도 쉬어야 하고 검사받아야 하는데.”
“낸들 알겠냐. 뭐, 저번 사고 이후로 얼굴 못 봤다고 그러는 건지.”
“이상한 사람이야.”
“그래, 맞아. 이상한 사람이지.”
잠깐 한결이가 투덜거렸지만 나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 있었다.
* * *
센터에서의 검사와 조사를 모두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타악.
그리고 드디어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꿀꺽.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침을 삼켰다.
‘인벤토리.’
지이잉.
시스템이 익숙한 인벤토리 창을 열어 주었고 몇 개의 아이템들이 보였다.
지금 중요한 건 E급 던전의 몬스터 부산물 같은 게 아니다.
486번째 수수께끼를 풀고 얻은 업적 보상.
직후에는 인벤토리를 제대로 볼 정신이 없어서 못 보고 있다가 센터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발견했다.
이걸 다시 열어 보고 싶어서 얼마나 근질거렸는지.
물론 센터에는 보고하지 않았다. 정부에서 제출을 요구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고생을 했는데 뺏길 수야 없지.
[새벽의 검]
새벽 달빛으로 벼린 요정의 검.
무게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벤 상대의 기력을 흡수한다.
크리티컬 확률 +0.03%
민첩 +15%
강화 +0
‘민첩 +15%. 미쳤다.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나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 받은 소울 포인트로 상승시킨 민첩이 108. 거기에다 던전 공략 등으로 자잘하게 얻은 민첩의 수치가 121이다.
거기에 이제는 항상 15%가 펌핑되는 거다.
‘일반 +15보다 이제는 퍼센티지가 더 이득인 구간까지 왔어.’
이제 레벨이 오를 때마다 민첩 스텟은 더욱더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된다.
‘안 그래도 새로 얻은 영혼석을 체력에 투자하려고 했는데 잘됐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예 민첩에 계속 투자하고 싶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비정상적인 속도광보다 더 좋은 광기 업적이 있을지?
하지만 그간 겪은 전투를 보아 어느 정도는 체력에 투자할 필요성을 느꼈다. 소울석을 구하기가 이렇게 힘든데 계속된 모험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내가 그렇게 간이 큰 사람은 아니야.
‘아직 결이가 서툴러. 결이를 성장시킬 때까진 버틸 체력은 만들어 놔야 해. 앞으로는 더더욱 민첩만으로 버티기 어렵겠지.’
지금 가진 영혼석을 모두 힘에 투자한다고 해도 사실 민첩을 올렸을 때처럼 드라마틱한 변화를 얻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민첩뿐만이 아니지. 강화 가능 아이템이다.’
특히나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강화를 가능하게 할 헌터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이 특성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미래에 얼마나 더 강해질지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려운 것.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조용한 방에서 손을 뻗었다.
‘소환.’
츠츠츳.
공중에서 생성되는 새벽의 검.
처음에는 짙은 색의 검날을 보며 깜짝 놀랐으나 그 색이 해가 뜨기 직전의 밤하늘처럼 짙은 청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달의 모양처럼 휘어진 검날과 그 위에 마치 은하수가 흩뿌려진 것 같은 아름다운 점박이 무늬.
무기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