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제44편
그그그…….
다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땅속에 묻혀 있던 신이 몸을 일으켰다. 인간을 닮은 신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이제껏 봐 온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천사를 본 기분이랄까?
천사라고 하면 보통 하얗고 부드러운 한 쌍의 날개를 가진 금발 파란 눈의 미인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성경 속에 묘사되는 천사의 모습이 정말 기괴하다.
돌아가는 여러 개의 고리에 셀 수 없이 많은 눈알이 박혔다든가…… 여러 짐승의 머리만 한 번에 달린 채로 날갯짓을 한다든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하여튼 눈앞에 있는 존재의 것은 그런 부류였다.
기이하고 끔찍해서 경이로운.
마치 박동하는 거대한 심장처럼 보이는 거친 살덩어리에는 계속해서 개수가 바뀌는 여러 개의 입이 달려 있었다.
입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고 그 안의 송곳니들이 보였다가 잠겼다가 했다. 얼핏 목성의 거대한 폭풍인 붉고 흰 구름과 대적점의 이동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이 훨씬 징그럽지만.
‘표면은…… 저거, 융털인가.’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 아찔해지는 형태의 그것은 그 자체로 거인의 크기와 맞먹었다. 하지만 가장 소름이 끼치는 것은 그 형태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다.
겉보기에는 징그럽기 그지없는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이 모든 장면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갈로모데온.”
철컹.
음성과 함께 땅속의 거인이 몸을 다 일으키자 놀랍게도 그것을 속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흔한 모양의 보통 사슬은 당연히 아니었고 금빛으로 빛나는 쇠줄 모양이었는데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유적 안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과 닮았는데. 저걸 또 풀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기우였다.
분명 오래도록 그것 때문에 속박되어 있었음에도 이제 와 그것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손쉽게 끊어내 버렸다.
파스스스…….
금빛 쇠줄은 끊어지자마자 먼지처럼 흩날렸다.
‘대체 왜 지금까지 묶여 있던 거야?’
둥그런 신에게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천천히 생겨났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어. 네가 죽은 줄 알았거든.”
“나도 그런 줄 알았어.”
두 신의 대화에 공기가 떨렸다.
인간 형태의 거인 등 뒤로 피막 형태의 날개가 이리저리 돋아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촉수들이 천천히 얽히기 시작했다.
하나가 된다.
그 말이 맞았다.
신화 속에서 그들이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합쳐지기 시작했다.
“이거…… 로맨틱한 건가?”
업적의 힌트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좀 로맨틱한 것 같기도 하고.
“무와브와브무!”
도깨비불이 여전히 내 머리를 먹은 채로 웅얼거렸다.
거인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모습을 완성했다.
그 크기는 둘이었을 때보다 훨씬 컸고, 시시각각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생명이여.”
완성된 하나가 내게 말했다. 회전하는 날개와 여섯 개의 팔, 두 개의 입과 다섯의 눈, 그리고 수많은 비늘을 가진 이의 목소리였다.
“슬기로운 자들에게 축복을.”
츠츠츠.
거인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시스템 알림.
띠링.
[상태 이상 회복]
띠링. 띠링. 띠링.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헉, 대박.”
단숨에 레벨이 10이나 올라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억압의 손길 Lv. 3]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소울메이트 Lv. 2]
“드디어 올랐다.”
과거에는 스킬 레벨 업이 힘들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본 레벨을 빨리 올리는 덕분에 짧은 시간 안에 스킬 레벨 업까지 해내고 있는 것.
‘소울메이트 레벨 2면 이제 한 명 더 연결해 줄 수 있어.’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바로 옆에 던전을 클리어한 뒤 열리는 포털이 생겨 있었다.
거인은 뒤로 조금씩 물러나더니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여덟 개로 늘어난 입이 쭉 늘어나는 게 미소가 맞는다면.
“끝났다…….”
분명 헌터 자격증 과정에서 첫 던전 실습이라는 아주 가벼운 일정이었는데 이렇게 힘들고 길어지다니.
이제야 온몸에 깃든 긴장이 풀렸다.
“무와브바으바!”
“이제 좀 뱉으시지?”
헬멧을 벗듯이 도깨비불을 밀어냈더니 쑤우욱 하고 머리가 빠져나온다.
“무르르르.”
도깨비불은 쪼그라들더니, 이전보다 훨씬 작은 크기가 되어 버렸다.
“너 정체가 뭐야.”
“무앙?”
도깨비불은 칭찬받으려고 몸을 들이밀다가 멈춰 섰다.
“네가 없었으면 이 던전은 깨지도 못했어. 던전의 길도 모두 알고 있고 첫 번째 수수께끼도 네가 찾았지.”
“무, 무왕…….”
“못 알아듣는 척해도 소용없어.”
“무아앙.”
“…….”
문제는 내가 이 녀석 말을 못 알아듣는 거다.
“……너 내 편이지?”
“무앙! 무앙!”
도깨비불은 확실한 긍정의 표현을 해 왔다. 솔직히 이상한 구석이 너무 많다. 이렇게 사기 능력자인 펫이 내 펫이라고?
물론 탈것의 능력이나 강한 공격력 같은 건 없지만, 너무 요긴하게 사용되니까 뭔가 의심이 생긴달까.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달까. 하지만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초에 회귀했다는 거 자체가 엄청나게 운이 좋은 거기도 하고. 게다가 도깨비불은 귀엽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하아, 너한테 홀렸나 보다.”
괜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결과만 따지고 보면 나쁜 것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새로운 업적을 획득했다는 알림까지 뜨고 있으니까.
[업적: 486번째 수수께끼를 푼 자]
아까 받은 경험치에 업적 보상이 따로 있다니.
애초에 거인은 싸우라고 있었던 존재들도 아니었고. 물론 그걸 알아차리기 전에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수수께끼 자체도 몹시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솔직히 눈치만 빨랐다면 개꿀이었지.
“……정말이지.”
“무앙?!”
“하여튼, 너 의심스러우니까 잘해라.”
“무앙!!”
도깨비불은 억울해하는 듯 부르르 떨었다.
“고맙고.”
“……뭉!”
도깨비불은 만족한다는 듯 쪼르르 날아와 뺨에 불길을 비볐다.
차르르륵.
아이템이 인벤토리로 오는 소리가 들린다. 곧장 인벤토리를 열어 본 나는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영혼석이…… 40개.’
하급 던전을 뺑뺑 돌아야 겨우 서너 개 얻을 수 있던 영혼석이 40개나 생겼다. 이거면 부족한 체력이나 힘에 투자해도 괜찮을 수량.
돌발 상황이 벌어지긴 했어도 수수께끼를 풀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응, 개꿀이다. 개이득이다. 그냥 좋게 생각하자.
“하준아! 괜찮아?!”
아래에서 인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려다보니 10팀 팀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아, 전 괜찮아요! 팀원들은요?”
“전부 괜찮아. 조금 타박상을 입은 정도야. 낙오자도 없고.”
“그거 정말 다행이네요.”
“상태 이상도 모두 해결됐고 게다가 다들 레벨이 엄청나게 올랐어!”
선배와 팀원들이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유적의 잔해를 거쳐 천천히 다가왔다. 인화 선배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와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결이를 보자마자 사색이 됐다.
나는 선배를 안심시키려고 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괜찮아요. 그냥 방전된 거예요. 아까 보셨죠? 엄청난 벼락을 만들어 냈더라고요.”
“……두 사람이 모두를 구했어.”
“음? 글쎄요. 수수께끼는 모두 같이 풀었잖아요. 뭐, 물론 마지막에 제가 조금 이바지하긴 했지만.”
“고마워. 고생했어.”
인화 선배의 고맙다는 말에 10팀 팀원들이 하나둘씩 나를 둘러싸며 감사를 표현했다.
“하준 씨가 없었더라면 우린 다 죽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고생했어요.”
“대단해요!”
“최고!”
그때 염진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둘러싸고 있던 팀원들을 단번에 흩어지게 했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모두 제정신이 아닌 거야? 애초에 저 녀석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이전처럼 던전을 공략했다면 이런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수수께끼를 풀기로 한 건 모두가 합의한 상태에서 시작됐어요. 그때 진혁 씨도 동의하고 협조했잖아요.”
진보라가 앞으로 나서며 또박또박 말했다.
“중간에 그만두자고도 했지. 이런 위험한 일이 일어날까 봐.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일어났잖아?”
“무섭긴 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레벨이 20 가까이 올랐잖아요. 일반 던전 공략처럼 했으면 절대로 얻지 못할 보상이었어요.”
“마, 맞아요. 이 던전은 초보 각성자들이 겨우 레벨 3 정도 올릴까 말까 한 곳이라고요.”
내내 조용히 있던 윤지한도 거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자 염진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일어난 이 사건을 정부에서 알게 되어도 괜찮을까? 난 당신들 전부 감방에 보낼 거야. 알겠……?”
터억.
염진혁의 몸이 앞으로 푹 수그러졌다.
“……형?”
염진혁의 뒤로 나타난 염태규가 그의 목을 손으로 잡고 꾹 누른 것이다.
“감사합니다.”
“……! 형!!”
염진혁은 염태규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힘에서 염태규를 이길 순 없는 모양이었다.
버둥거리는 염진혁을 계속 누르면서 염태규는 90도가 넘는 정중한 인사를 했다.
“이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감사 인사다. 너와 내 목숨을 구한 사람이야. 이 사람이 우릴 구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을 거다.”
“하지만 그건 애초에……!!”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
형제 사이에서 눈빛이 오갔다. 정적이 흘렀고 염태규가 염진혁을 누르고 있던 손을 치웠다. 하지만 염진혁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조금 더 숙여 작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염진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랬다가 더 큰 앙심을 품는 거 아닌가 싶은 걱정이 되긴 하지만……. 둘 사이에 뭔가 있나 보다 싶었다. 어쨌거나 나는 염진혁보다 염태규의 반응에 매우 놀랐다.
‘회귀 전에도 저런 이미지였던가?’
내가 기억하는 염태규는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줬다고 해도 감사 인사 같은 걸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 외에도 걸핏하면 다툼이나 싸움 문제가 발생했고 그 중심에 염태규가 있었다.
오죽하면 트러블 메이커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심지어 녀석은 전과 기록까지 있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하거나 방화를 저지르거나 해서였다. 애초에 이번에도 폭력 문제를 일으켜서 두 번째 응시기도 하고.
‘양아치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막 나가는 녀석은 아닌 것 같기도…….’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염태규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시선을 피했다.
“신고하겠다면 해. 어차피 내가 알아서 제대로 보고할 생각이지만.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질 테니까.”
“하준 씨가 책임을 왜 져요!”
진보라가 흥분하며 달려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보고가 먼저인 건 맞으니까요.”
“하지만 다들 레벨도 엄청나게 오르고…….”
“그건 부수적인 문제예요.”
“우리가 하준 씨 처벌받지 않도록 탄원서를 낼게요.”
“맞아!”
“우리가 설득할게요!”
10팀 팀원들이 입을 모았다.
“어쨌든, 이제 포털이 열렸으니까 나갑시다.”
인화 선배가 나를 부축하고 강민혁이 결이를 둘러업었다.
츠츠츳.
우리를 따라 팀원들이 차례로 포털을 통과했다.
* * *
“아주 거하게 사고를 치셨습니다.”
“그런가요?”
성현준 대위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저 웃고 있는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