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제43편
성인 남자 두 명이라니.
부축해 피하느라 온몸이 뻐근하다.
고작 20살짜리들인데 엄청 무겁다. 당연히 무거운 게 맞긴 하지만.
툭.
염태규의 목덜미를 내려놓았다.
‘청력 손상 때문에 민첩 스텟이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S급만큼 올려놓은 상태라 다행이었다.’
내 민첩 스텟이 낮아진 만큼 다른 팀원들의 민첩 스텝도 떨어졌을 테니 그나마 쓸모가 있었다.
거인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염진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파편에 맞은 덕분에 기절한 상태였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니 곧 정신이 들 터.
일단 유적에서 조금 떨어졌으니 염태규가 알아서 챙길 수 있을 거다.
먼지가 걷히면서 근처에 진보라의 모습도 보인다.
‘선배는 어디 있지. 다들 흩어진 것 같은데. 게다가…… 결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아직 거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놈은 유적을 마구 박살 낸 뒤, 우리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결이 녀석도 기절했을지 몰라.’
마음이 급해졌다.
놈이 결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다면……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당하는 것이다. 결이 근처에는 10팀 팀원들도 없을 텐데.
소울메이트가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걸로 결이를 찾을 수 있다.
꽈악.
돌아서는데 염태규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뭐야?”
“왜……?”
소리는 아직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녀석이 무엇을 묻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자기를 왜 구해 줬냐는 거겠지.
지금껏 서로 사이가 안 좋았으니 말이다.
하아. 답답한 녀석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거겠지.
“뭐가 왜야. 당연한 걸 두고.”
휘익.
나는 소매를 잡아당겨 염태규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 * *
결이가 있는 방향으로 가려면 거인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아무래도 가로지르긴 어려울 것 같은데.”
놈은 살벌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들키면 완전히 곤죽이 되겠는걸.”
하지만 가야만 한다. 그때 도깨비불이 눈앞에 다가와 섰다.
“무왕!”
“진정해!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도무지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저 거인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런데 도깨비불은 내 말에도 비켜서지 않았다.
‘이 녀석, 거인이 등장했을 때부터 엄청나게 들러붙었었지. 그래……. 나도 겁나는데 너는 얼마나 겁이 나겠어.’
나는 녀석을 두 손으로 감쌌다.
“결이를 구할 수 있게 도와주라.”
“뫙!”
도깨비불 녀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자꾸 그러면 소환 해제해 버린다?!”
물론 거인을 상대하려면 절대로 돌아가게 할 수 없지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겁을 먹은 것인지 녀석이 입을 크게 벌렸다.
“응?”
뭔가 평소보다 훨씬 커다랗게 벌어지는 도깨비불의 입을 보며 이상함을 감지하는 순간, 녀석은 내 얼굴을 집어삼켰다.
“뭐야?!”
너무 놀라서 팔을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도깨비불의 불은 내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뜨겁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의 입 안에 머리가 완전히 삼켜진 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물에 잠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도깨비불은 따지자면 ‘불’이지만 말이다.
우우웅. 우오오옹.
귓바퀴가 움찔거렸다.
‘들린다?’
우글우글하게 보이는 시야 너머로 거인이 보인다.
그리고 거인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그로메데이아…….”
“어라?”
“무오옹!”
도깨비불이 요동치자 시야가 일렁였고 나는 곧장 상태 창을 확인했다.
[상태 이상: 청각 손상]
여전히 상태 이상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뭘까?
도깨비불의 능력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럼 이건, 피부로 느껴지는 건가? 아니면 이런 상태에서는 뇌파 같은 걸로 뭔가 전달이 되는 건가?’
정확히 어떤 원리로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
“그로메데이아……!!”
그저 울부짖음이라고 생각했던 건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
12장의 이야기에서 나왔던 두 신의 이름 중 하나였다.
‘설마…….’
유적과 정글 숲을 헤집으며 거인이 찾고 있는 건 우리가 아니었다.
저 거인의 반려다.
하나가 되었다가 다른 신들의 질투를 사,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신.
“하나 되게 하라.”
12장을 겹친 페이지에서 얻을 수 있었던 문장이 떠올랐다.
“그래, 이놈들은 공략하는 방법이 다른 거야. 그냥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애초에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았던 거구나!”
그렇다면 문제는 눈앞에 있는 거인이 아니라 떨어진 다른 한쪽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유적 아래에 있던 것이 나머지 하나잖아. 이런 젠장, 너무 쉽잖아?”
오른쪽과 왼쪽, 두 군데로 나누어져 있던 보스 룸. 한쪽만 공략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기에 그 누구도 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던 거다.
‘숨겨진 진짜 공략 방법이 있었던 거야. 유적에 쓰인 전설들과 던전의 구조가 들어맞잖아.’
여전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파헤치고 있는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놈은 눈이 없어. 그래서 다른 쪽을 찾지 못하는 건가.’
귀는 들리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찰나.
유적 아래에 있던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얼굴이 드러났을 때는 소리를 냈었어. 그걸 듣고 저 녀석이 이곳까지 온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걸까. 그래, 저 녀석이 유적을 부수는 바람에 다시 파묻힌 거야.’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다.
‘거인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말로 가르쳐 주면 되는 거지.’
헤르메스의 문양에 빛이 감돌고 나는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최대한 높이. 거인의 귓가에 잘 들릴 수 있도록.
“이봐!! 네 다른 짝을 찾고 있는 거지!”
말을 내뱉은 직후에 아차 싶었다. 몬스터와 말이 통할 수 있을까? 몬스터와 대화가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몬스터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녀석도 통하는 것인지 알 길은 없었다.
‘이대로 말이 안 통하면 진짜 망하는 건데.’
휘이이익!
뒤돌아 있던 거인이 팔을 뻗어 나를 움켜쥐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크윽!!”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다. 헤르메스의 신발은 발동 시간이 10초밖에 되질 않으니 대화를 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일부러 잡힌 것인데 피해야 했나 싶기도 하다. 생각보다 엄청 아프니까.
터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악을 질렀다.
“이봐! 이봐!! 날 죽이면 넌 영원히 그로메데이아를 찾을 수 없어!!”
놀랍게도 거인이 움찔거리더니 과격한 행동을 멈췄다. 그러곤 손에 들어갔던 힘도 한결 풀어졌다.
숨쉬기가 편해지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다행이었다. 거인이 내 말을 알아듣다니.
“그로……메데이아…….”
“그래, 그래. 그러니까 네 친구를 찾아…….”
파직.
순간 거인의 머리 뒤로 스파크가 튀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거대한…….
파지지지직!!
벼락.
콰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인의 머리 부분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허억!!”
솔직히 나까지도 폭발에 휘말리는 것 같아 아찔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 몸은 멀쩡했다.
“그르르…….”
솔직히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거인은 그 파괴적인 폭발에도 전혀 꿈쩍하지 않았다.
“결아!!”
폭발과 섬광의 주인을 향해 외쳤다. 하지만 마주친, 아니 내가 본 결이의 눈빛은 이미 초점이 없었다.
“그만! 결아, 그만해!!”
결이에게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 맞아. 빌어먹을 상태 이상. 결이는 아직도 상태 이상에 걸려 있는 거다.
벼락이 요동치는 검이 하늘을 가르고 다시 한번 흰 빛을 만들어 냈다.
‘너무 과해. 결이 능력을 넘어선 것 같은데?!’
눈이 존재하지 않지만, 거인은 결이의 공격을 읽은 것처럼 방어 자세를 만들어 냈다.
“다들 그만하라고!! 그로메데이아는 바로 이 아래에 있어!! 흙더미에 파묻혀 있다고!”
거의 울부짖다시피 한 외침과 동시에 거인의 동작이 멈춰 섰다.
번쩍!!
두 번째 벼락이 거인의 머리에 내리꽂히려는 순간.
거인은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더는 더듬지도 웅얼거리지도 않는 목소리였다. 무엇보다도 명확한 음성.
“그로메데이아와 만나게 해 줘.”
거인은 나머지 손으로 구름의 아들을 사용하며 점멸하는 결이를 한 번에 사로잡고서는 이미 발동되어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받아 냈다.
“유적의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파츳, 파츠츠츳!!
거인에게 대미지를 입히지 못한 벼락이 사그라들고 거인은 나를 남아 있는 유적의 기둥에 내려놓았다. 게다가 다른 손에 사로잡았던 결이를 바로 코앞에 내려놓았다.
“결아!!”
마력을 몽땅 끌어 쓴 것인지 한결이는 비틀거렸다.
그사이 거인은 아주 조심스레 유적의 잔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하준아.”
푹.
쓰러지는 결이를 받아 냈다.
“무사했구나.”
“당연하지. 소울메이트 안 끊긴 거 보고도 이 난리를 치냐.”
“죽은 줄 알았어. 저 괴물이 널 죽일까 봐.”
“……안 죽었잖냐. 너 이제 헌터도 될 건데 맨날 이럴 거냐? 앞으로 얼마나 위험한 일이 많을 건데.”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 팔을 움켜쥔 한결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헌터 같은 거 안 하면 안 돼?”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결이가 축 늘어졌다.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 버렸다.
눈앞에는 아직도 상태 이상 알림이 은은하게 떠 있다.
‘뭐야. 방금 그거 혼잣말이었어?’
머쓱해 헛웃음이 나왔다.
“젠장, 이제 슬슬 공략 끝나면 좋겠다. 죽겠네.”
나 역시 마나와 체력이 거의 바닥을 친다.
여전히 내 머리통을 감싸고 있는 도깨비불 덕분에 급하게 곤두박질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가만, 결이 녀석은 내 얼굴이 이따위인 걸 보고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한 건가?
지금 완전 불타는 대가리인데.
이쪽이 더 위험해 보이는 거 아냐?
“그로메데이아…….”
아래로는 유적의 잔해를 파헤치는 거인의 앓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갈로모데온.”
흙 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 신의 입에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신화 속의 두 신이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