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제41편
“레어 아이템이 나온다면 당연히 네가 가져야 해.”
결이가 작게 속삭였다. 염태규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안 그래도 양아치 같은 얼굴을 최대한 구기며 한 발 다가왔다.
“레어 아이템이 나오면 뭐, 그건 누가 가지는데? 수수께끼를 풀어낸 일등 공신인 당신? 그럼 뭐 해? 지금까지 시간 죽이고 있는 우리는?”
“맞아. 지금 너희 셋이 아이템을 얻어 보겠다고 시간 끌고 있는 거잖아.”
“저기 코앞에 보스 룸으로 가는 문이 있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이냐고. 진작에 클리어하고 나갔어야 하는데 말이야.”
“클리어 시간도 채점하지 않나요, 쌤?”
“방금 죽을 뻔한 건 또 어떻고?”
염태규 무리가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어린애들 같은 녀석들이 아무리 말해 봤자 열받지도 않는다.
“글쎄. 전 10팀 팀원 모두와 상의한 뒤 그 아이템에 가장 알맞은 분에게 드리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바깥에서 파티를 모집해 던전에 가도 이런 방식으로 아이템을 분배하는 경우가 흔하고요.”
흔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기본적인 활동 규칙이랄까.
이미 10년도 넘게 겪어 봐서 너무너무 잘 아는 헌터 활동이 그랬다.
길드 단위가 아닌 소규모 파티에서는 시스템이 주는 그대로 초기 파밍 아이템을 획득자가 가지도록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선으로 길드나 파티장에게 제출하고 계약대로 재분배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타인이 인벤토리를 함부로 열 수 없다고는 해도 아이템 거래 내용이나 새로운 아이템의 사용 등은 길드가 철저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중간에 가로챈다고 해도 운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애초에 길드와 계약할 때는 던전 활동으로 얻는 아이템에 관한 내용이 분명하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이미 필기 수업을 통해 배운 상태였기 때문에 염태규 무리도 모르는 정보가 아니었다.
조금 전의 위기 상황을 빌미로 약해진 팀원들의 마음을 흔들려는 얕은 술수다. 한마디로 제 뜻을 관철하기 위해 계속 어깃장을 부리는 거다.
“흥! S급이 무서워서 누가 자기가 갖고 싶다고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요. 어이가 없어서 나 원 참. 그렇죠, 형님?”
이죽거리는 염태규 무리를 저지하고 나선 건 인화 선배였다.
“그만해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이렇게 분쟁이 길어진다면 수수께끼를 다 풀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더 시간이 지체될 겁니다.”
“하! 그래서 저 답도 없는 수수께끼를 계속 푸시겠다? 우리 의견은 완전히 무시하시겠다? 10팀 팀원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팀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치사하시네요. 아하, 팀장님도 저 S급 편이다 이거죠?”
“유치하게 이러지 말아요.”
비교적 조용히 있던 염진혁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유치? 웃기시네. 애초에 처음부터 유치하게 일을 꼰 건 서 팀장님 아닌가?”
“뭐라고요?”
“그렇잖아요. 그때. 복도에서 부딪친 날부터 우리를 아니꼽게 본 거 아녜요? 그때도 본인이 먼저 부딪쳐 놓고 제대로 된 사과도 하지 않고 말이죠. 이후로 팀장이 되더니, 사사건건 우리만 차별했잖아요.”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속에 품어 두다니. 아니,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다니. 정말 어려도 너무 어리다.
차별했느냐 하면 확실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인화 선배가 염태규 무리에게 제지를 가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다 그들이 팀별 과제를 수행하는 데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흐음, 표정들이 다들.’
주변 다른 10팀 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절반 정도는 염태규 무리의 말에 휩쓸리고 있었다.
그 뭐더라, 유명한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이들을 두고 눈앞의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으면 더 많은 마시멜로를 주겠다고 하곤 혼자 두던가.
참지 못하고 먹어 버린 아이들과 끝까지 버텨 더 많은 마시멜로를 얻은 아이들이 성장한 뒤를 추적 검사했더니 참을성이 좋았던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었다나 뭐라나.
그 실험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욕망 통제보다는 두려움과 더 깊은 관계가 있겠지만 말이다.
“강사님!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이런 수수께끼는 안 풀어도 던전 공략할 수 있잖아! 우린 인제 그만 공략하고 나가고 싶다고!”
“하, 하지만…… 이건 정말 역대급 발견이란 말입니다.”
윤지한이 염진혁을 향해 비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다지 위엄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걸 굳이 지금 해야 할 이유가? 어차피 국가에서 관리하는 던전이잖아. 그럼 특수 괴물 부대에게 맡기면 되는 거 아닌가? 이걸 풀었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우릴 다 죽일 셈이냐고?”
그의 말에 윤지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실 염진혁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관리하던 던전에 이상 징후가 보였다면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윤지한은 이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던전의 비밀을 발견해 내는 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죽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아요. 애초에 이 던전은 여러분들 수준으로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는 곳이라고요. 아직 헌터 자격증도 없는 여러분을 데리고 목숨이 위험한 곳에 올 리가 없잖아요!”
“그럼 거수해서 과반수의 의견을 따르죠. 그렇게 하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현명한 것 같네요.”
당황해서 패닉에 빠지고 있는 윤지한을 대신해 인화 선배가 나섰다.
“다수결? 목숨이 달린 일인데 멍청한 놈들이 숫자만 많다고 우릴 사지로 내모는 걸 두고 볼 순 없지.”
“이대로는 답이 없어요.”
“갈라지자고.”
염진혁의 말에 윤지한이 어깨를 떨었다.
“안 됩니다! 아무리 낮은 수준의 던전이지만, 소수로 쪼개지는 건 위험해요.”
말싸움이 길어지자, 다른 팀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팀워크까지 개판이 되다니. 당연히 불안할 만하다.
하지만 나 역시 물러날 수 없다.
이 던전은 이제 다시는 못 올 던전이다. 거기서 수수께끼까지 찾아냈는데 놓칠 수 없지.
이제껏 많이 참아 줬으니까. 좀 엄해져도 괜찮겠지.
“지금 보스 룸 앞까지 와서 분란을 일으키는 건 어떤 이유에서지?”
내 말에 염진혁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 놔,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 그야 목숨이…….”
“A급 헌터가 고작 이런 수준의 던전이 두려운가?”
잔뜩 찌푸려졌던 미간이 한결 더 깊이 팼다.
“난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정말? 조금 전의 흔들림. 놀라긴 했지만,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는걸.”
물론 인화 선배의 스킬이나 더 강한 등급의 각성자들이 돋보이긴 했다. 하지만 10팀 팀원들 모두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스로 지키고 있었다.
“처음이라서 당황했을 뿐이지. 우리 10팀은 약하지 않아. 이 정도 레벨의 던전에서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고. 여기서 죽는다니. 애초에 헌터가 될 자질이 없는 거지.”
내 말에 불안해 보이던 10팀 팀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밝아진 정도가 아니다. 진하게 감동한 얼굴.
그래, 애초에 염진혁이 ‘죽는다’는 말을 꺼냈을 때부터 이건 내가 이긴 말싸움이었다.
이전에 얻었던 업적. [황천에서 돌아온] 덕분에 이런 주제의 이야기라면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쉽게 나한테 설득당하게 되거든.
업적의 효과가 잘 통했는지, 자신감 넘치게 이죽거리던 염진혁도 뭔가 속이 뒤틀려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여기서 죽을까 봐 무서운 거야?”
“그, 그건…….”
“무서운 게 아니라면 혹시 다른 사람이 좋은 아이템을 얻는 게 시기 질투가 나서?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지금까지 본인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너희들이 아이템을 얻는 걸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어.”
“그런 게…….”
염태규 무리 쪽 의견에 동조하던 10팀 팀원들의 눈초리가 슬슬 변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대화로 여론이 완전히 돌아선 거다.
“하긴, 애초에 목숨이 위험해질 던전으로 실습을 나오진 않으니까.”
“너무 큰 걱정을 했던 거야.”
“정말로 헌터가 되면 더 험한 곳에서 임무를 해야 할 텐데.”
“맞아. 겁을 너무 먹지 않으면서도 방심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가 더 집중해야지. 좀 더 집중해서 힘을 모으면 수수께끼도 비밀도 보스 룸도 단번에 공략할 수 있다고.”
팀원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는 염진혁의 귀에 닿기에 충분했다.
“쳇…….”
염진혁은 아까의 기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는 슬쩍 돌아보더니 주춤거리면서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그 꼴이 마치 개가 꼬리를 감추고 줄행랑을 치는 것 같달까. 솔직히 통쾌하다.
나머지 염태규 무리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솔직히 물리적인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업적의 효과가 상당한데?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히겠어.’
회심의 미소를 짓는데 인화 선배와 눈이 마주쳤다. 선배는 대견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선배가 나를 보며 저런 얼굴을 하게 하는 데 엄청 오래 걸렸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어.”
뭔지 모를 부채감이 느껴졌지만, 선배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 윙크했다. 그래, 아무렴 어때. 이번에는 선배를 꼭 지켜 낼 거니까.
나는 샹들리에를 올려다보았다.
“자, 이제 불을 켜 보죠.”
“불을요?”
진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8개의 숫자와 8개의 샹들리에. 쉽잖아요?”
“그럼…… 이 기호들은요?”
“그건 순서에 대한 실마리 같아요. 자 봐요.”
내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샹들리에의 가장 아랫부분에 달린 추가 있었다.
“어라! 정말…… 여기 적힌 것과 같은 기호예요! 그럼 이 기호와 숫자의 순서를 가지고 맞는 샹들리에에 대입해서…….”
“맞아요.”
나는 뒤를 슬쩍 돌아보다가 염태규에게 손짓했다.
“불을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 각성자가 필요한데.”
“뭐?”
염태규뿐만 아니라 그 무리의 얼굴이 모두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게 있나? 우린 같은 팀인데.
“이 촛불을 제대로 켜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걱정하는 목숨이 위험한 상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윽…… 그렇지만, 저 위까지는 못 닿아. 바닥에선 네가 원하는 섬세한 불 따위 사용할 수 없다고.”
천장에서부터 한참 내려온 샹들리에였지만, 그 높이가 굉장히 높았다. 그러니 아무리 A등급이라고는 하지만 레벨이 낮은 염태규가 닿지 못하는 높이. 하지만 나는 방긋 웃어 보였다.
“괜찮아. 결이가 있으니까.”
“하준아.”
내 말에 결이는 심각하게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아이씨…….”
염태규도 어쩔 수 없었다.
‘류창희 때도 생각한 거지만, 생각보다 업적 효과가 훨씬 대단한데?’
결이가 염태규를 둘러업고 구름의 아들 스킬을 이용해 단숨에 샹들리에의 위까지 이동했다.
파아아! 샹들리에마다 켜야 할 초의 개수를 고지받은 염태규가 차례로 불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 숫자에 걸맞은 초에 불이 붙은 순간.
구구구구…….
덜컹, 덜컹. 삐우우우우…….
유적 전체가 다시 한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계적인 구조물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르!! 밖에서부터 밝은 빛이 쏟아졌다.
“윽.”
“이, 이건…….”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왔던 길이 훤히 보이네요.”
무너진 벽 너머로 보이는 건 거대한 던전 내부였다. 푸르고 알록달록한 정글이. 무성한 숲이. 그리고 거의 점처럼 보이는 머나먼 반대쪽의 유적이 보였다.
“이 소리 들려요?”
10팀 팀원 중, 청력이 특출나게 뛰어난 각성자가 겁에 질린 듯 외쳤다.
“누군가, 누군가 울부짖고 있어요! 점점 더 크게!”
그 순간, 먼 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