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제31편
“하준아, 늦어서 미안해.”
미안하기는 뭐가 미안하냐고. 와 줘서 고맙다고 대답해 주고 싶지만, 혀는 아직 말썽이다. 고개조차 끄덕일 수 없다니. 꼴이 말이 아니군.
결이는 내가 숨을 쉬는지 심장이 뛰는지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내 입에 흘려 넣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시, 신태석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세요!”
신태석의 똘마니들이 냅다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상대하느라 마력과 체력을 거의 다 사용했을 테고, 그게 아니더라도 한결이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파악할 머리가 될 테니까.
결이는 똘마니들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내 상태를 살폈다. 슬슬 손끝에 감각이 돌아오는 걸 보니, 한결이가 먹인 건 해독제였나 보다.
그래, 스웜프 리치의 마비 독 정도면 그리 치명적인 독은 아니니까. 다행히 전에 쓰고 남은 해독제로 해결이 가능할 거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겨우 깜빡이자 결이가 회복 포션을 입에다 들이붓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액체가 목으로 넘어갈수록 몸속에서 활력이 돈다.
통증 역시 어느 정도 사그라들고 있다. 제일 근질거렸던 혓바닥도 부드럽게 풀렸다.
“아아, 정말 살 것 같네. 너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뭉개지는 발음으로 겨우 말하곤 씩 웃자 한결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후…… 휴우.”
뒤에서 떨고 있는 똘마니 녀석들 역시 내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겠지.
“내가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무슨, 나도 눈치 못 챘는걸.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살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말 삭신이 쑤신다.
“이제 협조할 건가?”
내 말에 똘마니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모, 목숨만 살려 주시면…… 저, 정말로 참회하면서 살겠습니다.”
“흥, 과연.”
“여, 여기 하준 님의 펫도 돌려 드리겠습니다.”
“무앙! 무아앙! 망!”
마법사가 새장의 문을 열자 도깨비불이 다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게 돌진했다.
“무아앙, 뭉! 뭉!!”
야단법석이다.
하긴 이 녀석도 얼마나 두려웠을까.
난 정말로 죽을 뻔했고 녀석도 완전히 사로잡혔었으니까. 이렇게 무력하게 당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놀랄 만도 하다.
안쓰러운 마음에 도깨비불을 쓰다듬어 줬지만, 녀석은 좀처럼 진정할 줄을 모르고 부들부들 떨며 내 목덜미에 숨으려고 했다.
“반성합니다. 한 번만 봐주십쇼. 저, 저희도 피해자입니다. 정말…… 제대로 살겠습니다!”
재미로 사람을 죽이던 녀석들이 퍽이나. 나는 시선을 돌려 신태석을 보았다.
죽었나? 역시 죽었겠지. 결이가 당장 저 똘마니 녀석들까지 죽이지 않은 게 대단하다.
“음?”
뻔뻔스러운 놈의 얼굴이나 한번 제대로 봐 두려고 다가가 쪼그려 앉았더니, 아직 신태석에게 숨이 붙어 있었다.
“살아 있네?”
내 말에 한결이가 움찔거리며 바라본다.
“하준이 네가…… 죽이면 안 된다고.”
“아.”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일러뒀던 말이 생각났다.
여차하면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한결이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 그냥 흘려들은 줄 알았는데.
‘진짜로 말을 들을 줄은……. 하기야, 지금 한결이는 21살이니까. 아직 그 선을 넘지는 않았을 때지.’
기분이 좋기도 하고, 한결이가 약간 짠하기도 했다. 내가 이미 겪은 미래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었으니까.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욱 잔인한 세상이 되니까.
지금 신태석과 똘마니 녀석들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그래서 우리는 손에 인간의 피도 많이 묻혀야 했다.
……한결이는 강하지만 착하고 여린 녀석이다. 그 모든 기억이 그 애를 갉아먹고 곪게 했다는 걸 안다.
이번에는 상처받지 않는 이 기간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은 발생하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전부…….
“잘했다, 결아.”
“……어. 응.”
나는 다시 일어서서 김두문의 상태도 확인했다. 거의 빈사 상태지만, 이 녀석도 숨이 붙어 있다.
“어이! 너희들, 형님인가 뭔가 이 쓰레기들 챙겨라.”
“예? 어, 예. 예에!!”
똘마니들이 신태석과 김두문을 둘러업었다.
“에이씨, 이놈들 때문에 이번 던전 공략은 물 건너갔네.”
“던전 공략이 문제가 아니야. 하준이 너 병원 가야 해.”
“뭐 하나 건진 것도 없는데 병원비로 돈 나가게 생겼으니까 배가 다 아프다. 하하하.”
배를 움켜쥐며 아픈 시늉을 하자 한결이가 화들짝 놀라며 굳이 부축해 댔다.
“보자. 심하게 다친 거 아니야? 하급 회복 포션으로는 내상을 치료 못 하니까.”
“아, 아니……. 그냥 하는 말이지.”
나는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배를 더 움켜쥐었다. 장이 터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얻어맞기는 했으니까.
“내가 뚫고 온 방향으로 가자. 미궁이 많이 변형되어서 저쪽이 출구가 있는 포털과 가까워.”
“그래.”
즈즈즈.
모두가 포털 밖으로 나왔을 때, 감독관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게 무슨…….”
“아, 자세한 일은 이 사람들이 설명할 겁니다.”
나는 똘마니들 쪽을 빈정거리며 바라보았고 놈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어차피 이곳에서 거짓말을 해 봤자 나와 한결이에게 죄를 전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성 대위가 보낸 우리는 모든 걸 목격했으니까.
“일단 신태석과 김두문을 병원으로…….”
응?
갑자기 머리가 띵하다.
너무 맞아서 뇌출혈이라도 일어났나? 싶은 찰나에 시선이 그대로 고꾸라졌다.
털썩.
아니, 대체 오늘 몇 번이나 땅에 얼굴 박치기를 하는 거냐고.
기껏 피부가 보들보들한 젊은 날로 돌아왔더니!
“하준아!!”
한결이의 외침이 들렸지만, 단번에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 * *
온통 어둠뿐인데 어쩐지 의식이 또렷했다.
내 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빛도 없는 곳.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은 것인지 아찔하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저승인가?
겨우 살아난 줄 알았는데.
저 멀리 작은 불빛 같은 것이 보였다.
오직 먼빛에만 의지하며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가운데 주변으로 바닥에 피어 있는 꽃이 보였다.
보랏빛의 꽃인데 종류는 잘 모르겠다.
분명 빛과 가까워졌는데 주변은 여전히 어렴풋하게 어둡다.
문.
커다란 문이 있다. 건물 2층 높이는 되나. 빛은 문의 틈새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불빛은 처음 봐. 이걸 불빛이라고 할 수 있나? 아까 빛이라고 생각했던 건 착각인가?
웅얼거려도 목소리가 울리지 않는다. 열어 보려 문을 만지지만, 거대한 문은 꿈쩍하지 않고 너머로 아주 작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
규칙적인 소리.
무슨 소리인지 가늠하는 사이에 소리는 점점 커지고 문 사이의 빛이 강렬해졌다.
* * *
삐, 삐, 삐, 삐.
느릿한 기계음이 들리고 몽롱한 정신으로 눈이 떠졌다.
흰 천장. 시선을 움직이니 링거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적당히 딱딱한 침대 위에 있는 것 같다. 병원?
띠링.
시스템의 알림이 울린다.
[업적을 획득하셨습니다.]
[업적: 황천에서 돌아온]
뭐냐, 이건. 이런 업적도 있다고?
황당하기 그지없다. 얼씨구 심지어 골드 등급의 업적이다.
애초에 이건 회귀하자마자 받아야 했던 업적 아냐?
“무앙! 무앙!!”
“하준아!”
더 고민할 시간도 없이 도깨비불이 내 기척을 알아차리곤 얼굴에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침대 곁 의자에 앉아 있던 한결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죽다가 살아났는데 업적쯤이야 나중에 확인해도 좋다.
황천에서 돌아왔다니. 진짜로 죽을 뻔했구나. 으으. 등골이 오싹하다.
“괜찮아?!”
“어…… 어떻게 된…… 거야?”
“너 쓰러졌었어. 독에 당해서.”
“독……? 그건 네가 해독제를…….”
한결이 표정이 씁쓸해졌다.
“독이 하나 더 있었어.”
“무슨…….”
“신태석의 검에 높은 랭크의 독이 묻어 있었어.”
“아아.”
방금 의식을 되찾아서 뻑뻑한 머리지만, 대충 이해가 갔다.
신태석 놈이 좋은 특성을 가진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쌔신류의 각성자가 많이 사용하는 단검에는 독 특성이 붙은 아이템이 꽤 있다.
그래, 맞아. 한결이가 나타난 후에 신태석이 날 인질로 협박하겠다고 목에 단검을 겨눴었다. 그리고 살짝 베였었지. 그때 이미 독에 당한 거다.
한결이가 내게 먹인 해독제로는 스웜프 리치의 독은 금방 해결됐지만, 신태석의 독까지는 해독하지 못했다는 거지.
그렇다곤 해도 신태석 이 자식. 진짜로 괜찮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잖아. 아무래도 던전 봉사로 빼돌린 아이템은 그런 무기를 사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던 것 같다.
“놈들이 신태석의 단검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처치가 더 늦어졌을 거야. 그럼 정말 어떻게 됐을지…….”
“아, 그렇군. 녀석들을 살려 두길 잘했는걸.”
어두워진 결이의 표정을 풀어 보려 가볍게 이야기했는데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질 않는다.
하이고, 저러다가 잘생긴 얼굴에 주름 생기겠다.
“여기는…… 그럼 한국대 병원이야?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래. 몸이 완전 찌뿌둥해.”
팔을 들어 조심스레 움직이는데 내 몸이 아닌 것 같다.
나무 인형 속에 영혼이 들어온 느낌이랄까.
“응. ……넌 일주일이나 의식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움직여야 해.”
“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확 일으키다가 한결이에게 저지당했다.
“조심하라니까. 또 다쳐.”
“아니, 일주일? 그,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던 거야?”
“그분이 아니었다면 널 구하지 못했을 수도 있어.”
“그분?”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갈게요.”
문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젊은 남성이었다.
모델처럼 큰 키에 차분한 인상, 얇은 은테 안경을 쓰고 있어 지적으로 보였다.
“안녕하세요, 은하준 씨. 의식을 찾았다고 연락받았어요. 참 다행이죠?”
“아, 안녕하세요.”
“저분이셔.”
“응?”
“널 치료해 주신 분.”
한결이가 촉촉해진 눈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90도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선생님 감사드려요.”
“아유, 뭘요.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요.”
남자는 한결이의 등을 토닥거리고는 침대로 다가왔다.
“내 이름은 류창희라고 해요. 한국대 병원 내과 전문의……고요. 몸은 어때요.”
류창희?
왠지 익숙한 이름이다. 어디서 들었더라?
“괜찮은 것 같아요. 저 일주일이나 누워 있었다고 하던데요.”
“아하, 독 자체는 까다로운 타입이 아니었는데 노출된 지 좀 오래되어서 장기들이 좀 상했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오랫동안 의식을 못 찾는 건 좀 의아하긴 했었죠. 내 스킬은 꽤 쓸 만한데 말이에요.”
그가 활짝 웃자 드디어 떠올랐다.
류창희라는 이름을 잊고 있었다니, 독 때문에 상했다는 건 분명 뇌일 거다.
류창희, 한국에 단 하나밖에 없는 S급 힐러.
회귀 전에는 단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 기회에 만나게 되다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헉. 류창희 님이라면……!!”
“하하하. 됐어요. 그냥 의사 선생님이라고 불러 줄래요? 그…… 각성자라고 불리는 건 좀 어색해서.”
류창희가 민망한 얼굴로 슬쩍 웃었다.
“사실 딱히 소질도 없고요.”
“소질이 없다뇨. S급이시라고 들었는데요.”
“아아…… 그렇긴 한데. 웃통 좀 올려 볼까요?”
류창희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내 상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부드러워서 한결이처럼 빼어난 미남은 아니지만, 잘생겼다.
역시 S급으로 각성하는 요건 중 하나인가.
유전자가 우수하면 높은 등급으로 각성하는 걸까.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사이 간단한 진료가 끝났다.
“됐어요. 건강해 보이네요. 사실 의식만 돌아오지 않아서 문제였지 신체 기능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온 걸 확인했었거든요. 혹시 모르니까, 몇 가지 검사를 더 하고 돌려보낼 거예요.”
“네!”
그 유명한 류창희와 만났다는 사실에 눈을 빛내고 있자니, 그가 민망한 듯 살풋 웃었다.
“정말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정말요?”
“그런데 제가 어쩌다가 선생님처럼 대단한 분께…….”
“아아, 현준이 만나러 갔다가요. 하준 님에 관해서 이야기하길래 지나가는 길에 노동 봉사장으로 향하던 중이었어요. 뭔가 운이 좋았죠.”
“아하, 그렇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천운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