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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한국 대표팀의 골키퍼 정성훈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상황이 마치 꿈,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허공에 몸이 붕 떠 있는 듯한 느낌. 그는 흐린 눈동자로 전광판을 응시했다.
영국 3 : 한국 0
그리고 아직 전반이 끝나지 않았다. 이제 전반 40분에 접어 드는 상황, 남은 5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영국 대표팀에서 경계해야 할 선수는 너희도 잘 알다시피 바로 이 녀석이다."
화면에 떠 오르는 한 선수의 사진,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 한 선수 중 한 명이었기에 한국 선수들도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프리미어 리그 한 시즌 역대 최다골, 챔피언스 리그 한 시즌 최다골, 유로 대회 최다골...골과 관련된 기록은 모조리 깨고 있는 녀석이지. 쉽게 이야기해서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동급이다."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수장 홍영보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할 수록 선수들의 기를 죽이는 꼴이 되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실을 바로 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울 수 없었으니 말이다.
"플레이 스타일은 전형적인 스피드, 테크니션 계열이다. 톱 스피드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순간적인 민첩성, 순발력이 말도 안되는 수준이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데, 상대 수비수들이 중심을 추스리는 사이에 연속 동작을 이어나가고 있다."
"......"
우루과이와의 조별 예선 3차전 경기 장면이었다. 순식간에 코아테스의 중심을 무너뜨리고 접고 들어가는 움직임, 테크닉이 빛을 발했다기 보다는 피지컬이 상상을 초월하는 플레이였다.
"너희들의 선배, 지승이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친구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친구니까."
한국 국적의 모든 선수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 박지승을 언급하자 선수들의 눈에 희망이 깃든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챌린지 & 커버가 완벽히 이루어 진다면 어느 정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있을거라 했다. 실제로 그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방법이라고도 했고. 하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고 한다. 수적으로 동수가 되는 순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방법이라고 했지."
"그럼 방법이 없는 것 아닙니까? 몸 싸움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하는데 우루과이와 경기를 하는 걸 보면 아예 비실이도 아닌 것 같은데요."
수비수 한 명이 한숨을 쉬며 불안을 이야기한다.
"그래. 사실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친구를 막을 방법이 없다."
덤덤히 이야기하는 감독의 모습, 한국 선수들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들로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세계 최강 레벨의 팀들도 막아 내지 못한 공격수이다. 그 팀들이 과연 조직력이 부족해서, 개인 기량이 부족해서 무너졌을까?
"그렇다면 다른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평소보다 좀 더 많이 뛰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전술판을 들어 선수들을 배치하는 감독.
"90분 내내 전력 질주를 한다는 각오로 뛰어라. 데이빗 저 친구에게는 박종욱, 그리고 오재식, 자네 둘이 붙는다. 종욱이 네가 계속해서 달려들면서 그를 귀찮게 하는거다. 재식이 자네는 박의 커버를 맡으면서 그가 쉽게 돌파하지 못하도록 공간을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만약 사이드 백이 올라와서 수적으로 동수가 된다면 사이드 백은 무시해라."
"명심해라. 사실상 수적으로 열세에 처하는 거나 다름 없다. 그만큼 활동량으로 커버해야 한다. 다들 이번 대회에 걸린 것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다."
선수들에게 가장 민감한 부분을 언급한다. 그 말에 선수들의 기세가 달라진다. 여기 모인 그 어떤 선수도 2년 동안 군대에 처박혀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선수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설명하겠다. 먼저 미드필더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해 왔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아무리 세계 최고의 선수라고 해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대표팀의 멤버들은 나름 실력이 괜찮았다.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렇지,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에 비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을지 몰랐다. 하지만 상대에게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 빅리그에서 뛰는 세계적인 선수들도 그의 발앞에 무참히 농락당해야 했으니까. 이는 한국 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 가혹했던 것 같다.
시작과 동시에 골이 들어갔다. 킥 오프 휘슬이 울렸고, 잠시 후, 갑자기 자신들의 진영에서 튀어 나온 그의 존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박종욱의 조금 안일한, 집중력이 부족한 플레이가 원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스피드와 민첩성은 보통이 아니었다.
최악의 스타트였지만 기가 죽진 않았다. 메달을 향한 한국 선수들의 의지는 보통이 아니었으니까. 선수들은 서로를 독려하며 멘탈을 수습했고 다시 한 번 차분히 경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악마, 그야말로 악마와도 같았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리고 회복한 한국 선수들에게 마치 '이래도 버틸 수 있겠어?'라고 묻는 것처럼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처음에 준비했던 전략, 전술은 5분도 되지 않아 박살이 나버렸다. 한국 팀의 두 명의 전담 마크맨은 그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못했다. 마치 제 집 드나들듯, 한국 팀의 진영을 자유롭게 오가며 마음 먹은 대로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운이 따라 주었기에 세 골 정도로 끝난 감이 있을 정도 였다.
전반 14분, 베컴의 롱 패스를 가슴으로 받아 낸 데이빗의 2차 쇼가 시작되었다. 가슴 트래핑만으로 박종욱을 제쳐 낸 데이빗은 커버 들어오는 오재식을 다시 한 번 공을 차 올림으로 따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루어진 최종 라인과의 대치 상황에서는 다니엘 스터리지와의 2 대 1 패스를 통해 간단히 무력화시키며 페널티 박스로 진입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자신은 무력했다. 애초에 일 대 일 상황은 골키퍼로서는 불가항력에 가까운 부분이다. 일 대 일 상황을 막지 못한다고 해서 골키퍼를 욕할 수 있으랴.
그렇게 해서 두 번째 골을 헌납했다. 첫 번째 실점과 달리 조금 멘탈에 타격을 받은 한국 대표팀이었다. 전반 15분도 되지 않아 2 대 0으로 점수 차가 벌어졌으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이럴 때 경험 많은, 자신을 비롯한 와일드 카드 선수들이 어린 친구들의 멘탈을 케어해 주어야 했으나 정성훈 본인부터 멘탈이 반 쯤 나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이후 흐름은 완전히 기세가 오른 영국 대표팀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세로 이어졌다. 최전방에서 데이빗이 날뛰다 보니 수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 베컴과 긱스가 패스에 전념하며 뒷받침을 제대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지컬 적인 부분이 전성기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 패싱 센스와 시야는 여전한 그들이었기에 날뛰는 데이빗에게 날개를 하나 더 달아주는 느낌이었고 그렇지않아도 고전하던 한국 대표팀은 완벽히 자신들의 진영에 틀어박힌채 일방적으로 얻어 맞아야 했다.
"젠장!!!"
치밀어오르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뒤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공을 신경질 적으로 걷어 찬다. 벌써 세 번째 흔들리는 골대였다. 한 경기에 3골을 실점해도 밤에 잠을 못 잘 판국에 전반에만, 그것도 같은 선수에게 세 골을 허용했으니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프리킥 골이군요. 전반 40분만에 이번 대회 두 번째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데이빗 장입니다.]
[대단하군요! 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이 선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죠.]
[그렇습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대회 역사상 최단 시간 해트트릭을 달성하지 않았습니까? 40분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했다면 조금 늦은 편이라고 봐야 하나요?]
완벽히 잡아낸 경기나 다름 없었기에 영국 해설자들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느긋하게 해설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이 경기는 이미 영국의 것이었다.
[사실 오른발 잡이가 시도하는, 전형적인 프리킥이었습니다. 위치와 거리, 그리고 킥의 방식까지 우리가 자주 볼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었죠.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게 막기 쉽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형적인 것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죠. 그만큼 확률이 높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멋진 궤적이었습니다. 골키퍼로서는 정말 미칠 일일겁니다. 저런 슈팅은 마치 자신의 손에서 도망가는 듯한 느낌을 주거든요.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은 것 같은데 손에 닿지 않습니다. 한국 팀의 골키퍼, 신경질적으로 공을 걷어 차 버리는 군요. 많이 화가 난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 팀의 위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그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아직 후반전이 통째로 남아 있는데다, 심지어 전반도 아직 5분이 남아 있거든요. 거기에 데이빗 장을 마크하던 두 선수가 모두 옐로우 카드를 한 장씩 받았습니다. 두 선수 중 한 명이라도 카드를 더 받게 된다면 10명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잘해 주었다."
전반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돌아 온 영국 선수들, 한국 팀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의 스코어 변동은 없었다. 전반 종료 직전, 긱스의 중거리 슈팅이 골대를 살짝 벗어나며 자칫 4 대 0으로 벌어질 뻔 하긴 했지만 말이다.
"감독님, 이 친구 오늘 완전히 미쳤는데요?"
동료들이 놀라움을 표시할 만큼, 데이빗의 활약은 오늘 특별했다. 상대의 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데이빗의 전반전 활약 장면만 모아도 적지 않은 분량의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딱 우리 팀이랑 할 때 저런 느낌이었지."
긱스가 혀를 내두르며 타올로 땀을 닦는다.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팀이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긱스, 베컴은 알만 하다며 씩 웃음을 짓는다.
"종 잡을 수 없는 녀석이야. 딱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거든? 근데 시합에 들어가니까 완전히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날뛰는데..."
"저런 녀석을 매 시즌 기본적으로 두 번, 재수 없으면 세 네 번씩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봐."
"저런."
"이왕이면 20회 우승은 채우고 은퇴하고 싶은데 쉽지 않아 보여."
"엄살은."
"진짜야."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휴식을 즐기는 두 노장, 앞선에서 데이빗이 워낙 상대를 헤집고 다녔기에 체력적인 부담도 적었다.
"데이빗, 몸은 좀 어떤가?"
"아, 문제 없어요. 팀에 합류한 이후 최고로 좋은 것 같네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자신감이 넘쳤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피어스 감독이 그의 의중을 물어 온다.
"전반에만 해트트릭이라니, 엄청난 일이지만 자네가 하니 그냥 당연한 일인 것 같군. 나도 참 현실감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곤란하네. 그래서 말인데, 이번 경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어떻겠나?"
평소라면 감독의 말에 별 말 없이 수긍하고 교체 지시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빗은 오늘만큼은 이렇게 일찍 경기장을 나오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좀 더 뛰게 해 줄 수 없나요? 전반만 뛰고 나오자니 너무 아쉬워서 말이에요."
쾌활한 어조로, 감독이 기분나쁘지 않게 말한다. 감독이 자신을 배려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 것처럼, 아무리 슈퍼스타라고 해도 감독과 대립하는 부분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피어스 감독은 너털 웃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 될건 없지. 그런데 세 골이나 넣고도 아직 부족한가?"
"벌어 둘 수 있을 때 바짝 벌어야죠."
오늘 날을 잡은 것 같다며 어깨를 으쓱하는 데이빗, 그 모습에 피어스 감독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한 마디 더 붙이며 제한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후반에도 나가서 날뛰고 오게나. 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풀 타임 출전은 좀 참아주게나. 준결승, 그리고 결승에서도 자네의 힘이 필요해. 오늘 모든걸 쏟아 부어서야 곤란하지."
"알겠습니다."
이왕이면 풀 타임을 뛰고 싶었지만 자신의 욕심만을 채울 수는 없었기에 순순히 수긍하고 한 발 물러선다. 아마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짧게는 20분, 길어도 30분을 넘지 않으리라.
'딱히 몇 골을 더 넣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한국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리라. 데이빗은 기분 좋게 웃으며 신발끈을 고쳐 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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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 해트트릭했으면 좀 꺼ㅈ..
-데이빗: I'm still hung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