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Answer-306화 (306/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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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초췌한 안색, 아니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다. 메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어쩔 수 없어. 비겁하지만...이게 최선이야."

"비겁하지 않아! 비겁한 건 책임지지도 않고 도망가버린 그 망할 한국놈이라고!"

격하게 소리치는 친구의 모습에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어쩔 수 없잖아. 사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어. 너무 달콤한 이야기였으니까. 내 인생에 그런 행운이 올리가 없지."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그러니까 메리,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너에게는 너의 가족이 있고 너의 인생이 있잖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메리의 말문이 막힌다. 몇 차례나 입술을 달싹이던 메리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가 네 아이를..."

"메리."

조용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의 모습에 메리가 움찔한다.

"네 마음은 고마워. 하지만 너의 남편은, 네 가족들은 동의하지 않는 일이잖아."

"......"

"아이를 버리고 온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그래도 내 아이가 그런 눈치를 보며 자라고 싶게 하지 않아. 하하, 생각해 보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레이스..."

"아 그래도 너희 가족이 불행해지지 않길 바라는 것도 진심이야. 너에게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래도...마지막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쓸쓸히 말을 흐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그레이스. 잉글랜드 날씨답지 않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맑은 날, 그레이스는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받아 줄래?"

건네는 것은 한 장의 사진, 사진 속에는 그레이스가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안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호의를 거절한 주제에 미련을 남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혹시...혹시 나중에 너에게 여유가 생기거나, 기회가 닿는다면...이 아이를 한 번 봐주지 않을래?"

"...그렇게 할게. 반드시 그렇게 할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사진을 받아 드는 메리, 그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고마워. 너라면 그렇게 이야기해 줄 거라 믿었어."

"언제가 될지라도, 꼭 네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할 게. 네 엄마는 널 버린게 아니라고. 정말 마지막까지 널 생각하고...네가 행복하길 바랬다고 말야..."

"그러지마 메리."

어느새 그레이스의 목소리도 젖어 든다.

"난 내 아이를 버린 엄마야. 마지막까지 책임지지 못한...엄마의 자격도 없는 사람...그러니까 내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끝내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눈가를 훔치며 격해진 감정을 추스리는 그레이스.

"그저...그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확인해 주기만 하면 돼. 그거면 정말 충분할 것 같아."

"...그레이스..."

"버리고 온 주제에 행복하길 바라는 건 정말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소리지만, 그래도...그렇게 되길 바랄 수 밖에 없네."

"꼭...그렇게 될 거야. 네가 불운했던 만큼, 네 아이는 정말 행복한 삶을 살 거라고."

"고마워.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내 인생의 얼마 되지 않는 행운은 널 만난거야."

점점 목소리가 잦아 들어간다. 병이 이미 몸 전체에 퍼져 버렸기에 더 이상 버티는 것이 힘든 상황, 메리는 직감적으로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곤하네. 좀 쉬어도 될까."

"...그래. 자고 일어나면 한결 괜찮아 질거야."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 시간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혹시나 하는 미련, 그리고 마지막 가는 길이 편안하길 바라는 배려였다.

"그 아이...많이 원망하겠지?"

"그렇지 않을 거야."

"엄마가 누군지, 아빠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따뜻한 정을 받아 보지도 못하고..."

"분명 좋은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생길거야."

"...그래도...그 아이가 자라는 것을 지켜주고...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흑..."

끝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메리, 그레이스는 가냘픈 손을 들어 친구의 손을 잡는다.

"미안해. 마지막까지 너에게..."

"미안해 하지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 질거야. 그리고 네가 직접 그 모습을 보면 되잖아."

"그렇겠지...?"

점점 눈이 감겨 오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대답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졸려 메리. 나 좀 자야할 것 같아."

"...그래. 잘 자. 좋은 꿈을 꾸고, 일어 나면 네가 바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꼭 그렇게 되겠지...?"

"그럼! 분명히...분명히 그렇게 될 거야."

"다행..."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잦아드는 목소리, 그리고 스르륵 눈이 감긴다.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메리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진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얼굴, 하지만 너무나 조용했다. 메리는 눈물을 흘리며 긴 잠에 빠진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메리에게 들은 이야기는 데이빗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저,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들이 경제적인 사정 등으로 자신을 버렸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누군지 모른다구요?"

"...네, 그저 한국 국적의, 그러니까 그레이스의 부모님들이 온 나라 사람들이라고 했던 것 밖에 몰라요. 그는..."

"...길에서 생활하던 그녀를 만나서 같이 살자고 이야기했고, 거기에 넘어갔다는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그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싫증이 났기 때문인지, 약속을 뒤집어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고요."

"...네, 제가 듣기로는..."

메리의 대답에 데이빗은 눈을 감으며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차라리 지금 자신의 부모라는 작자가 잘 살고 있길 바랬다. 그래서 마음껏 원망할 수 있었다면, 그럴 수 있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되자 차마 욕하기가 힘들었다. 최소한 어머니라고 이야기하는, 그레이스 장에 대해서는 그랬다.

"...그랬군요."

메리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줄 테니 어떠한 대가를 달라는 식의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언론에 이야기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옛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동안 제가 데이빗 장 선수를 찾을 만한 여유가 나지 않았어요. 저도 그리 여유가 있는 삶을 사는 건 아니었고...남편과의 관계도 생각을 해야 했거든요..."

"...메리 씨를 원망하진 않아요. 메리 씨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었구요."

"조금 여유가 생긴 뒤에 찾으려고 노력해 봤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던 것 같았어요. 리버풀에 있는 모든 고아원을 찾아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당신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들은 모두 모른다는 말만 할 뿐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어요."

"...그럴거에요. 저는 도망치듯이 그곳을 떠났으니까. 제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지금은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쓰게 웃었다. 이제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거듭난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만약 자신이 고아원에 있을 때 좀 더 자신에게 잘 대해줬으면 하는 후회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리라.

"아무튼, 저는 당신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어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 졌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데이빗 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양계의 청년이 리버풀 FC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혹시나 하고 생각했어요."

"......"

"사실 당신이 진짜 그레이스의...아들...이라는 사실이라고 확신하긴 힘들었어요. 데이빗이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고, 장이라는 성 역시 한국계, 혹은 중국계의 사람들 중에서 흔한 성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그런가요?"

"네, 그래서 확신하는 건 어려웠어요. 그렇다고해서 일면식도 없는 제가 당신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죠. 예전에 비해 여유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리버풀의 경기를 직접 찾아 다니며 볼 만큼 여유가 넘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메리, 데이빗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서 이번에 제 집을 관리하는 일에 지원하셨군요?"

"맞아요. 사실 일 거리를 찾아야하기도 했지만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친구와의 약속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

말을 하며 슬쩍 데이빗의 눈치를 살피는 메리, 하지만 데이빗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에게 지금 메리가 어떤 생각으로 이 일에 지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이걸 빌미로 어떤 대가를 요구할 생각도 없어요. 언론에도 절대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요. 원한다면 서약을 받아도 좋아요."

"메리 씨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게 아닙니다. 다만...제가 아직 이 모든 것을 받아 들일만한 준비가 안 되어 있네요. 그건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덤덤히 이야기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메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데이빗의 반응은 어찌보면 아주 침착한 수준이었다.

"일단 어려운 이야기였을텐데, 솔직하게 말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데이빗 장 선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나 않았을까..."

"괜찮아요.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내는 것보다는...확실히 알고 지나가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그게 제 일이라면 더욱..."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간다. 그리고 잠시동안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데이빗이 입을 열었다.

"그럼...그레이스 장은...그녀는 지금 어디에..."

"...큰 묘지를 가질만큼의 여유는 없었어요. 그녀는 스미스다운 로드 근처에 있는 공원 묘지에 안치 되었어요."

"...그쪽에 분명...톡테스 공원 묘지가..."

"맞아요. 거기에 있어요."

"그렇군요..."

조금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며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는 그에게 한 번 찾아가 보겠냐고 권유하려다 참았다. 그것은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데이빗이 결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의 묘지는, 잘 관리되고 있나요?"

"제가 매년 한 번은 찾아가고 있어요. 물론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최선을 다했다는 건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고마워요."

어렵사리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는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날은, 언제 인가요?"

"5월, 5월이에요. 화창한 날이었어요. 5월 15일, 그 날이 그녀의 기일이에요."

"제 생일보다 일주일 빠르네요..."

쓸쓸히 중얼거리는 데이빗, 메리 역시 조금 물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당신의 생일을, 두 살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어요.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하다 못해 두 번째 생일 만이라도 함께 하고 싶어 했어요."

"......"

"그래도, 지금은 분명 만족하고 있을 거에요. 그녀의 바람대로,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그게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었으니까..."

마지막을 흐리는 메리의 말에 데이빗은 눈을 감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대로 눈을 뜨고 있었다가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을 테니까.

"오늘 이야기를 들어 주어서 고마워요. 혹시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아뇨, 충분한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갈라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다. 메리 또한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의 손을 잡아 간다.

"데이빗 장 선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저는 잘 몰라요. 그저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일이니까요. 하지만...그레이스를...그녀를 너무 원망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욕심이자...무례한 부탁이에요. 그녀는 마지막까지 당신을 포기하려하지 않았어요. 그건 정말 사실이에요."

"......"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데이빗 선수도 오늘 쉬면서,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현관으로 향한다. 데이빗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배웅했다.

"그럼..."

"다음에...또 오세요. 그때는 좀 더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얼마든지요. 저야말로 바라는 일이에요. 오늘 드디어 무거운 짐을 하나 벗을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야기를 해 줘서. 그리고...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봐 주어서..."

눈을 바닥에 둔 채 이야기하는 데이빗의 모습에 메리가 살짝 그를 끌어 안는다. 마치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안아주며 그를 다독였다.

"나야 말로 고마워요. 그렇게 이야기해줘서...오늘 그녀를 찾아갈 거에요, 그리고...그녀에게 말할 거에요. 너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너의 아들은 누구보다 멋지게 자랐고,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에요."

"그래요...그럼 다음에 또..."

============================ 작품 후기 ============================

-저도 지금 파트가 상당히 쓰기 힘든 건 사실이네요

-아무래도 지금 제 글의 분위기와는 아주 상반된 분위기다 보니 더욱 그러네요

-그래도 처음 글을 구상할 때 잡아 놓았던 이야기였으니 안 쓰고 넘어갈 수는 없었어요

-어떤 분은 지나치게 아침드라마 같은 이야기라고,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제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경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난하게, 같은 부분만을 쓰다보면 발전이 없겠지요

-열심히 써보고, 그에 대한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을 듣는 것 만큼 작가에게 큰 경험은 없을테니까요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 보면 나중에는 좀 더 매끄럽게,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럼 즐겁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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