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Answer-290화 (29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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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되게 점잖네.'

필립 람과의 짧은 대화를 마친 데이빗의 감상이었다. 보통 수비수들은 공격수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기 위해 트래쉬 토크를 자주 시도한다. 공격수가 평정을 잃을 수록 그들이 막아 내기 더 수월해 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필립 람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물론 은근 슬쩍 몸을 부딪히거나 발을 건드리는 등의 신경전은 있었다. 사실 팬들 입장에서야 신경전이라고 하겠지만 선수들 사이에서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히 있는 일인지라 그다지 자극 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필립 람의 지시로 슈멜처가 공격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조치가 곧바로 잉글랜드의 위기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슈멜처가 훌륭한 선수임에는 분명했지만 필립 람처럼 미드필더 뺨칠 만큼의 공격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패스 기점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잉글랜드에게 부담이었지만 이미 스페인과의 평가전을 통해 이보다 더 한 상황을 겪어 본 잉글랜드 선수들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스티븐 제라드가 공을 끊어 냅니다. 그리고 곧바로 스콧  파커에게 연결해 주고, 파커는 다시 제임스 밀너를 향해 밀어 줍니다.]

[속공으로 이어나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좋은 플레이입니다. 독일 선수들의 패스 워크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잘 지키고 있네요.]

[지난 월드컵에서는 독일의 2선 공격수들의 패스 & 무브, 뒷 공간을 파고드는 플레이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너졌던 잉글랜드였습니다만 오늘은 다르군요. 확실히 단단한 모습입니다. 제임스 밀너가 무리하지 않고 다시 공을 뒤로 내줍니다. 그렇죠. 지금은 일단 패스를 돌리며 리듬을 끌어 올려야 합니다.]

오랜만에 잉글랜드가 공을 소유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음 같아서야 제라드가 공을 잘라 냈을 때 바로 속공으로 나서고 싶었지만 롱 패스에 일가견이 있는 제라드가 슬라이딩을 하며 공을 잘라 냈기에 무리가 있었다. 스콧 파커는 그런 패스를 전개하는 능력이 조금 부족했고 안전하게 사이드로 공을 밀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제임스 밀너의 패싱력은 준수했지만 그때는 이미 상대가 전열을 정비한 뒤였고 말이다.

"넌 기다려. 내가 연결해 줄게."

루니가 데이빗에게 이야기하고 공격형 미드필더들이 보통 자리하는 위치까지 내려갔다. 원래 최전방 원톱 스타일이라기보다 섀도우 스트라이커, 미드필더에 가까운 포워드에 잘 어울리는 루니였기에 이런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대표팀에서는 데이빗이 그런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데이빗의 힘을 온전히 득점에만 집중하게 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진 상태였다.

루니가 조금 내려가서 공을 이어 받아 주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가 조금씩 라인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루니의 연계 플레이 능력이야 잉글랜드 내에서, 아니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준이었으니까. 간결하게 공을 배분하고 움직이는 루니의 움직임은 잉글랜드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데이빗!"

루니가 짧게 내준 패스를 지체 없이 전방으로 깔아 차는 제라드, 데이빗은 필립 람을 등지고 있는 상태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뒤에서 미는 힘에 저항한다. 마치 대형 스트라이커들이 자주 보여주는 움직임처럼, 버티려는 듯한 모습, 하지만 데이빗의 선택은 원터치 플레이였다. 미련 없이 공을 다시 돌려 보내는 데이빗, 그리고 그 공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웨인 루니가 있었다.

쾅!!

발 등에 제대로 걸린 슈팅이었다. 달리던 탄력까지 그대로 살린 파워풀한 슈팅은 코스도 괜찮았다. 하지만 마누엘 노이어의 말도 안되는 반사 신경이 독일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소위 야신 사각지대라고 말하는 코스였다. 골키퍼가 가장 막기 어렵다는 그곳을 향해 쏘아진 강력한 슈팅을 몸을 날려 펀칭해 내는 모습에 골을 예감했던 루니가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씨발! 저걸 막냐!"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슈팅이 날아가는 동안 골 세레모니를 어떻게 할 지 고민해도 될 정도였다. 그만큼 제대로 걸린 슈팅이었는데 노이어의 말도 안되는 선방으로 한 골을 도둑맞은 셈이 되어 버렸다.

"아까웠어! 좋은 슈팅이었어 웨인!"

제라드가 크게 독려하며 물러서는 모습이다. 루니는 허탈한지 아직까지 아쉬움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 것처럼 보였다. 데이빗도 그를 향해 엄지를 들어 올리며 위로했다. 방금은 노이어의 미친 플레이였을 뿐이지 루니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 한 경기 내내 저런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겠어?"

한 두 번의 선방 정도로 흔들릴 필요는 없었다. 아직 시간은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데이빗은 자신이 별 생각 없이 중얼거렸던 이 말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또 막아 냅니다! 노이어 골키퍼! 도대체 이게 몇 번 째인가요?!]

[전반 종료 직전, 데이빗 장이 근거리에서 날린 슈팅 마저 막아 냅니다! 그리고 재차 이어진 루니의 슈팅까지 발을 뻗어 튕겨 내는 군요! 오! 마이! 갓! 이 선수가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죠?]

[노이어 선수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지금 스코어는 0 대 0 이 아니라, 3 대 0 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골키퍼가 이렇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기도 보기 힘든데요, 대단합니다!]

[잉글랜드의 조 하트 골키퍼도 몇 차례 괜찮은 선방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노이어 선수의 오늘 존재감은 다릅니다. 정말 엄청나네요!]

'마누엘 녀석이 아니었으면 정말...'

전반 종료 휘슬이 울리고 라커룸으로 향하며 필립 람은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경기 전, 눈이 빠지도록 상대에 대해 분석했다. 조그마한 약점이라도 없을까, 혹은 알려지지 않은 버릇이라도 있을까 싶어 몇 번이고 돌려 보고 또 돌려 보았다. 하지만 긴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아니, 보면 볼 수록 암담했다.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선수였다. 그래도 자신이라면, 그리고 독일을 대표하는 동료들이라면 어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람은 지난 커리어를 통틀어, 상대 팀의 에이스 급 선수들을 훌륭히 봉쇄해 낸 경험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자신의 수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데이빗은 너무나 손쉽게 자신들의 라인을 찢어 발겼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심정이 이럴까 싶었다. 드리블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막을 수 없었다. 패스를 커트하기 위해 발을 뻗어 보면 간 발의 차이로 모자랐다. 한 두 번이면 모르겠으나 전반 내내 그런 상황을 겪다보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으로서는 저 선수를 도저히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몇 년만 젊었어도...아니 이것도 의미 없는 소리겠지.'

이제 30에 가까워진 나이였지만 신체 능력이 크게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만큼 경력이 쌓이며 더 노련해졌기에 지금 막지 못한다는 것은 예전이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었으니 무의미했고 말이다.

"수고했어 마누엘.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서 미안한 마음을 담아 노이어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람이다. 노이어는 씩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하이 파이브를 하자는 신호에 람이 힘없이 웃으며 손을 맞댄다.

"괜찮아. 이 정도야 가뿐하지."

자신감을 보이는 모습, 되려 할 말이 없어졌다.

"후반에는 어떻게 해서든 방해해 볼게. 이대로 민폐만 끼치다 끝나면 잠도 못잘 것 같아."

"기대할게. 카드는 조심하고. 저 녀석 막다가 카드 받는 사람들이 아주 수두룩하던데."

"카드 안 받으면서 수비하는 건 자신 있지만...저 친구를 상대로는 장담 못하겠네."

지금 껏 수백 경기를 치르면서도 단 한 번의 레드카드를 받아 본 적이 없는 람이었다. 그런 만큼 퇴장 당하는 사태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옐로우 카드 정도는 각오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마지막에는 넣어야 했어. 그건 성공시켜야 하는 찬스였다고."

카펠로 감독은 전반 마지막에 펼쳐진 플레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데이빗은 수건을 뒤집어 쓰고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입을 연다면 도저히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서 였다.

'젠장, 누가 넣기 싫어서 안 넣었나. 상대 골키퍼의 미친 퍼포먼스를 봤으면서 저런 소리를 해?'

딱히 안일한 슈팅을 날린 것도 아니었다. 이미 수 차례에 걸쳐 노이어의 선방 쇼를 지켜 보았기에 나름 회심의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까지 막아내는 상대 골키퍼를 칭찬해야지 왜 자신에게 이런 싫은 소리를 늘어 놓는지 모르겠다며 내심 혀를 찼다.

"왜 우리한테 그러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전반을 봤으면 알 거 아닙니까? 상대 골키퍼가 미쳐 버린 게 우리 책임이라고 할 겁니까?"

하지만 루니는 가만히 듣고 있지 못했다. 안 그래도 카펠로 감독과는 그리 좋은 감정 상태가 아니었는데 오늘도 이런 소리를 들으니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상대 골키퍼가 괜찮은 컨디션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자네들의 실력이 형편 없다는 말인가?"

냉정하게 독설을 날리는 모습, 루니는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쉬고 표정을 구긴 채 말을 이었다.

"경기를 보긴 한 겁니까? 나나 데이빗이 날린 슈팅 중에 골키퍼 정면으로 간 슈팅이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그렇게 봤다면 안과를 가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경을 다시 맞추셔야 할 거 같은데?"

"지금 뭐라고 했나?"

분위기가 살벌해 지기 시작하자 주변 동료들과 코치들이 나서서 둘 사이를 말린다.

"웨인! 감독님께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 너무 흥분했어."

"흥분? 내가 무슨 흥분을 했다고 그럽니까? 지금 사람을 무시한게 누군데?"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지나쳐."

"감독님도 진정하시죠. 사실 노이어가 워낙 잘한 것도 사실이잖습니까? 웨인도 약이 올라서 날카로워진 상태다 보니 말이 좀 심하게 나온 겁니다."

선수들과 코치들의 만류로 간신히 조금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루니는 아예 보기도 싫다는 듯 구석으로 가서 데이빗처럼 수건을 뒤집어 쓰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노려보는 카펠로 감독, 마음 같아서야 저 건방진 녀석을 교체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루니를 빼면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었다. 만약 그를 빼고 경기를 이긴다면 모르되, 경기를 진다면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건 아무리 경험 많고 명성 높은 자신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후반전의 전술에 대해 설명하지. 다들 집중하도록."

"괜찮아요 웨인?"

"난 괜찮아.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감히 누굴 얕봐?"

라커룸 대화는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다. 분위기가 개판인 상태로 경기에 나가게 되면 필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를 우려한 제라드와 다른 베테랑 선수들, 그리고 코치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끌어 올렸고 대화를 마칠 때 쯤에는 어느 정도 평소와 비슷한 분위기를 되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복도에서 루니가 다른 선수들에게 분위기를 해쳐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후반에는 반드시 골을 넣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선수들도 루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경기에 뛰는 선수들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그들은 루니와 데이빗이 평소처럼 잘 해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게 되니 열받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루니가 먼저 선수들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선수들의 기분이 나쁠리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시원했어요. 난 듣기 싫어서 그냥 눈 감고 있었는데."

센터 서클에 이르러서야 좀 전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이빗, 루니는 개의치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라커룸에서 선수와 감독이 언쟁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넌 아직 그런 이야기하기에 좀 경력이 부족하니까. 이런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베테랑이 나서는 게 맞아. 너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거야."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한 마디 덧 붙였다.

"감독하고 대립하는 건 나도 달갑지 않아.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으면 무시한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예전에 존이 감독하고 싸울 때에 비하면 이건 안부 인사를 나눈 수준이지."

그 말에 데이빗은 씩 웃었다. 사실 리버풀에서도 몇 몇의 선수는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들과 달글리시 감독간의 갈등을 본 것도 있고 들은 것도 있는 터라 방금 전의 상황이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겠죠. 아무튼 빨리 저 말 많은 양반의 입을 닥치게 하고 싶네요. 상대 골키퍼가 좀 협조를 해줘야 할 텐데."

"그래. 후딱 골을 넣어 버리자고. 협조는 기대 안해. 원래 강제로 하는 게 제일 재밌는 법이거든."

"...어째 범죄자가 할 법한 대사인 건 기분 탓이겠죠?"

"공격수는 원래 다 도둑에 강도 놈이거든. 남들이 소중히 지키는 걸 밟아 버리잖아?"

"...부정할 수 없네요. 근데 그렇게 되니 왠지 우리가 악당 같은데요?"

"의적 정도로 해두자. 독일의 곳간을 약탈해서 잉글랜드 국민들을 살 찌우리라. 캬, 멋진데?"

자신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지 스스로 말하고 감탄사를 흘리는 루니였다. 데이빗은 피식 웃으며 의식적으로 그에게 맞춰 주었다.

"우리는 잉글랜드니까 해적으로 하죠. 선장님, 그럼 가실까요?"

"오 좋아! 뭘 좀 알잖아? 자, 그럼 전반에 털어 먹지 못한 것까지 신나게 털어 보자고."

============================ 작품 후기 ============================

-승선을 준비하라

-혀어어어어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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