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9 =========================================================================
"참 감독도 못할 짓인거 같아."
지난 AC 밀란과의 1차전을 치른 뒤, 언론으로부터 열심히 까임의 대상이 된 데이빗이다. 물론 평소처럼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결국 네스타를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겨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 아쉬워했을 뿐. 사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아쉬움 정도가 아니라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데이빗은 그때 라커룸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콰앙-
풀 타임을 치른 경기, 패배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자신만 평소처럼 했다면 분명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메시도 막아낸 선수라고, 전성기때에는 그와 비견될만한 선수가 몇 없었다는 위대한 선수라고는 알고 있었다. 그를 뚫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기 보다는 스스로에게 화가 났고 결국 그 분노를 라커에 대고 풀게 된 데이빗이었다. 축구화를 강하게 집어 던져버리는 데이빗의 모습에 다른 동료들이 놀라서 쳐다볼 정도였다.
사실 데이빗이 이렇게 라커룸에서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동안 본인 스스로 워낙 잘하기도 했고 다른 동료들의 실수를 지적하기에는 그의 경력이 너무 짧았다. 딱히 앞장 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랬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진정해라."
가장 먼저 캡틴 제라드가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간다. 욱한 마음에 주먹으로 라커를 갈기려던 데이빗이 움찔하며 동작을 멈춘다. 언제나 유쾌한 부주장 제이미 캐러거도 나섰다.
"누가보면 우리 경기에서 쳐 발린 줄 알겠다. 진정해 임마."
그제서야 머리에서 열이 좀 빠지는 지, 조금 진정된 눈으로 주변을 둘러 보는 데이빗이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놀라운 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괜시리 민망한 기분이 드는 데이빗이다.
사실 라커룸에서 축구화를 집어 던지거나, 발로 라커를 걷어 차는 정도의 행위는 아주 흔한 일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 다면 경기가 조금 풀리지 않는 날이면 늘 볼 수 있는 장면 중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리버풀의 선수들이 놀라는 이유는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한 인물때문이었다.
"너 이렇게 성질내는 건 처음 보네."
수아레즈가 신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매 경기에서 승리하길 바라는, 팀 내 승부욕 제 1인자로 꼽히는 수아레즈는 오늘 승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굉장히 언짢은 상태였다. 그런데 자신이 성질을 내기 전에, 평소 순둥이에 가까웠던 데이빗이 라커에 신발을 집어 던져 버리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기분을 잊어 버릴 만큼 놀라움을 느꼈다.
"그러게 말이야. 어휴, 우리 꼬맹이 많이 성질 났나 보네?"
디르크 카윗도 휘파람을 불며 합세한다. 데이빗은 어린애 취급하는 카윗의 모습에 발끈했지만 반박하진 않았다. 그때 뒤늦게 라커룸으로 돌아온 달글리시 감독이 상황을 묻는다.
"무슨 일인가?"
혹시 선수들끼리 싸움이라도 한 것이 아닌지 굳은 표정으로 살피는 감독, 제라드가 대표로 나서서 별일 아니라고 이야기하자 조금 표정을 풀 수 있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뭔가 어색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해야겠다는 듯 시선을 이리 저리 돌려본다. 제라드와 데이빗을 제외한 선수들이 그들을 둘러싸듯 한 발 물러서 있는 모습을 보고 내심 고개를 갸웃하는 달글리시 감독.
'설마 둘이 싸웠을리는 없을텐데.'
팀 내에서 어떤 선수와도 불화를 일으키지 않은 두 선수였다. 특히 제라드는 캡틴으로서 싸움을 말리면 말렸지 그가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거나 싸움을 하는 일은 없는 선수였기에 두 선수가 싸웠다는 가정은 머리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보니 데이빗이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않은 모습이 눈에 들어 왔고 그의 축구화가 라커 앞에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굴러다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하, 저 녀석, 지 분에 못 이겨서 성질을 냈나 보군.'
워낙 경험이 많다보니 주변 상황만으로도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던 달글리시 감독이다. 그는 내심 혀를 차며 데이빗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분했나?"
서론을 떼고 직접 본론을 찌르는 감독의 모습에 데이빗이 잠시 움찔한다. 하지만 숨길 생각은 없었는 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달글리시 감독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딱히 동료에게 성질을 부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모습 정도야 나쁠 것도 없지.'
자신에 대한 자존감, 실력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이런 모습이 나오기 힘들기에 달글리시 감독은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그를 달랜다. 큰 사고를 쳤다면 엄하게 질책하고 징계까지 생각하겠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오늘 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나. 다음 경기가 남아 있는데 말이야. 설마 자네 다음 경기에서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감독의 말에 그럴리 없다며 강하게 고개를 흔드는 데이빗이다. 그 모습에 달글리시 감독이 좀 더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단지 오늘 자네가 골을 못 넣어서? 이봐, 감독된 입장에서 이런말 하긴 그렇지만 자네는 이미 이번 시즌에 넣어 줄 골을 다 넣어준 거나 다름 없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시즌, 총 30경기에 출장하여 34골 10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는 데이빗이었다. 리그에서만 27골, 챔피언스리그에서 7골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공격수, 아니 S급 선수들이 한 시즌을 풀로 뛰며 기록할 만한 골을 2월 중에 기록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감독의 모습에 데이빗은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쨌거나 이기지 못한 경기에서, 그것도 자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경기에서 이런 말을 듣자니 낯이 간지러웠다.
"아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골을 넣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 내 말은 너무 부담갖지 말라는 거야. 메시나 호날두, 그리고 예전의 펠레나 마라도나 같은 선수들도 모든 경기를 지배하지는 못했어. 다음 경기에서 잘하면 되니 너무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가슴으로 완전히 납득된 것은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감독이 나서서 저렇게 이야기하는데 계속 꽁해 있을 수는 없었다. 데이빗은 안색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에리카의 모습에 데이빗은 황급히 상념을 정리했다. 이미 딴 생각을 하고 있음을 들켰기에 순순히 사과를 건넨다.
"미안,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 뭐라고 했어?"
"......"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에 에리카는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기더니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저기 뉴스보고 있었잖아. 저거보고 감독도 참 힘들겠다고 얘기했는데..."
시선을 돌리니 TV에서 AC 밀란의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의 인터뷰가 끝나고 패널들의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계기는 리버풀과의 챔피언스 리그 2차전을 앞두고 치러진 리그 경기에서 주전들의 체력 안배를 해주지 못했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지난 박싱 데이 일정을 치르며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일정을 치르는 리버풀의 경우, AC 밀란과의 1차전 이후 일주일간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챔피언스 리그 경기 이후 3일 뒤에 에버튼과의 리그 전을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반면 밀란은 리버풀과의 1차전 이후 중간에 리그 경기가 하나 껴 있는 일정이었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노인정 소리를 듣는 밀란인데 체력 안배를 제대로 해주기 힘들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난 1차전, 데이빗을 완벽할 정도로 셧 아웃 시켰던 베테랑 수비수 알레산드로 네스타가 리그 전을 치르던 도중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밀란의 감독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 감독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었던 것.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저 팀이 리그를 포기할 상황도 아니고..."
데이빗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현재 밀란은 1위 유벤투스를 승점 2점차이로 쫓고 있는 상황, 그랬기에 알레그리 감독의 결정이 이해가 간다며 데이빗은 되려 토론을 벌이고 있는 패널들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 보았다. 그로서는 이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 지 알 수 없었다. 챔피언스 리그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팀들이 가장 우선시 하는 것은 자국 리그의 성적이었다. 만약 밀란이 우승 경쟁에서 탈락한 상황이라면 모르겠으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그치?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거야?"
에리카에게 있어 밀란의 감독이 욕을 먹든 말든 큰 상관은 없는 문제였지만 언론의 호들갑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하는 꼴을 봐도 그렇고 가끔 자신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좋아할래야 좋아하기 힘들었다.
"글쎄, 그나저나..."
네스타가 부상당했다는 소식은 진작 알았다. 심지어 동료들이 자신에게 연락해서 경사가 났다며 이야기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에리카는 데이빗의 생각을 눈치챘다.
"아쉬워?"
"...아쉽기도 하고...잘된 것 같기도 하고...잘 모르겠어."
참 복잡한 기분이라며 데이빗이 미소를 지었다. 네스타의 부상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으니 말이다.
다행이다
그리고,
아쉽다 는 감정.
다행이라는 감정은 그만큼 지난 경기에서 네스타에게 시달렸던 경험의 발로였다. 컨디션이 나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겨내지 못한 수비수는 그동안 없었기에 데이빗은 네스타에게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만큼, 그가 다음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한다는 말에 안도의 감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도 만만치 않았다. AC 밀란이라고 하는 팀은 매 년 만날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두 팀이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다고 해도 만날 확률은 상당히 희박했다. 레알 마드리드와 올랭피크 리옹과 같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존재하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인연이 아니라면 사실 10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는 팀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네스타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 가능성은 더욱 떨어지게 되고 말이다. 어쩌면 그가 은퇴하기 전까지 다시는 그를 뛰어 넘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지도 몰랐다.
"좋게 생각해. 니가 다치게 한 것도 아니잖아."
남자 친구가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에리카였기에 그런 위로를 건넨다. 데이빗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냥 아쉽기도 해서 그런 거야."
자신의 승부욕보다는 팀이 올라가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팀의 승리에 방해가 되는 선수가 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 호재였다. 네스타를 대신하는 선수가 만만한 선수는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AC 밀란이라고 하는 명문 클럽에서 뛰는 선수일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네스타만큼 자신을 곤란하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면 이미 지난 경기를 치를 때 피치 위에서 볼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아 그리고 이거, 다음 경기 티켓."
잊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콩 치며 주머니에서 경기 티켓을 건네는 데이빗이다.
"고마워. 친구들도 고마워 할거야."
에리카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처음에는 데이빗에게 부탁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신경쓰지 말라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이제는 자연스러웠다. 데이빗이 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거나 판매된다고 하니 크게 부담가질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말이다.
"뭘, 언제든 이야기해줘. 나야 니가 와서 봐주면 더 좋으니까."
자신의 여자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남자의 본능이었기에 데이빗은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인다.
"아 그리고, 에리카하고 친구들 좌석이랑 제임스하고 티티의 좌석이랑 붙어 있을거야."
"아, 로이 씨하고 스튜어트 씨도 보러 오는거야?"
티티와 제임스의 성으로 부르는 에리카, 데이빗은 영 어색하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티티, 제임스라고 불러. 뭔가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아 이건 중요한 게 아니지. 응 맞아. 오랜만에 경기를 보러오고 싶다고 티켓을 부탁했어. 마침 네가 부탁한 시기와 겹쳐서 직원에게 같이 부탁했는데. 불편할 것 같아?"
"아니 괜찮아. 나도 오랜만에 로이 씨하고 스튜어트 씨를 보면 좋지. 친구들도 네 에이전트라고 하면 좋아할 거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 작품 후기 ============================
-복귀했어용
-약속을 지키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