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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언제나 싱글벙글한 인상의 레이나가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전반에만 2골을 허용했기에 골키퍼로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 데이빗은 내심 혀를 찼다.
'이런 분위기는 진짜 처음 인것 같아.'
생각해보면 데이빗은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한 이래 져본적이 없었다. 그가 출전했을 때 팀은 언제나 최소한 무승부 이상을 거둬왔고(무승부의 대부분에서 그는 교체출장이었다) 전반부터 상대를 몰아붙이면 몰아붙였지 이런식으로 밀려본 적은 없었다.
[파비오! 오늘 플레이가 왜 그러는거야? 플레이가 너무 느리잖아?]
[뭐야? 제기랄, 그러는 너는 한 게 뭐가 있다고 남 탓하는 거야?]
자신을 지적하는 카윗의 모습에 아우렐리우가 발끈하여 달려든다. 다른 이들도 이리저리 말싸움을 시작하는 모습이다.
[백업이 너무 느리잖아! 공을 받아도 줄 데가 없다고!]
[라인이 너무 내려가 있단 말이야. 공격할때는 빠르게 올라와 줘야지!]
[중반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내줬는데 어떻게 라인을 끌어 올리느냔 말이야?]
데이빗은 말싸움에 끼지 않고 체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계속 중앙과 전방을 왔다갔다 하느라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컸던 것이다.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빗도 경기 내내 답답함을 느꼈고 당연히 할 말은 많았다. 하지만 언쟁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닌 성격에다가(상대가 도발할 경우와는 달랐다) 아직은 신인이라는 생각에 자제하는 면도 있었다. 확실한 팀의 주축, 그리고 연차가 쌓이기 시작한다면 아마 달라질 것이다.
달글리시 감독은 선수들의 언쟁을 딱히 터치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프로로서 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기 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본인도 현역시절 라커룸에서 많은 동료들과 언쟁을 벌이곤 했으나 감정싸움으로 치달은 적은 거의 없었다.
[오케이, 다들 문제점은 알고 있구먼.]
슬슬 나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달글리시 감독은 주위를 환기시키려는 듯 박수를 두어번 치며 입을 열었다. 말다툼을 벌이던 선수들은 감독의 권위에 존중했고 시끄럽던 라커룸은 조용해졌다.
[모두 맞는 말을 했다. 라인이 지나치게 밀린 것도 문제였지만 애초에 라인을 올릴 수 없었던 부분도 있었지. 수비하느라 정신이 팔려 공격시 백업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건 내 실수가 컸다. 전술적인 부분에서 상대에게 말렸던 것 뿐이야. 그러니 이제 그 부분을 수정하겠다.]
자신의 잘못이라 이야기하는 감독의 모습에 선수들의 흥분이 조금은 가라 앉았다.
[파비오.]
[...네.]
감독이 부르는 이유에 대해 대충 감을 잡은 아우렐리우는 조금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로서도 자신의 오늘 플레이는 정말 좋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놓고 지적하는 동료의 모습에 발끈한 것은 그에게도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오늘 네가 못한 게 아냐. 내가 너의 장점에 어울리지 않는 롤을 부여했을 뿐이다. 그러니 실망할 것 없다. 다음에 너의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교체를 의미하는 말, 불만이 없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감독의 모습이었기에 크게 기분나쁜 것은 아니었다.
[아우렐리우가 빠지고 하울이 들어간다. 그리고 포메이션을 변경하겠다. 데이빗.]
[네, 감독님.]
[전반에 잘해줬다. 네가 아니었다면 몇번의 찬스도 만들지 못했을 거다. 후반에는 너의 능력을 오로지 공격에만 전념케 하고 싶다. 자신있겠지?]
감독의 말에 데이빗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달글리시 감독은 만족한 듯 그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포지션을 왼쪽 윙 포워드로 이동한다. 아마 웨인 브릿지와 대치하겠지. 그를 엉망으로 짓밟아 버리도록. 너라면 할 수 있어. 알겠나?]
[알겠습니다.]
데이빗의 대답에 '좋아' 라고 덧붙인 달글리시 감독, 이어 다른 선수들에게도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전반에 많이 심심했을 거다. 찬스를 한번 놓치긴 했지만 잊어 버리도록 해. 아무리 위대한 골잡이라도 모든 슈팅을 골로 연결할 수는 없어. 부담갖지 말고 골을 노리도록.]
전반, 데이빗이 만들어 준 완벽한 찬스를 날려먹었다는 생각에 표정이 좋지 못했던 수아레즈가 조금은 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르크는 오른쪽 윙 포워드로 올라간다. 전반전에 너의 헌신적인 플레이가 있었기에 우리의 오른쪽 사이드가 안전할 수 있었다. 후반에도 너의 성실함이 필요하다.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되 수비 시에도 충분히 신경을 써주도록.]
카윗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많이 뛰는 역할은 예전부터 늘 하던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물론입니다.]
[스티븐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올라간다. 전반에 공격 가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골을 노리면서 공격수들에게 양질의 패스를 넘겨주도록. 스티븐 자네는 뭐 알아서 잘 할거라 생각하지만 말야.]
감독이 은근슬쩍 자신을 띄워줌에도 평소 무뚝뚝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라드, 짧게 '예.' 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였다.
[중앙을 장악하는 역할은 루카스와 하울이 맡도록. 루카스 자네가 왼쪽에 서도록 해. 아직 수비 가담이 부족한 데이빗의 공백까지 책임져줘야 하니 많이 힘들거다. 하지만 네가 버텨줘야 우리 공격이 원활이 이루어질 수 있어. 믿고 있어도 되겠나?]
[네.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은 선수들 한명 한명에게 세심한 지시를 하며, 각각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세워주는 감독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보통 지는 팀의 하프 타임이라면 감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선수들은 발끈하거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감독과 이야기를 한 선수들의 표정은 자신감을 되 찾았고 심지어 교체 당한 파비오 아우렐리우마저 그리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할 수 있겠어.'
짜증이 가득했던 라커룸의 꾸물거리던 공기가 사라졌다. 데이빗은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수비수, 골키퍼들과의 이야기도 마친 달글리시 감독이 모두를 훝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겨우 2골차에 불과해. 아직 후반은 시작도 안했다고. 우리가 역전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그보다 더 짧을 거라 확신한다.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패기넘치는 선수들의 대답, 달글리시 감독은 만족했다.
[좋아. 잊지 말도록. 여기는 우리의 홈이다. 안필드란 말이다. 이곳에서 승리의 세레모니를 하는 팀은 오직 우리 레즈여야만 한다. 후반에는 불안해하고 있을 팬들을 기쁘게 할만한 플레이를 보여주도록.]
[후반 시작한다. 어? 아우렐리우 녀석 빠졌잖아? 그리고 메이렐레스가 들어왔어. 이야 티티! 네 말대로 됐다고!]
제임스는 옆에 있던 티티를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전반을 보며 티티가 했던 그대로 전술의 변경이 있었던 것이다. 티티는 겸언쩍은 표정으로(하지만 숨길수 없는 자부심도 있었다)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지. 후반에는 좀 달라진 모습을 봤으면 좋겠네.]
[당연하지! 후반에도 전반처럼 한다면 아마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를걸!]
[...우리 팬들이 다 너같은 줄 아냐...]
혀를 차는 티티, 뭐 말이 격해서 그렇지 하고자 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티티도 동감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지면 4위권 진입에 큰 타격이 될거야. 오늘 맨체스터 시티전이나 다음 라운드의 아스날 전은 사실상 승점 6점짜리 경기와 다를게 없으니까.]
리버풀이 올라가려면 지금 4위권에 있는 팀들 중 최소한 한팀은 끌어 내려야 했다. 당연히 그 팀들과의 맞대결은 기존의 상위 팀을 끌어내리기 위한 최대의 찬스였다. 하지만 진다면 타격 역시 2배로 돌아오게 될 것이고 말이다.
[재수없는 소리하지마 티티, 반드시 이길거라고!]
[그래, 나도 꼭 그렇게 되길 원해. 데이빗이 하나 해줄거야. 지켜보자고.]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은 전반 경기 내용에 만족했다. 최근 기세가 좋은 리버풀과의 경기, 그것도 지옥같은 안필드 원정이었기에 내심 어려운 승부를 예상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지만 패배한다면 상위권 판도가 크게 요동치게 된다. 아직까지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큰 타격이 됨과 동시에 4위권마저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경기가 잘 풀렸다. 자신의 선수들은 안필드의 분위기에 전혀 주눅들지 않은 것 처럼 가벼운 몸놀림을 뽐냈고 상대를 완벽히 압도했다. 위기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단발성에 그쳤고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랬기에 하프 타임 휴식 시간동안 만치니 감독은 선수들에게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지금 같은 경기력을 유지하라는 선에서 그쳤다. 물론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리버풀이 후반 달라질 수도 있을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이건 예상 이상이군.]
쓰게 혀를 차는 만치니 감독, 힐끔 고개를 돌려 달글리시 감독을 바라 보았다. 왕의 귀환이란 화려한 타이틀을 달고 복귀한 과거의 레전드, 하지만 만치니 감독은 달글리시의 능력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운이 좋은 것 뿐이지.'
달글리시의 전술적인 운용이 뛰어나서 리버풀이 호성적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치니 감독은 지금도 위협적인 돌파를 선보인 데이빗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어린 녀석이 아니었다면 달글리시는 지금처럼 화려한 복귀를 하지 못했을게 분명한데...]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오늘 리버풀의 전술은 이도저도 아닌, 인상적인 부분이 전혀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후반들어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선수들의 멘탈을 확실히 다잡아 준 것 같다. 만치니 감독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달글리시 감독에 대한 평가를 상당부분 수정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리버풀의 오른쪽은 공격이 크게 위협적이진 않다. 카윗은 성실한 선수지 변수를 만들어 내는 역할은 크게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성실한 만큼 그의 수비 가담은 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전반 막바지에 자신들의 왼쪽 윙포워드 크레이그 벨라미가 골을 기록하긴 했으나 그것은 실바의 패스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었다.
'노린다면 상대의 왼쪽, 그러니까 션 라이트 필립스를 활용하는 게 나을 텐데.'
상대의 왼쪽 윙 포워드로 자리를 옮긴 데이빗은 수비 가담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아예 농땡이를 피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리그를 통틀어 가장 많은 변수를 만들어 내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저녀석의 공격을 막고 그대로 역습에 나서는 게 좋겠지만.'
저 어린 녀석은 볼 키핑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 전반에 데이빗이 공을 빼앗기긴 했나 의문이 들 정도로 볼 간수를 잘했다. 돌파 시도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두 골차의 리드는 불안한 부분이 있었다. 만약 이른 시간 추격의 골을 먹게 된다면 심리적으로 엄청나게 쫓기게 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만치니 감독은 후반에 임하며 수비적으로 돌아서는 것을 자제했고 전반과 같은 운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브릿지와 데 용에게 전하도록. 리버풀은 분명 왼쪽, 그러니까 우리의 오른쪽 사이드로 공격을 집중할 거다. 둘이서 반드시 막아내고 빼낸 공을 곧바로 다비드, 혹은 션에게 연결하라고 전해. 루카스가 제법 거슬리긴 하지만 그 혼자서 모든 공간을 커버하는 것은 불가능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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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많은 분들이 작품을 추천해주셨네요.ㅋㅋ근데 재밌는 부분이 연중작을 추천하면서 '고통을 같이 느끼자' 라니...무섭습니다.ㅋㅋ
추천해주신 작품은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아직은 손도 못댔어요. 오늘도 낮에 병원+은행에 다녀왔거든요.
사족2.
앞으로는 오전 0시에 굳이 맞춰 연재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베스트를 노리면서 쓴 글도 아닌데 우연히 몇번 빈집털이로 1등을 먹고 꾸준히 10위권을 들락날락하다보니 욕심이 생겼었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