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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와 무승부를 거뒀지만 팀 분위기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닙니다.]
새미 리 수석 코치는 베니테즈 감독과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전체적인 피지컬 컨디션 점검과 심리 상태 등을 파악하여 다음 경기에 나설 스쿼드를 정하고 세부 전술을 논의해야 했다.
[무승부긴 했지만 패배할뻔 했으니까요. 같은 무승부라도 선수들이 받아들이는 느낌은 다르다는 거겠죠.]
예컨대, 이기고 있던 경기를 막판 동점골을 허용하여 무승부를 거둔다면 다잡은 고기를 눈 앞에서 빼앗기는 기분이 들 것이다. 이럴 경우 분위기는 썩 좋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반면 열세에 놓인 경기를 마지막에 따라 붙어 무승부로 끝낼 경우에는 다르다. 같은 무승부라도 후자의 경우가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베니테즈 감독이었다.
[그렇죠. 만약 지난 경기를 내줬다면 선수들은 굉장히 사기가 떨어졌을 게 분명합니다. 천만 다행이었죠.]
[마지막 라운드를 잡는다면 7위는 확정지을 수 있었겠지만요. 어쨌든 지난 경기에서 승점 1점을 챙긴 덕분에 마지막 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6위까지는 바라볼 수 있겠어요.]
6위나, 7위나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7위건 6위건 프리미어 리그에서 빅 4로 꼽히는 리버풀에게는 수치스러운 성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7이까지 주어지는 유로파 리그 출전권에서 분명 차이가 났다. 만약 7위로 리그를 마치게 된다면 유로파 리그 3차 예선부터 참여해야했다. 반면 6위로 시즌을 마친다면 플레이 오프 부터 참가할 수 있었다. 기간 상으로는 약 3~4주 정도, 경기 수로는 2경기가 차이나게 된다. 긴 시즌을 치러야 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는게 좋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6위를 노려야 했다.
[아스톤 빌라의 다음 경기 상대는 어디입니까?]
[블랙번 로버스입니다. 이번 시즌 현재 10위에 랭크되어 있는 팀이죠. 경기 결과에 따라서는 9위까지 올라갈 확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경기에 대한 동기부여가 그렇게 크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강등 걱정은 이미 오래전에 날려버린 팀, 하지만 유럽 대항전 진출도 바라볼 수 없는 상태, 죽기 살기로 달려들 거란 예상은 안하는 것이 좋았다. 베니테즈 감독은 입맛을 다셨다.
[그나마 우리 상대인 헐 시티가 이미 강등이 확정된 상태라는 것이 다행입니다. 강등에서 벗어날 희망이 있었다면 그들도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을테니까요. 더구나 우리가 어웨이로 경기를 치르게 되니 말이죠.]
수석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베니테즈 감독이다. 시즌 막판, 가장 무서운 팀은 강등권에서 탈출하기 위해 덤벼드는 상대라는 말이 있을정도니 말이다.
강등권에 있는 팀은 처절하다. 소 꼬리보다 닭 머리가 낫다는 말은 승강제가 존재하는 리그에 있어서는 개소리만도 못한 이야기이다. 그게 아니라면 챔피언 쉽 팀들이 기를 쓰고 프리미어 리그로 올라오려 들지 않을 것이고 상위 리그의 팀들이 강등 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만큼 상위 리그와 하위 리그의 차이는 컸고(물질적인 보상도 물론 포함해서) 모든 팀들이 꼴지를 할 지언정 단 한시즌이라도 상위 리그에서 머무르길 원했다.
[선수들의 신체 컨디션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닙니다. 시즌 막바지에는 늘 그렇지만요. 데이빗은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다른 선수들처럼 풀타임으로 시즌을 치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사실 지난 경기에 그를 선발 출장시키면서도 걱정이 많았어요. 팀 사정만 괜찮았다면 좀 더 괜찮은 데뷔전을 준비해 줄 수 있었을텐데요.]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는 베니테즈 감독을 보며 씩 웃는 새미 미 수석코치였다.
[그렇죠. 루키의 데뷔전이 첼시라면 사실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 될테니 말이죠. 하지만 저 친구는 스스로 빅 게임에서 뛸만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않았습니까? 잘할 겁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퍼스트 팀에 올라 왔다면 더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들 정도네요.]
'그래, 빌어먹을 프론트 놈들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속으로 이를 갈며 베니테즈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아도 아직 리그 탑 클래스의 공격수라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은 선수였다. 하지만 성장세가 누구보다도 빨랐고 꾸준히 큰 무대에서 경험을 쌓는다면 최고의 공격수가 될 자질이 보였다. 베니테즈 감독은 그 점이 정말 아쉬웠다.
'정말 아쉬워. 좀 더 제대로 된 상태에서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자신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날 생각이었다. 오랜 시간 클럽과 함께 했기에 아쉬운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실망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밀려오는 상념을 고개를 흔들며 떨쳐낸 베니테즈 감독,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승점 1점이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 외에 특이 사항은 없습니까?]
[다니엘이 허벅지 쪽에 경미한 통증이 느껴진다고 해서 경과를 지켜보았습니다만 별 이상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고 본인도 이제 괜찮다고 합니다. 스티븐은 부상 복귀 이후 몸 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마지막 경기만 남았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말이죠. 그리고...]
헐 시티 AFC(Hull City AFC)는 요크셔 주의 이스트 라이딩에 있는 킹스턴어폰헐을 연고로 하는 팀이다. 1904년에 창단된 오랜 전통이 있는 팀으로 팀의 닉네임은 The Tiger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나긴 시간동안 프리미어 리그를 밟지 못하고 하부 리그를 전전했다. 그런 이들에게 2007-08 챔피언십 리그는 잊지못할 추억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해 리그 3위를 기록하며 챔피언십 리그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헐 시티는 플레이오프에서 브리스톨 시티를 상대로 39세의 노장 딘 윈다스가 골을 기록하며 승리르 거두게 된다. 2008-09 시즌, 팀 창단 104년 만에 1부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게 된 헐 시티는 그 시즌을 17위로 마치며 가까스로 잔류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야심차게 출발한 헐 시티는 힘겨운 도전을 거듭해야 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만 남은 지금, 이번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강등이 확정되었고 내년 시즌부터 다시 챔피언십 리그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상대가 이미 강등이 확정된 팀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들에게 있어 이번 경기는 다시 올라오기 전까지 마지막 프리미어 리그 경기가 될 테니까요.]
경기 시작을 앞두고 베니테즈 감독은 혹시나 선수들이 상대를 얕잡아 보고 있을까 경계했다. 리버풀로서는 이번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했다.
[아시겠지만 오늘 경기에서 이긴다면 내년 시즌 유로파 컵 플레이오프 전부터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비기거나 진다면 7월부터 3차 예선을 치러야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의 행복한 휴가는 당연히 줄어 들겁니다. 좀 더 넉넉한 휴가를 원한다면 오늘 반드시 이기고 돌아 오세요.]
리버풀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아스톤 빌라가 블랙번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7위 확정이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선발 명단을 발표하겠습니다. 골키퍼에 레이나, 포 백에 글렌 존슨, 다니엘 아게르, 마틴 스크르텔, 에밀리아노 인수아 입니다. 미드필더는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루카스 레이바, 요시 베나윤, 디르크 카윗, 스티븐 제라드가 출전합니다. 그리고 원 톱에 데이빗 장이 나갑니다. 이상입니다.]
데이빗은 주먹을 불끈 쥐며 2경기 연속 선발 출장을 자축했다. 베니테즈 감독은 이어 세부적인 전술지시에 들어갔다.
[오늘 어웨이지만 우리는 공격적으로 나갈 것입니다. 양 풀백인 글렌과 에밀리아노는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합니다. 상대는 분명 수비를 굳히고 역습을 노리는 전술로 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루카스와 하비에르가 일차적으로 저지하며 공격에 나간 풀백이 돌아올 시간을 벌어 주세요. 카드를 받지 않는 선에서 파울로 저지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감독의 전술 지시에 선수들은 집중하며 경청했다. 한 명씩 짚으며 해야할 역할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마친 베니테즈는 박수를 치며 정리했다.
[마지막 경기입니다. 오늘도 적지 않은 수의 팬들이 여러분을 보러 원정 응원을 와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승리를 선물해주세요. 그럼 갑시다. 나가서 저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고양이들을 짓밟고 오세요.]
[안필드만큼 큰 경기장은 아니네요.]
헐 시티 원정이 처음인 데이빗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옆에 있던 제라드가 '뭐 그렇지.' 라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헐 시티의 홈 구장인 KC 스타디움은 수용인원이 25000 정도의 크지 않은 규모의 구장이었다. 4만 5천이 넘는 관중이 입장할 수 있는 안필드에 비할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원정 경기장이 커서 좋을 건 없잖아. 시끄럽기만 하고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지.]
어슬렁 거리며 다가온 카윗도 은근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데이빗은 정말 그렇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원래 맞장구를 쳐주면 더 신나는 법이라 카윗은 자신이 겪은 짜증나는 원정 지역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잉글랜드 내에서라면 역시 올드 트래포드가 가장 짜증나지. 우리 팀하고는 사이가 가장 안좋은 동네니까 말이야. 응? 구디슨 파크는 어떠냐고? 생각보다 그렇게 험하지는 않아. 너도 알겠지만 에버튼하고 우리 팀하고는 더비기는 하지만 그렇게 험악한 사이는 아니거든. 뭐 사실 애초에 어웨이인 이상 호의적인 동네가 어딨겠냐만은.]
[근데 무엇보다 가장 끔찍한 동네는 다른 곳이 아닌 터키야! 거기 인간들은 정말 미쳤다고. 예전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 갈라타사라이 원정을 간 적이 있었는데 정말 끔찍했어! 너도 겪어 보면 알거야.]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드는 카윗의 모습에 데이빗은 헤에-하고 감탄사를 흘렸다. 재밌는 얘기였고 계속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곧 경기가 시작할 때였다.
[흥미로운 얘기였어요 디르크. 경기가 끝나고 나서 더 듣고 싶네요.]
[얼마든지. 일단 오늘 이기고 나서 보자고.]
씩 웃으며 자신의 위치로 향하는 선수들, 그리고 센터 서클에서 킥 오프 휘슬을 기다리고 있는 상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데이빗은 기분 좋게 두근 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 경기는 데이빗에게도 중요한 일전이었다. 성공적인 프리미어 리그 데뷔를 치러낸 지금, 이번 경기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인다면 다음 시즌, 새로운 리버풀의 플랜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
심판의 휘슬 소리가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고 데이빗은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