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Answer-31화 (31/346)

00031  -  =========================================================================

[후아아.]

에리카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며 기지개를 켰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보고 있던 화면은 리버풀FC의 공식 홈페이지, 그 중 리저브 팀에 대한 쓰레드를 읽고 있었다. 최근 아주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데이빗이었기에 팬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데이빗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에리카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자신과 사적으로 친한 이가 유명해지는 것은 참 신기한 감정을 유발했다.

[친한...가?]

친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매일매일 보는 사이였으니 친한 사이는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미묘했다. 친구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연인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놀랄만큼이나 이성에 대한 경험이 적어보였고 누가봐도 쑥맥임을 알 수 있을만큼 어리버리했다. 에리카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삐죽 튀어나왔다. 카사노바 같은 남자는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눈치가 없어도 곤란하다고 느꼈다. 애초에 자신이 은근 슬쩍 스킨십을 유도하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멍청이.]

한숨이 나왔다. 언제쯤 이 둔탱이가 자신에게 한발 더 다가와 줄지 모르겠다. 보나마나 데이빗은 현재의 관계에 별 불만없이 만족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끔은 그가 정말로 자신을 친구로만 생각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띠링-

타이밍 좋게 핸드폰에 메세지가 도착했다. 핸드폰을 들어 확인하는 에리카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지 생각하는 줄은 어떻게 알고 또...]

-지금 동료의 집에서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녀석이 비겁하게 해서 져버렸어! 치사한 녀석이라니까 정말!

[나참...정말 어린애라니까.]

남자들이란 정말 쓸데없는데 흥분한다고 생각했다. 투덜거림도 잠시, 답장을 보내는 에리카의 손길이 바빠졌다.

[이건 사기야!]

데이빗은 패드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얼굴이 벌개진채로 씩씩거리는 모습이 지금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 실력이지. 사기라니 무슨 말씀을.]

데이빗이 흥분하거나 말거나 파체코는 유들유들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들은 지금 축구 비디오게임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화면에는 파체코가 선택한 스페인 국가대표팀이 데이빗의 잉글랜드 대표팀을 무참히 짓밟고 있는 장면이 리플레이 되고 있었다.

[역시 페르난도는 끝내준다니까. 잉글랜드는 너무 약한거 아니야?]

[이봐 파체코. 잉글랜드는 아무 문제 없어! 다만 조종하는 녀석이 얼간이라서 그런것 뿐이야.]

[아 닥쳐 스피어링. 그리고 꺼져. 이 빌어먹을 게임기랑 같이 꺼져버리란 말이야.]

자신을 놀리는 스피어링와 파체코의 모습에 더 흥분해서 소리치는 데이빗이었다. 그럴 수록 둘은 더 즐거워했고 말이다.

[너나 꺼져봐 데이빗. 그 패드 이리내. 이 몸이 이 게임을 어떻게 하는 지 직접 알려줄게.]

[오 제이가 도전하는거야? 데이빗은 너무 시시해서 재미없었는데 너라면 날 즐겁게 해주겠지?]

[물론이야. 저런 허접한 녀석이 우리 잉글랜드를 잡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걸 도저히 더는 못보겠어. 잉글랜드는 최강이라는 걸 내가 증명해주지.]

[제기랄. 스페인이 사기인것 뿐이잖아. 애초에 루니는 뭐 이렇게 병신같은 건데? 하여간 맨유놈들 중에서 제대로 된 놈들이 없다니까.]

[이봐 루니는 문제 없어. 이 게임에서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 다만 컨디션이 아주 좋지 않았을 뿐이야. 최악의 컨디션인데 기용해서 삽질한건 너였다고.]

낄낄거리며 게임기를 두고 노닥거리는 세 남자, 데이빗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고 화를 삭히려는 듯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각기 팀을 선택하고 게임을 시작하고 있었다. 파체코는 다시 한번 스페인 대표팀을, 스피어링은 데이빗이 플레이했던 잉글랜드를 선택하며 자신들의 국가 대표팀을 골랐다.

[오 이런, 우리의 캡틴이 아주 컨디션이 좋잖아? 때리면 다들어가겠군.]

[제라드가 컨디션 최고라니, 그건 좀 무서운데. 하지만 이쪽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고 확실히 스피어링은 데이빗보다 실력이 좋았다. 파체코는 제법인데-라고 중얼거리며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게임에 불과했지만 팬들 사이에서 꽤나 사실성 높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타이틀인 만큼 각 팀의 특징이 꽤나 잘살려져 있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은 강한 체력과 빠른 기동력이 인상적이었고 스페인 대표팀은 특유의 아기자기함과 테크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때 내 실력이! 방금 중거리 슛 봤냐? 역시 캡틴은 끝내준다니까!]

[그냥 우리 캡틴이 잘했던 것 뿐이잖아. 내가 할때도 캡틴이 미쳐있었다면 충분히 그런 골 넣을 수 있었어!]

[그래 그래 물론 그러시겠지.]

[무슨 소릴하는거야 데이빗. 아마 아까 캡틴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넌 한대 맞았을지도 몰라. 자신을 가지고 그따위로 밖에 플레이 못하냐면서 말이야.]

그렇게 낄낄거리며 다시 데이빗을 놀리기 시작하는 둘이었고 데이빗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 똑딱거리기 시작했다. 그새 게임을 마쳤는지 스피어링이 데이빗에게 다가왔다.

[누구에게 메세지를 보내는 거야? 여자?]

[꺼져 스피어링.]

[데이빗에게 여자가 있었어? 누군데?]

[너도 꺼지라고 파체코.]

데이빗의 틱틱거림에도 둘은 신경쓰지 않고 집요하게 데이빗의 핸드폰을 훔쳐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다 스피어링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알겠다! 그때 경기에 보러왔던 그 여자하고 연락하는 거지? 그 갈색머리에 꽤 귀엽게 생긴 여성말이야.]

[......]

침묵으로 일관하는 데이빗의 태도에 스피어링은 빙고-라고 외쳤다. 파체코는 눈을 빛내며 스피어링에게 질문했다.

[누군데? 아는 사람이야?]

[아, 잘 아는건 아닌데. 너 혹시 우리 멜우드 트레이닝 센터 앞에 있는 카페에 가본 적 있어?]

[아니 없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파트 타임 아가씨인데 꽤나 귀엽다고. 저번에 데이빗하고 들어가려는데 저녀석이 입구에서 못들어가게 막지 뭐야. 그래서 다음에 혼자 가봤는데 정말 귀엽게 생긴 아가씨였어. 데이빗이 견제할만 했지.]

스피어링의 말에 작게 제기랄-하고 중얼거리는 데이빗이었다.

[오, 그랬단 말이야? 데이빗 생각보다 질투가 심한데? 그래도 애인은 좀 소개시켜달라고. 궁금하잖아.]

[애인 아니야. 친구야.]

[친구라고? 그럼 왜 스피어링을 막은 건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그럴 필요 없었잖아.]

[맞아. 그리고 그 아가씨 우리 홈경기에서는 몇번 본 것 같다고. 솔직히 말해봐 데이빗.]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볶아대는 둘의 모습에 데이빗은 이마를 감쌌다. 솔직하게 말했는데 뭘 더 솔직하게 말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야. 그녀와 나는 좋은 친구사이야. 아직은 말이지.]

[아직은? 그렇다면 너는 그녀와 좀 더 긴밀한 관계가 될 의사가 있다는 말이네. 그럼 왜 아직도 프로포즈 하지 않고 밍기적 대고 있는거야?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 남자는 최악이라고!]

[말 잘했어 스피어링. 용기있는 남자만이 미인을 얻는 법이야. 대쉬해. 남자답게 들이대라고.]

[......]

하아 하고 한숨을 쉬는 데이빗이다. 분명 자신이 에리카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고백하자니 여러가지로 꺼려지는 부분이 많았다. 방금전 맥주 한잔을 해서였을까. 생각보다 쉽게 고민이 입밖으로 흘러나왔다.

[물론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데이빗은 자신의 속 마음을 둘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미래가 불투명한 리저브 소속의 선수일 뿐이고 집안이 좋기는 커녕 가족도 없는 고아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는다고. 거기에 혹시 어설프게 고백을 해서 지금의 관계마저도 깨질까봐 두렵다고 했다. 스피어링과 파체코는 그런 데이빗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시작은 장난스러웠지만 데이빗의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어렵지 않았고 그런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장난칠 만큼 둘은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 데이빗. 네 상황은 이해해.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고 있고 너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줘서 고마워. 그만큼 네가 우리를 믿어준다는 이야기겠지.]

평소답지 않게 진중한 모습을 보이는 스피어링의 태도로 인해 데이빗은 되려 쑥스러움을 느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랄까. 그런 기색을 숨기기 위해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캔 더 꺼냈다. 꺼내는 김에 파체코와 스피어링의 것도 같이 꺼냈음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도전했으면 좋겠어.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고 좋은 여성으로 보여. 그런만큼 그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실례라고.]

[맞아. 너는 지금 관계가 깨질가 두려워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너한테 관심도 없는데 이렇게 거의 매일매일 만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녀는 기다리고 있을거야. 네가 퍼스트 팀 선수가 되어 고백하는 게 아니라 내일이라도 당장 고백해주길 말이야.]

동료들의 말에 데이빗은 귀가 쫑긋 서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말은 꽤나 그럴싸하게 들렸고 희망적이었다. 스피어링은 맥주캔을 뜯으며 한모금 크게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자들이 흔히 자주하는 착각인데 멋진 여성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멋진 남자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하지.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남자를 더 원하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네가 멋지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자신을 가지라고.]

데이빗은 스피어링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 펜과 종이가 있었다면 받아 적기라도 할 기세였다.

[멋있게 고백하라고 데이빗. 그리고 사랑을 쟁취해. 오케이?]

옆에서 파체코가 휘파람을 불며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다. 데이빗은 호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아. 알겠어. 남자답게 프로포즈 하겠다고!]

[오오! 멋져. 그래야 사나이지.]

[잘해보라고! 분명 잘될거야!]

기세 좋게 잔을 들어올리는 데이빗, 그에 호응하여 스피어링과 파체코도 마주 잔을 들어올렸다. 힘차게 건배를 하고 캔을 입가에 가져가는 데이빗, 문득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근데 있잖아.]

[응? 뭐가?]

조금은 잦아드는 목소리, 좀전의 패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꼼지락 거리는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고백을 해야하지?]

[......]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자신감 없는 태도로 질문하는 모습에 파체코와 스피어링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제기랄. 좀전처럼 자신감있게 하면 되잖아! 뭐야? 이 인스턴트 패기는? 1분만에 꼬리를 말아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누가 꼬리를 말았다고 그래? 다만 좋은 방법을 묻는 것 뿐이잖아?]

[아 그러시겠지. 내가 아는 건 일단 네녀석의 그 썩은 근성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거야!]

좋았던 분위기가 난잡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린애들처럼 서로 물어뜯을듯이 으르렁거리는 동료들을 보며 파체코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릴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