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87)

히메오 : 으음...새벽 3시네.

         아, 거기 시계 있잖아.

         스스로 확인하라고 그런 건.

오사무 : 눈이 뻑뻑해서 떠지지가 않아요...후아아암.

히메오 : 역시 나이탓인가?

         필요하다면 내가 자주가는 안과 소개해줄 수 있는데.

오사무 : .........

이대로 그녀를 눈앞에 두고

다시 자버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번엔 고의적으로 걷어찰 가능성이 있기에 그만뒀다.

오사무 :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혹시 너무 흥분돼서 잠이 안온다든가?

히메오 : ...어떻게 알았어?

오사무 : ...당신이 지금처럼 솔직한 상태로 있는 한,

         저는 당신에 대해선 뭐든 알 것 같은데요.

히메오 : 최근에 내가 좀 기댄다고

         우쭐해졌나본데?

오사무 : ...기대고 있나요?

히메오 : 정말 남의 말꼬리나 잡고.

         그렇게 인생 살면 재밌어?

오사무 : 일부러죠?

         일부러 그러는 거죠?

새벽 3시에 남자방에 무턱대고 들어와서는

시비를 걸고 있는 것 같은데.

히메오 : 뭐, 됐어. 오늘 이렇게 찾아온 건 말야,

         여기서 서로의 입장을 확실하게 구분지을까 해서.

오사무 : 입장, 말인가요?

히메오 : 당신...지금까지 나를 제쳐두고,

         토코짱 보호자의 권리를 독점해,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오사무 : 좋겠어요.

         미토코짱 그렇게나 (선물 받고)좋아해주니.

히메오 : ㅇ, 역시 그렇게 생각해?

         나도 말야, 평소랑은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오사무 : ㄴ, 네...

그렇게나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한번 던져본 한마디에 갑자기 싱글벙글대나요.

히메오 : 지금까지 몇번 선물을 줬는데,

         이렇게나 기뻐해준 건 처음이야.

         물건에 따라선 고집스럽게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는데.

오사무 : 대체 어떤 걸 거절당했는데요?

히메오 : 자동차랑, 가방이랑, 식사랑.

오사무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히메오 : 미국 직수입의 마운틴 바이크랑,

         이탈리아에서 구해온 구X 숄더백이랑,

         트리튼 호텔의 프렌치 풀코스랑...

오사무 : 일반적으로 안 받죠 그런 건!

분명 고가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예상대로라니 차라리 후련하다.

히메오 : 비싸지 않아도 말이야, 아무래도 사양하려는 기색이 있어서...

         난 그냥 사용해주기만 하면 되는데.

오사무 : 저기 말이죠,

         전부터 궁금했고 실제로도 몇번 물어봤는데요...

히메오 : [왜 당신은 미토코짱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하는 건가요?]

오사무 : ...정답입니다.

히메오 : 그렇게 알고 싶어?

오사무 : 가능하다면.

히메오 : 흐음...어떡할까.

그러면서 그녀는 시치미를 떼듯 천장을 올려다본다.

오사무 : .........

하지만 나도 오로지 그녀를 똑바로 바라봐,

다음 말이 나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왜냐하면...

히메오 : 뭐, 알았어, 얘기해주지.

         오늘은 특별한 날, 이니까.

내 질문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건 즉,

내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있다는 것이니까.

히메오 : 으음...

         이거 누군지 알겠어?

오사무 : 사진...인가요.

그녀가 미리 주머니에 그것을 넣어뒀다는 것으로 봐서도,

얘기할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다.

약간 빛이 바랜 컬러 사진에 찍힌 건,

40대 정도의,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쑥쓰러워하는 듯한 미소를 짓는 남성과.

그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아직 이도 안 난 듯한 아기의 투샷.

이건...

(히메오와 아버지?)

(미토코와 아버지?) ===

오사무 : 미토코짱과...아버지?

히메오 : ...왜 그렇게 생각해?

오사무 : 그야 여기...테라스하우스 히노사카지요?

아기와 아빠로부터 시선을 돌려,

주변의 풍경을 보면...

거기에는 낣은 문.

더욱 낡은 구닥다리...흥취가 있는 단층집으로.

지금의 나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장소가 그 안에 있다.

히메오 : 응, 잘 알아봤네.

         분명히 토코짱이야 그건.

오사무 : 헤에...귀엽네, 하하.

라고 말했지만, 아마 본인에게 직접 얘기해줄 기회는 없겠지.

뭐니해도 내가 이 사진을 본 것도,

귀엽다는 감상을 가진 것도,

미토코짱에게 있어선 울어버릴 정도로 부끄러울 사실일 테니까.

오사무 : 근데 왜 사와시마씨가 이 사진을 갖고 있나요?

         미토코짱한테 받았나요?

히메오 : 그리고 말야, 토코짱을 안고 있는 그 남자 말인데.

         ...누구일거 같아?

오사무 : 아니, 그러니까, 미토코짱의 아버...

내 물음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히메오 씨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그 호노카씨의 남편이라고 하기엔 너무 중후한,

그 신사를 주시한다.

히메오 : 역시, 그렇게 생각되겠지.

하지만 왠지, 어딘가서 본 듯한 기분도.

그것도 이 사진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요 최근의...

히메오 : 실은 말야, 그 사진, 아버지 서재에서 찾아냈어.

오사무 : 헤에, 아버지의.........윽!?

히메오씨가 은근슬쩍 말한 탓에,

하마터면 나도 그냥 넘어갈뻔했다.

히메오 : 사와시마 준페이.

         혼자서 사와시마 그룹을 일으킨...[내] 아버지

오사무 : 에, 잠깐만요...

         이게 미토코짱이고...

         그리고 이게 히메오씨의 아버지라...그건...

히메오 : 내가 나고야를 떠나 여기로 진학하게 된 건 말야...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기에...[동생]을.

히메오 : 6년 정도 전에...

         내가 아직 집(나고야)에 살고 있을 때 찾아냈어.

히메오 : 보통이라면 자기랑 아빠의 사진이라고 생각할지 몰라.

         하지만 나는, 그게 내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어.

히메오 : 실은 말야...나, 어렸을 적 사진이 한장도 없어.

히메오 : 전에 이상하게 생각해, 오래전부터 일해온

         아주머니한테 물어본 적이 있는데...

히메오 : 그랬더니 그녀, 안색이 확 변해서...

         [사모님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으셔서,

          아가씨가 사진 찍는 걸 원치 않으셨습니다]라고.

히메오 : 어린애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거짓말 같기에,

         전혀 믿지 않았는데...

히메오 : 그런데 이 사진을 발견해...

         엄청난 쇼크였어.

히메오 : 가끔 집에 돌아와도 웃는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던 아버지가,

         사진속에서 내가 아닌 아이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어색하지만 미소를 짓고 있다...

히메오 : 그날부터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여러 가지 조사했어.

         사진이 찍힌 장소, 거기있는 아이에 대해.

         그리고 그 엄마.

히메오 : 장소는 히가시하기모리에 있는 아버지 별장 옆에 있는 아파트.

         아이의 이름은 히노사카 미토코. 엄마의 이름은 히노사카 호노카.

         아파트의 주인으로...아마, 이 사진을 찍었을 사람.

히메오 : 그녀는 아버지가 별장에 머물게 된 무렵부터,

         도우미로서 아버지를 시중들고 있었어.

히메오 : 주변 사람들은 이웃이라는 점도 있고 해서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히메오 : 아버지가 히가시하기모리에 살게된지 2년째에,

         그 아이가 태어났어.

히메오 : 그때는 이미 미망인이었던

         호노카씨의 뱃속에서, 말이지.

(쿠구구궁!!!)

오사무 : .........

히메오 : .........

히메오씨가 말을 멈추자,

내 방에는 잠시동안 침묵이 흐른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고백을 듣고 너무나 큰 충격에

입을 열수조차 없었으니까.

그래서 [거짓말이야]라든가, [그런 말도 안되는] 같은 말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히메오 : 이제 알겠지?

         내가, 그녀...토코짱한테 집착하는 이유를.

오사무 : 그, 그럼...

         당신이 미토코짱을 거두려는 건...

히메오 : 응, 난 그 아이를...

오사무 : [이 쓸모없는 돼지!]같은 매도를 하기 위해선가요?

         보타...미토코짱을!

히메오 : 아니야!

         괴롭힘당한 건 언니쪽이었잖아!

오사무 : 아, 역시 봤근요.

그 지역 방송국에서 제작했으니, 안 봤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건 [목란과 장미]라는 드라마를 가리킨다는군요.

 두 자매의 이야기인데 동생이 언니를 괴롭히는 내용이 있다는 것 같습니다.

 오사무의 "보타..."라는 대사는 극중 인물인 보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나고야와 기후를 아우르는 지역에 있는 방송국에서 제작했습니다.

 위키의 설명에선 [진흙탕 애증극]의 궁극이라고 할 수 있다는군요 ㅋㅋ)

히메오 :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걸로 확실히 알게된 것 같아.

오사무 : 죄송합니다...

         쇼크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봐 주시길.

아니 그것보다, 이 사람과 얘기하면, 나답지 않게

이상하게 좋은 네타가 떠오르곤 한다.

히메오 : 내가 토코짱한테 악의를 품을 리 없어...

         그렇게나 착한 아이, 본 적이 없는 걸.

오사무 : 사와시마 씨...

히메오 : 처음에는, 내 동생이 어떤 인물인지,

         가까이 살면서 자세히 관찰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이번엔 평상시의 그녀와는 달리,

진지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돌아갔다.

히메오 : 하지만 저 아이는, 내 이삿짐이 도착한 동시에,

         에이프런에, 팔을 걷고 내 집으로 찾아왔어.

괴롭고, 답답해 보여,

하지만 어딘가 아득하고 즐거워보여서.

히메오 : 열심히 짐을 옮기고, 청소하고,

         차 끓여주고, 김밥도 만들어 줬어.

         ...자기네 이사도 아닌데 말야.

오사무 : 아하하...눈에 선하네요.

거기에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힘을 다해 노력하고,

일 하나가 끝날 때마다 먼지묻은 얼굴로 생긋 웃는,

작은 여자애가 있었겠지.

히메오 : 어떤 애인지 알아볼 틈도 없었어.

         이사온 바로 그날에 [친구]가 되었으니까.

정말 미토코짱 답다.

즉, 저 아이는 그때랑 아무것도 변한게 없다는 거군.

히메오 :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넌 내 아버지의 숨겨진 자식이야]같은 말.

         [우리집에서 버려진 아이야]같은 말.

오사무 : 아...

히메오 :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옆집 아저씨랑 엄마사이에 난 원치 않았던 아이.

사와시마가(家)에 큰 불란을 일으킬 불씨가 될지도 모르는,

신체는 작지만, 큰 의미를 가진 아이.

미토코짱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갖고 있었다면,

주저없이 말했을 사실이었겠지만.

그렇지만 진정한 미토코짱을 알게 되어 버려,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 지금에 이르러선...

오사무 : 히메오, 씨.

히메오 : ...왜

또 그녀에 대한 호칭이 바꼈다.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자연스럽게 금기를 깨고 만다.

오사무 : 역시, 미토코짱한테 얘기해보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히메오씨도 내 룰 위반을

아는지 모르는지 넘어가 주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호칭도, 그녀에 대한 말투도,

이웃이나 직속 상사라는 특수한 관계를 넘어,

깊이, 개인적인 부분으로 접어든다.

히메오 : 무리야. 리스크가 너무 커.

         토코짱을 더 힘들게 할지 몰라.

오사무 : 뭐, 그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요.

히메오 : 아 그런가, 당신은 바라고 있을 수도 있겠네.

         내가 토코짱한테 미움받기를.

오사무 : 아니에요.

         그런 소리가 아닙니다.

히메오 : 그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토코짱을 상처주면 좋겠어?

오사무 : 하지만 미토코짱이라면

         극복해내리라 믿기 때문이에요.

히메오 : 에...

오사무 : 히메오씨가 친언니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 기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히메오 : .........

오사무 : 지금 미토코짱은,

         자신의 곁에 진정한 가족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평소에는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엄마한테 버림받은 쇼크는

그렇게 간단히 치유될 리가 없어.

오사무 : 그래서 미토코짱에게,

         진짜 가족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가장 사랑해줄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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