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87)

-세상에서 가장 NG인 사랑-

운명이라는 건 참 편리한 단어로...

운명에 이끌려 만나고, 좋아하게 된 두 사람이,

운명의 장난에 휘둘려 마음이 어긋나기도 하고.

회사와 운명을 함께할 각오로,

상사의 지시대로 부정한 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발각되자마자 회사의 운명을 지키기 위해

간단하게 꼬리처럼 잘리는 운명을 맞기도 하고.

가령 최악의 결과가 나온 상황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속 편할까.

...사실은 알고 있다.

사실 그건 전부 신의 뜻 같은 게 아니라,

결국 인간에게 어떤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오사무 : 콜록, 콜록..으, 우웩......하아, 하아...

오사무 : 우욱~..웁...으으...아...?

오사무 : 결국 내리기 시작하나...우웁!

잿빛의 구름 사이에서 여기저기 보이는 하얀 싸라기눈은,

순식간에 크기가 커지고 수를 늘려간다.

오사무 : 으...우웁...하아아아아

갑작스러운, 아름다운 악천후에,

황홀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커플.

짜증난다는 듯이 아래를 보며 퇴근길을 재촉하는 샐러리맨.

그렇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는 땅에 주저앉아

희노(喜怒)가 아니라, 참고로 낙(樂)도 아닌 표정으로

단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행운의 물방울을 바라본다.

알콜의 자극적인 냄새가 나는

하얀 입김을 토해내면서.

오사무 : .........

추워진 건 좀 괴로웠지만,

젖지 않는 건 불행중 다행.

그 하얀 알맹이가 예쁘다든가,

그런 감정은 없었다.

오사무 : 하아...

아니,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있을 정도라면,

다른 걸 절망해야할 상황에 놓여있을 뿐.

예를 들면...

1년에 걸쳐 모든걸 잃은 내가,

내일부터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라든가...

오사무 : 하아아아아...딸꾹

아니 그것보다, 살아있는 가치, 있는걸까, 라든지...

하지만 나무에 목을 매는 건 아직 이른가, 라든지,

빌딩 옥상에서의 다이빙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려나, 라든지,

심야에 어둠에 휩싸인 바다로 빠지기에는 물이 좀 찬가, 라든지

그런 변명거리를 생각하는 것도 한심해서.

오사무 : 아 추워.......뜨것!?

그런 절실한 문제를 머리속으로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예리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오사무 : 아뜨? 아뜨!

         아뜨뜨뜨뜨!?

그렇지만 그건 마음속이 아니라 뺨에.

아니 근데, 그건 고통조차 아니라...

??? : 자 드세요.

오사무 : 에...?

??? : 술 깨도록, 자 드세요.

오사무 : 에? 에?

갑자기 눈앞으로 내밀어진 것은,

방금전까지 내 뺨에 닿았던 작은 캔커피.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 사람은...

??? : 이런데서 앉아 있으면 몸이 얼어 버려요.

오사무 : 아까 그곳의...

지갑에 든, 탈탈 털어도 얼마 안되는 금액을

전부 썼던, 번화가의 한 스낵에서 본...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퍼붓던 내 뒤 테이블에서

손님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던...분명...

오사무 : 저기......미야코 씨...?

호노카 : 호노카, 예요.

오사무 : 예, 아, 죄송합니다.

호노카 : 이건 본명, 이에요.

오사무 : 아...

호노카 : 후훗...

캔커피로 따뜻해진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그, 손끝과 음성은 신기할 정도로

내안에 스르륵 스며든다.

오사무 : 저, 저기, 그게...어째서...

방금전까지의 어둡고 깊은 절망이 녹아드는 듯한,

너무나 부드러운 감각은 고마웠지만,

그것보다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 당혹스럽기만 하다.

분명 나와 그녀는 방금전까지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그렇지만 서로가 대화를 하거나 손끝하나 닿은 게 아니라,

그녀는 돈많아 보이는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우아하게 웃고,

난 카운터에서 혼자 글라스를 바라볼 뿐인 별 볼일없는 손님으로.

호노카 : 분명, 좋은 일도 있을 테니까요.

오사무 : 에...?

그래서 그녀가 말을 걸어온 것은 물론,

그녀가 날 기억하고 있다는 것조차 예상밖의 일로.

호노카 : 그렇게 우울해하지 말라고요.

         살아만 있으면, 노력만 하면,

         분명 언젠가 기쁜일도 생길 테니까요.

오사무 : 에? 에...?

아니 오히려...

이런 어떻게 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주다니,

공상속에서조차 없던 일로.

호노카 : 저기요...

         여긴 추우니까 어디 따뜻한데 가지 않겠어요?

오사무 : .........에?

아니 게다가, 게다가...

말 뿐이 아니라, 진심 뿐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건 참 편리한 단어로...

사람의 인생은 그런 걸로 결정되지 않는다고.

모든 건 자신의 선택한 결과라고.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만 이 만남을,

아직도 운명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구제불능의 인간이 여기에 있다.

요시무라 오사무. 28세 8개월의 어느 겨울날.

그것이 나와 그녀...히노사카 호노카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오사무 : 여기, 다...

일본 특유의 벚꽃 나무에, 화들짝 만개한 꽃잎은,

이번 봄, 몇 번째인가의 바람을 받아 흩날리고 있다.

오사무 : 찾아냈다...

히가시하기모리역에서 도보로 10분.

역앞의 시끄러움이, 천천히 걷는 동안에

재밌게 느껴질 정도로 사라져 간 주택가.

히가시하기모리 3가 24번지라는 주소에 있던 건,

[테라스하우스 히노사카]라고 적힌 낡은 표찰.

('히노사카'의 의미는 조금 의역해서 해뜨는 언덕 정도입니다)

그녀는 이 아파트의 집주인이라고 했다.

이곳 임대 수입만으로는 생활히 힘들기에,

지금의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낡고 좁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한 장소라며 미소지었었다.

오사무 : 여기가...호노카씨의

자연스럽게 빨라지는 심장 박동. 떨리는 다리.

그리고 의미불명하게 흐르는 땀.

[난처한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찾아와 주세요]

그, 운명의 만남으로부터 3개월...

그녀는 만날 때마다 몇 번이고 그렇게 말했다.

그것도 자애로움을 담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렇지만 3달 동안 세번밖에 만나지 않은 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까.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는 짜증난다는 듯 한숨을 쉬는 건 아닐까?

아니면 미소짓는 것조차 안하고

곧바로 쫓아내는 건 아닐까?

오사무 : 그러지는...않겠지?

오른손에 든 꽃다발이, 보기 흉할 정도로 떨리고 있다.

주머니 속에 든 작은 상자를 잡은 왼손이, 필요 이상으로 땀에 젖어 있다.

만난지 다섯번째만에 이런 고백은 당돌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틀림없이, 철두철미하게 당돌하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말하고 나서 후회나는 게 낫다.

...지금까지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전자(前者)의 후회를 해왔는지,

셀 수도 없지만.

오사무 : 좋아...가자.

심호흡.

헛기침.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오사무 : (갈라진 목소리로).........시, 시시실례합니다아아!

용기를 내며 짜낸 큰 소리는,

예상 범위내에서 가장 추한 형태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

.........

오사무 : 시, 실례합니다~!

이번엔 아까보다 좀 나은 음색.

게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

......

.........

오사무 : 실례합니다~!

         요시무라입니다만~!

......

.........

오사무 : 아무도...없나?

몇 번 불러봐도 반응이 없는 문에,

잠겨있는지를 확인해보려고 한 걸음 내딛어...

(드르르륵)

오사무 : 어라?

...자동문?

오사무 :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 : 그렇게 크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들린다고.

오사무 : ...어라?

...인터폰?

오사무 : 아, 죄송합니다.

         나, 아니 저는 요시무라라고 합니다만.

??? : 어디 보고 말하고 있는 거야.

오사무 : ......어라?

...실은 등뒤에 있다거나?

오사무 :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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