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88 (82/94)

 PART-88

  민형은 난생처음 시험 전날 밤이라는 걸 세워보고 학교에 갔다. 옆에 달라

붙어 감시하는 지영의 닥달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녀가 찍어준 문제를 들고 

저녁부터 새벽 4시가 넘는 시간까지 꼬박 연습장에 쓰고 옮기는 작업에 반

복이었다.

  "하아암......!""

  자기도 모르게 엄청나게 큰 하품을 하며 부은 눈을 문지르는 민형. 어쨋

든 오늘 시험 시간에는 두배로 푹 잘 수 있겠다, 고 민형은 생각했다.

  "......"

  앞자리에서 그런 민형을 흘끔 본 의연이 민형의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물었다. 아마도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 민형이 열심히 공부한 후

후유증으로 고생하는가 보다 라고 의연은 생각했을 것이다.

  "너 어제 밤샜나 보구나?"

  "응......? 응......"

  "공부 많이 했니?"

  "엉? 아니 그저......"

  민형은 공부했냐는 의연에 질문을 그저 막연히 넘겨버렸다. 난생처음 시

험 전날에 무엇인가를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민형이 생각하기엔 공

부가 아니었다. 단순히 쓰고 적고 외운 것 뿐. 적어도 공부라면 이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엇인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 민형의 생각이었

다. 연신 하품을 하는 민형에게 의연이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더 밤새는거 처음인가 보지?"

  "응, 너도 밤샜니?"

  "난 시험땐 3시간 밖에 안자."

  "헤? 그런데 그렇게 멀쩡해?"

  3시간 밖에 안잔다고? 시험기간 동안 주욱? 어떻게 그러고도 몸이 견디

냐...... 민형은 의연의 호리호리하고 잘빠진 몸을 슬쩍   어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자들도 하옇튼 무섭다니까......

  "익숙해지면 괜찮아. 3시간만 자도 푹자기만 하면."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말. 어떻게 3시간을 자는

게 익숙해 질 수가 있지? 민형은 아무리 적게 자도 7시간을 넘기지 못하면 

다음날 활동에 심한 지장이 있다고 믿는 녀석이었다. 그런 민형에게 자는 

시간을 할해하며 공부에 열중하는 의연은 신기하다 못해 위대해 보였다.

  "어쨋든 시험 잘봐라. 공부한 보람이 있길 바래."

  "응, 고마워. 너도 잘봐."

  졸린 나머지 건성으로 웃어보인 민형은 의연이 자리로 돌아간 후 어

제 밤새껏 쓰고 적었던 문제들을 떠올려 보았다.

  "......"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  .  .  .  .

  "자 영어는 오래 붙잡고 있는다고 답이 나오는게 아니라는거 알지? 모르

면 얼른 찍고 빨리빨리내라. 시력 좋은 애들은 시력 마이너스 시키고."

  교탁에서 시험지를 모아 두손에 들도 탁탁- 정리하며 감독하는 선생님이

익숙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민형은 턱에 손을 괜채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빨리 찍고 누우면 애들이 흉볼텐데...... 그런데 어제잠을 못자서

너무 졸린데 이거......'

  빨리 찍고 자 버릴 것이냐. 아니면 체면을 위해 억지로라도 시험지를 붙

잡고 있을 것이냐...... 민형은 이 중요한 기로에서 몇분동안이나 고민했

다. 하지만 인간의 생리현상이란 체면 위에 있는 것. 민형은 결국 자연의 

위대한 법칙을 따르기로 했다.

  -슥

  시험지가 앞자리에 학생을 통해 민형에게 넘어왔고 민형은 부은 눈에서 

찔끔 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시험지 1번 문제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민형이

알만한 문제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1번 문제를 읽어 내리면

민형이 솔깃해서 눈을 반짝였다.

  '밑줄친 부분에 들어갈 만한 적당한 단어를 찾아 쓰시오......? 핫, 이

거 의연이 찍어준 문제가 그대로 나왔네. 2점 벌었다.'

  운좋게도 알고 있는 문제가 그대로 출제된 민형. 아무리 건성으로 외웠

다고 한들 눈썰미는 있는 지라 손쉽게 1번 문제에 답을 적었다. 민형은 2

번으로 넘어갔다.

  '네모칸 안에 문장을 읽고 다음 문제에 답하시오...... 아니 이럴수

가!?'

  2번부터 이어지는 문제를 본 민형은 그만 경악을 하고 말았다. 2번부터

6번까지는 하나의 영작을 해석해서 문제에 해당하는 답을 풀이하는 문제.

10줄 남짓되는 이 문장은 어제 지영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공책에 쓰며 

외웠던 3개의 영작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해석해 외워

놓은 민형은 2번부터 6번까지 손쉽게 답을 쓸 수 있었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확률이 있는 답이 보이는데 이거

......? 신기하군......'

  민형은 연필 뒷 부분을 잘근잘근 씹으며 계속해서 문제를 읽어내려갔

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것인지...... 아니면 의연과 지영의 천재성이 민

형을 살린 것인지. 다음 문제들도 모두 지영이 찍어 놓은 문장이 아니면 

의연이 족집게 처럼 집어 놓은 문제와 보기들 이었다. 민형은 잠이 싹

달아났다. 그렇게 민형은 22문제를 푸는 50분 동안 한숨도 졸지 못하고

뚫어지게 시험지를 노려 보았다.

................................................ . . .  .  .  .  .

  

  "으아!! 밑줄 그은 부분에 들어가지 않는 말이었냐!? 난 들어가는 말

인줄 알았지!!! 크아아아!!"

  "어떡해!! B를 E로 잘못 봤어 흑흑!!"

  "우오오오!! 나 두 개 맞았다! 크하하하~!!"

  영어 시험이 끝나고 쉬는 시간. 부리나케 친구들과 답을 맞혀본 아이

들의 함성과 신음이 교실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번 시간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으로 문제라는 것을 풀어본 민형은 아직 실감이 가

지 않는 상태에서 잠자코 아이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문제에 

저렇게 목숨을 걸고 슬퍼할 수 있다니...... 백지도 내본 경험이 많은 민

형은 그런 녀석들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이번 영어 시험도 50점은

넘지 않을까? 조금 욕심인가...... 어쨋든 공부라는게 효과가 있는 것 

같기는 하군? 민형은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혼자서 히죽 웃었다.

  "그래 16번 문제는 OR 가 맞아. 결국 한문제 틀렸군."

  "으아, 의연이 너 한문제 밖에 안틀렸어!? 너 또 일등이다."

  "모르지 다 맞은 사람이 있을지도."

  놀라는 친구의 앞에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의연. 민형은 멀찌감치서

아이들의 대화를 듣고 새삼스럽게 놀랬다. 22문제중에서 한문제가 틀리

다니. 역시 찍어도 많이 맞는다던데 수재들은 틀리군. 

  "......"

  잠시 앉아 있던 민형. 그가 이내 시험지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참으려

고 했지만 너무너무 궁금했다. 과연 몇점이나 맞았을까! 30점만 넘어도 열

심히 공부해 보겠다!! 민형은 시험지를 들고 의연에게 다가갔다.

  "의연아 나 이것좀 채점해줘. 너 한문제 밖에 안 틀렸지?"

  "응, 이리줘봐."

  대수롭지 않게 민형의 시험지를 받아드는 의연. 의연이 샤프를 들고 1번

문제의 답을 체크했다.

  "1번의 2번 맞았네. 이거 틀리면 죽여 버릴생각 이었는데......"

  "고,고마워......"

  역시 보길 잘했군...... 아니 만약에 보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

군. 왠지 찍지 않은 문제가 맞았다는 소리를 들으니 민형은 거짓말 같았

다. 의연은 계속해서 채점을 해 나갔다.

  

  "2번부터 영작 풀이 문제. 어라? 2번도 맞았군. 너 이거 해석 할줄알

아?"

  "엉......? 아니......"

  제대로 안다고 확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형인 쓴웃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의연이 히죽 웃으며 게속해서 채점을 해 나갔다.

  "3번의 1, 4번의1, 5번의 4....... 맞았네."

  연속해서 5번까지의 동그라미,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

다. 그중 찍은거 하나 합해서 다섯문제가 모두 맞은 것이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속으로 이렇게나 렐리가 계속된 적은 없었다. 민형은 긴장했

다.

  "6번의2,7번의 3,8번의3....... 맞았......다......"

  계속해서 샤프로 동그라미를 치는 의연. 그녀의 얼굴에서 천천히 미소가

사라졌고 민형의 눈앞에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현실이 펼쳐졌다. 슬금슬

금 아이들이 몰려들어 의연이 채점하는 민형의 시험지를 뚫어지게 쳐다보

기 시작했다. 

  "17번의 주관식 OPTION 18번의 2,19번의 3,20번의 2......"

  동그라미는 게속쳐졌고 의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모여드는 아이

들은 점점 많아지고 민형은 망연자실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22번 문제까

지 체크한 의연이 시험지를 내려놓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22번 EVENT OF FALL. 다 맞았네."

  "우와아아아아앗!!! 다 맞았데!!!"

  "야! 민형이 영어 100점이래!!!"

  갑작스럽게 교실안에 떠들썩하게 달아 오르고 민형은 그저 한자리에 우

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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