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87
"너 심하다 정말!"
"뭐,뭐가......?"
갑자기 민형을 독서실 밖으로 끌고나와 다짜고짜 이렇게 외치는 의연.
민형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 영문을 모른채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니 도대체 왜 화를 내는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민형에게
의연이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냅다 외쳤다.
"누가 그 쪽지를 다른 사람 보여주라고 했니!? 너 보라고 준거잖아!
너만 보란 말이야 너만!"
"뭐,뭐......? 다른 사람 좀 보여주면 어때서......?"
"어떻다니! 너 내 성의를 무시하는 거냐!?"
"내,내가 언제 네 성의를 무시했다고 그래!!"
완전히 핀트가 맞지 않는 두사람. 의연이 주장하려는 것과 민형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범위는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무엇보다 민형은 시험을 그다
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며 의연은 목숨과 뒤바꿀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얘기가 안된다.
"게다가 그걸 택천이 같은 깡패 자식한테 넘겨 줬다고? 그럼 넌 그거 다
외웠단 말이지!?"
아차! 민형은 한순간 뜨끔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처 그걸 생각지
못했군. 연습장에 적힌 내용을 하나도 외우지 않은 민형은 더욱 당황되었
다. 이래서는 전혀 외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잖아......
"자,잠깐 빌려준 것 뿐이야. 곧 받을꺼야 하하."
"빨리 찾아와! 당장!"
"아,알았어......"
정말 화가 났는지 이마에 핏발까지 세우는 의연. 민형은 왠지 더 이상
의여을 자극해 보았자 좋을 것이 없을 것 같아 슬금슬금 독서실로 돌아갔
다. 민형의 등뒤에선 화가 치밀어 어쩔줄 모르는 의연이 씩씩 거리며 민
형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 . . . . . .
"야."
민형이 택천의 등뒤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던 택천이 고개를 돌렸다.
"어, 너냐? 왜?"
묻는 택천에게 민형은 왠지 말하기가 쑥쓰럽고 짜증이나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까 그 쪽지 다시 줘."
"엉?"
"아까 그거 다시 달라고."
"넌 필요 없다며?"
"필요하니까 다시 줘...... 너 볼거면 얼른 배껴......"
왠지 의연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에 민형은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조급하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택천은 대충 사정을 알았
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민형에게 연습장을 넘겼다.
"자,사실은 나 벌써 3번이나 배꼈어. 적으면서 외웠거든."
"그래? 잘됐다. 줬다가 다시 뺏어가서 미안한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
서 그러니까 이해해라."
"신경꺼. 그 정도로 무슨......"
생각보다 마음이 넓은 놈이군. 민형은 히죽 웃으며 연습장을 챙겨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의연이 차가운 눈으로 민형을 흘겨 보았고 민형은
고개를 숙이고 연습장에 있는 내용을 공책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제서
야 의연은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자기 공책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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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에 갔다 왔다고요?"
집에 돌아오자 지영은 매우 의외라는 듯이 민형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
다. 민형은 매우 지친 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
들었다.
"지겨워서 죽는줄 알았어요. 숨막히기도 하고......"
"민형씨는 독서실에 어울리는 타잎이 아니예요. 그래도 시험을 잘 볼 생
각은 있군요?"
웃으며 묻는 지영. 민형은 하소연 하듯 대꾸했다.
"물론 생각은 있지요. 머리가 안따라 주니까 그렇지."
"그래요? 어디봐요 시험 범위."
시험범위를 보자는 지영에게 범위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고 민형은 바닥
에 주욱 엎드렸다. 아...... 역시 집이 편하긴 편하다. 지영씨의 무릎을
배고 누우니 그대로 스르륵 잠이 들것만 같아 민형은 눈을 감았다. 그때
지영이 손가락으로 민형의 볼을 꼬집었다.
"아직 자지 말아요."
"예? 왜요......?"
약간 불만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민형. 그의 위에서는 풍만한 가슴
위로 범위를 살펴보는 지영의 턱이 보였다. 지영이 물었다.
"여기 이 연습장 가득 적혀 있는건 뭐예요?"
"아,그건 우리반 반장이 나 보라고 요점 정리 해 준거예요."
"그래요......?"
지영이 흐응 고개를 끄덕이며 범위를 내려 놓고 의연이 준 연습장을
잠시동안 살펴 보았다. 지영이 차분하게 연습장에 있는 내용을 다 살펴
본후 민형의 교과서와 비교해 보았다. 민형은 관심을 뚝 끊고 지영의 허
벅지에 얼굴을 옆으로 힌채 조금이라도 더 붙어 보려고 애교(?)를 부리
는 중이었다. 그때 지영이 다리를 살짝 빼냈다.
"민형씨 우리 공부 하죠."
"네!?"
갑자기 왠 봉창 두드리는 소리! 공부라면 지금까지 독서실에서 지겹게
하고 왔는데! 집에까지 와서 공부하잔 소리를 듣게 생겼어요! 민형은 붉으
락 으락 한 얼굴로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영이 웃으며
말했다.
"영어와 독일어는 여기 요점 정리된걸 위주로 하면 되겠어요. 정리가 아
주 잘됐네요. 문제를 내는 선생의 유형도 이 정도면 파악할 수 있고요. 공
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군요."
"......?"
그런 것을 한 번 보고 그렇게나 알 수 있단 말이야? 민형은 조금 신기하
긴했지만 어쨋든 더 이상 골치아픈 문장을 들여다 보고 싶지 않았다. 민형
이 귀찮다는 듯이 돌아 누웠다.
"어휴 난 머리 아파요. 그리고 그런거 외우지도 못해요."
"외우는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찍어 주는 대로 외우기
만 하면 틀림없이 성적이 오를 거예요."
보통때와는 다르게 조금 끈질기게 권유하는 지영. 민형은 벌떡 일어나
앉아 지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 난 공부 보다는 지영씨 예쁜 몸에 관심이 더 가는 중이예요."
"안됐지만 안되겠네요."
지영을 슬쩍 안아 보려는 민형. 그런 민형에게서 살짝 빠져나가며 지
영이 빙그레 웃었다.
"학생의 정신상태가 교사의 몸매에 향해 있으면 공부가 되겠어요? 청소
년 탈선의 주범이예요."
"이것봐요 지영양......"
갑자기 왠 선생 놀음이야? 그런건 지겹게 했으니까 이제 그만 하자구
요! 민형은 머리를 긁적 거리며 짜증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고요......"
"공부하는 학생은 누구나 다 피곤해요."
"어휴 도대체 뭘 하자는 거예요?"
참다 못한 민형이 짜증을 터트렸으나 지영은 역시 능숙한 강사 타잎이
었다. 절대 화를 내지 않고 유순하게 웃으면서 민형의 머리 위에서 민형
을 리드했다.
"시간을 조금만 투자해서 내가 외우라는 것만 외우면 되는 거예요. 그것
도 못해요?"
"난 지금 졸려요! 그리고 콘티도 짜야 한단 말이예요! 영감을 위해서 차라
리 한 번 안아주는게 어때요?"
"학생은 공부가 우선."
부담없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흔드는 지영. 영락없는 여교사 타잎이었
다. 민형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비척비척 지영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
였다. 그래요 돌도 깍으면 다이아몬드가 된다고 하던데요. 한 번 해보자고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