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86
조용했다.
"......"
집에들러 옷을 갈아 입고 나온 독서실은 그야말로 침묵 그 자체였다. 민
형은 엄청나게 긴장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입구 앞에서 발을 구르며
망설였다. 들어가도 되나? 아무나 들어가도 되는걸까? 의연이는 저 안에서
공부하고 있을까? 이거 아무래도 못올곳을 온게 아닐까?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민형은 상기된 얼굴로 입구 앞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야, 너 뭐해?"
"엉?"
그때 문득 등뒤에서 들려오는 의연의 목소리. 민형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 보았다. 민형의 등뒤에는 교복 차림으로 자판기 커피 한잔을 들고 서
있는 의연의 모습이 있었다. 의연이 입구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
던 민형에게 히죽 웃으며 물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어...... 너 어디 있었니?"
"나 요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너 기다리고 있었지. 너도 커피한잔 할
래?"
빙긋 웃으며 들고 있는 자판기 커피를 슬쩍 들어보이는 의연. 민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독서실에 자주 출입하는 사
람들은 민형의 눈에는 모두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
조용하고 정체된 분위기. 칸막이는 그리 높지 않아 옆 사람의 숙인 머
리가 모두 보일 정도의 책상이 연달아 늘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책앞에
얼굴을 파묻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 열심히 보는지 숨소리도 내
지 않고 연필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는 과자를 가득 쌓아 놓고 연
신 먹어대는 사람. 할 일 없이 책앞에서 음료수만 마셔대는 사람도 더러
눈에 띄었다.
"......"
오는게 아니었는데. 다시는 이런데 발도 들여놓지 말아야지. 민형은 속
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연습장을 펼치고 연필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알수
없는 위화감에 좀처럼 자연스럽게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 괜히 왔
어! 어차피 공부도 안 할건데!
- 톡톡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의연이 손가락으로 민형의 어깨를 두드렸고 민
형이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 보았다. 의연이 민형에게 쪽지를 한 장 건네
주었다.
"그거 내일 볼 국사,영어,독일어시험 문제 간추린건데 너도 보고 싶으면
한 번 봐. 말해두는데 그거 외우고 시험에 안 나왔다고 나한테 뭐라 그러
면 안돼."
"어? 아, 고마워."
의연이 건네준 한 장의 종이 쪽지. 그 안에는 작은 볼펜 글씨로 빽빽하
게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걸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민형
은 막상 자료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자료의 사용법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다. 쪽지 안에는 민형이 모르는 말만 가득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 . . . . . . . . . .
30분이 지나고 이제 1시간. 민형은 좀이 쑤셔 미칠 지경이었다. 답답한
공기 엄청난 위화감. 스토리도 전혀 떠오르지 않고 몸은 근질 거렸다. 정
말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대단해. 어떻게 이런 분위기에서 몇시간은 물론
이고 밤을 새울 생각을 다 할 수 있을까? 민형은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그때 번개같이 묻는 사감선생 신의연. 민형은 땀을 삐쭉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응, 화,화장실......"
"독서실에서 화장실 들락날락 하는 사람은 실속없는 사람으로 보여. 그
거 알지?"
"...... 몰랐다."
정곡을 찌르는 대사. 의연이 넌 너무 똑똑해서 미운 여자야. 민형은 조
금 뾰루퉁 해서 힘없는 몸짓으로 책상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바깥에 나가
서 숨쉬기 운동이라도 하고 들어와야지 이대로는 머리가 터질것만 같았
다.
"......?"
그때 문득 민형이 지나가는 자리 옆에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
고 민형은 혹시나 해서 자리에 멈춰섰다. 어라 이녀석?
"......?"
민형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슬쩍 목을 빼 고개를 파묻고 무엇인가를 열
심히 적고 있는 한 학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크헉? 그리고 민형은 어이가
없어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이,이,이 자식이......? 이,이렇게 충격적일 수가......!'
민형은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 입을 크게 벌린채 그대로 그학생
의 등뒤에 멈춰서 있었다.그때 등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는지 공부에 열중
하고 있던 학생 역시 이상한 듯이 뒤를 돌아 보았다. 그순간 학생과 민형
의 얼굴이 딱 마주쳤고 학생의 눈이 2배로 커졌다.
"어...... 어......?"
"자식 놀라긴......"
민형의 얼굴을 알아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학생. 민형은 자기 역시
의외였다는 듯이 피식 웃어 주었다. 그는 바로 유택천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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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가 독서실에 다닐줄은 정말 몰랐는데...... 어,어쨋든 반갑다.
야......"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모르는 유택천. 민형은 유택천과 나란히 휴게실
벽에 기대서 음료수 한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민형이 대꾸했다.
"난 오늘 친구따라 처음 왔는데 넌 여기 항상 오냐?"
"아니, 나도 고3때부터 시험때만......"
고3때 부터라...... 그래도 너는 나보다 낫구나. 자발적으로 독서실에
다닐 생각도 하고 민형은 왠지 우울해져서 음료수를 주욱 들이마셨다. 이
런 놈도 독서실에 다녀가면서 까지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니. 그때 택천이
민형에게 물었다.
"친구랑 왔다고? 누구랑 왔냐......?"
"어? 우리반 반장 있어 의연이라고. 아,참. 너 이거 볼래? 의연이가 나
보라고 준건데......"
대수롭지 않게 택천에게 건넨 의연이 준 시험문제 요약 쪽지. 순간 그
것을 받은 택천이 눈이 휘둥그래 졌다.
"어, 이거 신의연이가 요점정리 해준거라고......?"
"엉, 내일시험문제 요약이라던데. 틀려도 자기 책임 아니래. 근데 난 그
거 어떻게 시험에 써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어떻게 써먹다니!? 통채로 외워야지!?"
"뭐?"
생각보다 흥분하는 택천. 민형이 갑자기 오버 페이스인 텍천에게 눈썹을
실룩거렸고 택천이 말했다.
"신의연이면 우리 학교 전교1등이잖아! 그런거 절대 다른 학생한테 요약
해주지 않을텐데 너 재주 좋다!?"
"뭐어?"
저,전교 1등!? 전교 1등이라고 했냐 너? 민형은 갑자기 두눈이 휘둥그래
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공부를 좀 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전교 1
등일 줄이야! 여,역시 서울대지망은 차원이 다르구나 이거!
"그런데 그걸 통채로 어떻게 외워? 넌 외울 수 있어?"
묻는 민형에게 택천이 대답했다.
"밤새서라도 외워야지! 야 정리도 잘 됐는데......!? 그래봤자 연습장
한 장이잖아! 글씨는 작지만...... 내가 몇일동안 준비한거 때려치고 이
거만 외워도 평소보단 잘보겠다!"
"그,그 정도냐......?"
이것만 외워도 평소보다 잘 볼 정도란 말이지? 하지만 민형은 연습장
한장 분량의 요약을 통째로 외울 자신도 없었다. 지겹게 그걸 언제 외우
고 있어!
"그럼 그거 너 가져."
"뭐 진짜? 넌 안봐?"
"야, 난 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그,그럼 이거 친구들이랑 돌려봐도 되나?"
의외로 순수하게 나오는 택천. 민형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피식 웃으
며 대답했다. 자식 그래도 의리는 있네?
"야, 그걸 뭐 나한테 물어보냐. 내가 너 줬으니까 네 맘대로 하는거지.
돌려보든 말든 사이좋게 잘보던 사이좋게 망치던."
"고,고맙다."
"훗......"
별게 다 고맙네. 이 녀석 생긴건 그렇게 안 생겨 먹었는데 시험에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지? 민형은 갑자기 택천이 귀엽게 느껴졌다.
......................................... . . . . . . . . . .
잠시후 자리에 돌아와 앉은 민형을 흘끔 바라본 의연이 다시 민형의 어
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민형이 고개를 돌리자 의연이 물었다.
"너 내가 준 쪽지 외우고 있니?"
"아,그거......?"
자식 틀려도 책임 안진다고 하더니 외우냐고 확인하는거 보니까 자신은
있는 모양이군. 역시 전교 일등. 민형은 별 생각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말이야 좀전에 택천이 만났는데 빌려줬어."
"뭐?"
민형은 정말 사심없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순간 의
연의 얼굴이 노래 지면서 갑자기 붉으락 으락 하게 눈썹이 떨리기 시작
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민형은 별 생각 없이 연습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었다.
## 고교 3년생의 사랑 ##
- 번외편 -
- 강희연 20세. 현재 서울 서장대학 문예 창작학과 2학년에 재학중.
꼭 이것 말고도 성욱이 알고 있는 희연에 관한 정보는 너무 많아 일일
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성욱은 지갑에 꽂혀 있는 예쁘장하지
만 조금은 도도한 표정의 희연의 사진을 쳐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
었다.
"그거 너네 옆집 누나지?"
"뭐,뭐야 너!"
갑자기 성욱의 옆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아는채를 하는 정호에게 깜
짝놀란 성욱이 붉어진 불을 붉히며 당황한 듯 외쳤다. 서정호. 그는 성욱
의 중학교때 부터의 친구이며 성욱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단짝이기도
했다. 정호는 재빨리 지갑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 넣는 성욱을 향해 딱하다
는 듯이 혀를 차며 물었다.
"정말...... 그 여자는 네가 그런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걸 알고는 있
냐? 이른 저녁부터 사진이나 쳐다보면서 궁상떠는 꼴이라니......"
"시끄러, 이건 직접 받은거야."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드는 정호에게 성욱이 조금은 셀쭉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쏘아 붙혔다. 그말을 들은 정호가 의외라는 듯이 되 물었다.
"그래? 직접 준거란 말이야? 아마 소꿉친구이기 때문이겠지."
"사실은 예쁜 얼굴 두고두고 감상하라고 주더라."
"어련하겠냐......그 여자."
농담조로 중얼거린 성욱의 말을 가볍게 흘려 버리며 정호가 혀를 쯧쯧
찼다. 정성욱 18세. 현재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 그는 어렸을 때 부터 이
웃집에서 함께 살아온 정희연이라는 여성을 좋아한다. 정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성욱과 같은 학교에 들어오게 된 중학교 때 부터였다.
"그보다 안갈래? 엔진 다 식었지?"
정호는 이렇게 말하며 성욱이 걸터 앉아 있는 스즈끼 1500CC의 배기통을
손바닥으로 만져보았다. 조금은 뜨겁지만 훈훈해진 철통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현재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중 엔진의 열이 과해 근
처 놀이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다 18세의 고등학
생. 면허를 따고 한창 폭주로 신을 내기에 한창인 나이다. 정호의 말에 성
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바이 의자에 다리를 걸쳐 매었다.
"OK, 새로 뽑은 1500의 감촉은 좀더 느껴 봐야지. 넌 못 타봐서 모르겠
지만 이건 550이랑은 승차감이 틀리다 이거야."
"시끄러, 이건 자가용이 아니라 오토바이야."
히죽 웃으며 은근한 자랑을 흘려 보내는 성욱에게 뾰로퉁한 정호의 시선
이 꽂혔다. 성욱은 그런 정호의 시선을 뒤편으로 받으며 천천히 오토바이
의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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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르르릉
크고 넓은 배기통에서 호쾌한 엔진 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느덧 시간은
지나 늦은 저녁, 성욱이 집에 돌아가는 지금은 이미 10시가 넘어 있었
다. 거대한 1500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질주하던 성욱의
눈에 낮익은 여성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 성욱아!?"
마침 여성 쪽에서 성욱을 알아보고 신이나서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성
욱은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오토바이를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서 그녀가 오
토바이쪽으로 달려오기를 기다렸다. 흰 원피스에 두권의 책을 들고 있는
그녀는 다름 아닌 이웃 사촌이자 소꿉 친구인 강희연이였다.
"이거야 말로 운이 좋네! 나 집까지 태워줘."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냉큼 뒷 좌에 올라타며 희연이 외쳤다. 그 당당
한 태도는 어렸을 때 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그녀의 성품이었다. 성욱은
잠시 그런 희연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오토바이의 핸들을 붙
잡았다.
"대학생은 원래 이렇게 늦게 다녀?"
흰 원피스를 입은 희연은 예뻤다. 그런 그녀가 이른 늦은 시간까지 시내
를 돌아다니다 왔다고 생각하니 괜시리 마음이 착찹하고 꺼름직해 성욱이
물었다. 대학에서 미팅이니 소개팅이나 잔뜩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
하면 더욱 비참했다.
"뭐야 임마? 야, 그러는 너는 고등학생이 밤 10시까지 오토바이 타고 폭
주냐? 거기다 수험생이."
"으, 그런 소리는 치워......"
한방 먹이려다가 거뜬히 반격당한 성욱이 싫은 소리를 하며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희연은 그런 성욱의 등뒤에서 잠시 성욱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다가 두꺼운 책 모서리로 성욱의 머리를 툭툭 쳤다.
"너 삐졌니? 이건 다 네가 걱정되서 하는 소리야. 이제 곧 대입이 다가
오잖아."
"삐지긴 왜 삐져. 네 잘 빠진 다리 감상중이야."
자신이 조금 죽어들어가는 것 같자 기분을 풀어 주려는 희연에게 얼른
반격하며 성욱이 중얼 거렸다. 동시에 둔탁한 책보가 성욱의 머리를 강타
하고 부어오른 희연이 손가락을 흔들며 입을 열었다.
"누나라고 해."
"......"
새침한 표정으로 정색하는 희연을 바라보며 성욱은 잠자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나라고 부르라는 말은 희연의 입버릇이다. 그러나 둘중 누
구도 그렇게 부르거나 불리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희연이 뭔가 기선을 잡
으려 할 때 자주 쓰는 수법일 뿐이다. 성욱은 관심 뚝 끊은 표정으로 오토
바이의 시동을 걸고 천천히 운전하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집
까지 들어가는 골목은 걸어서는 10분 씩이나 걸리는 긴 골목을 걸어 들어
가야했다. 오토바이만 있다면 큰 도로를 빠져나가 단숨에 집에 도달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욱은 희연을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
다 요즘 어두운 밤 골목에는 치한이나 기타 등등이 자주 출몰하니까.
"오토바이 좋다. 크니까 타기고 편하고."
뒷 좌석에서 성욱의 허리를 껴안은채 희연이 중얼 거렸다. 성욱은 말이
별로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잠자코 그 소리를 듣고 있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2,3분 남짓의 시간동안 희연은
뭐가 그리고 궁금했는지 성욱에게 계속 말을 꺼냈다.
"공부는 잘돼?"
그 물음은 형식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성욱은 일단 대답했다.
"이 오토바이는 공부할 시간을 충분히 할애해서 산거야."
"오라, 날 태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
별 의미없는 말장난이 몇번 오가고 희연은 뾰루퉁해서 말문을 닫았다.
성욱은 언제나 특별히 속을 들여다 보이지 않는 과묵한 편이지만 불쑥불쑥
농담도 잘하고 어둡지 않은 성격에 좋은 아이다. 어렸을 때 부터 함께 자
라온 희연은 성욱의 그런 점을 잘알고 있었다. 물론 공부도 전혀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중학교에 올라와서 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고
여러 가지 색다른 취미를 옮겨 다니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때
는 사진, 2학년때는 축구, 3학년때는 만화, 또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소
설,시, 등등 해서 지금은 이렇게 오토바이에 빠져있다. 무언가 열중하면
푸욱 빠졌다가 가볍게 흘려버리는 조금은 경솔한 성격일 수도 있었다.
"조금은 공부에 신경써도 좋을텐데. 넌 뭐든지 다 잘하잖니?"
"글쎄,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게 하고 싶을 뿐이야."
오토바이 뒤에서 희연은 조금은 재미 없는 대화를 꺼내고 말았다. 성욱
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정작 그녀의 이야기를 성욱은
흘려듣기 일쑤다. '누나' 라던가 권위 있는 사람의 대화가 아닌 친구의 걱
정 따위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뭐든지 다 잘해도 대학에 못가면 재미 없을걸."
"난, 대학에 안가도 괜찮아. 내가 갖고 싶은거만 가지면 돼."
"그게 뭔데?"
불쑥 본심이 나와 버린 성욱에게 희연이 의외라는 듯이 다그쳐 물었
다. 가지고 싶은 거라니? 성욱이 이런 식으로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한 것은 드문 일이다. 성욱의 조바심을 나타내 듯 오토바이가 가속하자 희
연의 갈색머리고 휘날렸다.
"오토바이 말고 또 바뀌었니?"
"아니야, 이건 예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아직 손에 넣지 못
했거든."
"비싼가 보지?"
아무것도 모르는 희연은 성욱의 얼굴이 벌개진 것도 모르고 멋대로 중얼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성욱의 얼굴은 뒷 좌석에 앉아 있는
희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뭐,그다지 비싼건 아니야. 단지 남자들은 손에 넣기 좀 힘든거거든"
"알았다. 여자지."
한순간 성욱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고 말았다. 끼이이익- 큰 소리와 함
께 오토바이가 멈추었고 갑잡스럽게 규형을 잡은 성욱와 희연이 헉헉 거
리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놀라서 사색이 된 희연이 책으로 성욱의
얼굴을 내리치며 외쳤다.
"야 미쳤어!? 갑자기 서면 어떡해!!"
"그,그러니까......!"
희연은 희여대로 성욱은 성욱대로 어쩔줄 모르며 숨을 몰아 쉬웠다. 물
론 희연은 놀란 나머지 돌발적인 행동이었지만 성욱 쪽은 매우 당황한 듯
희연을 반히 쳐다보며 두눈을 희번덕 거렸다.
"어,어떻게 알았어?"
"뭘 어떻게 알아? 여자?"
정신을 딴데 두고 있던 희연이 문득 성욱의 말을 듣고 제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이 놀란게 그것 때문이었군. 에고 놀래라......
"뭐긴 뭐야! 남자가 돈주고 살 수 없으면 그거 밖에 더 있어!? 그러니까
난 너보다 나이가 많은 거라구."
"그,그럼......"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줄 모르는 성욱을 바라보며 희연이 재미있어 죽을
것 같은 속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귀여운 녀석.
어느덧 성욱이도 연애를 할만한 나이가 되서 여자 때문에 고민을 하는구
나. 이렇게 생각을하니 한편으로는 재미있지만 한편으로는 괜시리 쓸쓸한
기분도 없지 않았다. 그때 의기양양한 얼굴의 희연을 향해 성욱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여자가 강희연이라는 것도 아냐?"
그 한순간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던 희연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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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있잖아. 성욱이 같은 남자는 어떻다고 생각해?"
"뭐? 옆집 성욱이 말이냐?"
식탁앞에서 문득 성욱의 이야기를 꺼내는 딸에 말에 놀란 희연의 어머니
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희연을 빤히 쳐다 보았다.
"글쎄, 특별히 나쁜 점은 없지만 여자로서 미래를 걸기엔 고민되는 남자
지. 현 시점에선 말이야."
"흐음, 그런가......"
희연은 수저를 코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의자에 기댔다. 희연의 어머
니가 얌전하지 못한 딸의 콧등에서 수저를 빼앗으며 한마디 했다.
"근데 왜 그런건 물어. 성욱이가 너보고 뭐라고 했니?"
"응, 아니 그냥.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니까."
"그 녀석이 딴생각 하기전에 누나라고 부르라고 해라. 모름지기 남자란
말이야......"
"엄마 그 얘긴 벌써 틀렸어. 성욱인 나보가 '야'라고 한단 말이야. 내
친구들까지 모조리 도매금으로 넘어가 버리는데 더 이상 강요해봤자 소용
없다니까."
"에구, 그녀석 커서 뭐가 되려는지. 야, 너 성욱이한테 기죽으면 안
돼. "
희연의 말을 들은 희연의 어머니가 혀를 쯧쯧차며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
를 계속 했다. 희연은 그런 엄마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천정을 멀뚱멀뚱 쳐다 보았다. 성욱이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 가
슴이 뛸 듯이 두근거렸다. 아니 좋아한다고 말한게 아니고 갖고 싶다고 말
한 것이었지만...... 하옇튼 뭐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표현한단 말이야 그
녀석은. 오죽하면 감정 고백까지 '누구누구를 갖고 싶다' 라고 얘기 하겠
는가. 한편으로 그런 성욱이 괘씸한 희연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 저
녁은 도저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아, 여심은 복잡해.
'그애가 나를 좋아한다니 후훗. 기분 좋다.'
대학에서 만난 남자가 어떤 멋들어진 프로포즈를 해온다고 해도 성욱의
말보다 멋질 것 같지 않았다. 무뚝뚝한 것 같지만 알고보면 재치있는 성욱
이 희연은 좋았다.
'녀석, 그래도 그렇지 내가 물건인가. 가지고 싶다니. 완전히 소유하고
말고를 따지는 것 같네.'
흥, 하고 콧바람을 일으키며 희연은 자기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었다. 성
욱 녀석은 지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
부터 같이 자라온 성욱과 새삼스럽게 사귀게 된다고 해도 무언가 크게 달
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내일 만나면 뭐라고 얘기해 줄까.'
희연은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을 꿰어 맞추면서 허공을 응시한채 한참동
안 잠자코 앉아 있었다.
................................................... . . . . . .
"뭐? 나보고 서장대에 들어가라고?"
일요일 아침 성욱은 뜻밖에 희연의 요구를 받고 얼떨떨한 얼굴로 한자
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장대? 서장대라니...... 얘가 지금 내 성적
을 알고 하는 말인가? 하지만 성욱의 앞에 서 있는 희연은 제법 진지 했
다.
"못들었어? 서장대 시험쳐. 거기 붙으면 우린 캠퍼스 커플이야. 그전엔
안 사귈꺼야. 내가 유치하게 고교생이랑 연애해야 되겠어?"
"흐,흐응...... 그러니까 대학만 들어가면 너는 내거다 이거야?"
"이봐,이봐...... 그런식으로 해석하지마 임마. 난 단지 사귀어 준다고
했을 뿐이야. 연하인 주제에 밝히기는......"
"엉덩이든 방뎅이든."
"너 중요한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태평하게 지껄이고 있는 성욱은 향해 상기라도 시켜줄려는 듯이 희연이
냉정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네가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면 엉덩이고 방뎅이고 없는거야. 알아?"
"으음."
희연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성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쨋든 그날부터
성욱은 조금은 더 공부에 신경을 쓰게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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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성욱이가 대학에 들어왔다 이 말씀이지. 다 이 누님이 각
성제가 되어 준 덕분이라니까~ 호호호"
대학 친구들과 모인 술자리에서 희연은 기분좋은 얼굴로 웃으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옆에는 멋적은 표정의 성욱이 앉아 있었고 주위
에 친구들은 모두 재미있다는 듯이 희연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대단해, 대단해 그렇게 금방 학과 공부를 따라 잡다니 사랑의 힘은 정
말 위대하다니까."
"그러게 말이야. 어쨋든 희연이 영계를 유독 밝히긴 하나 말이야."
친구들은 희연보다 두 살이나 어린 성욱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저
마다 부러움 반 당혹함 반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희연 서장대 문예창작
학과 3학년. 정성욱 서장대 문예창작학과 1학년. 둘은 과 까지도 꼭같은 알
짜 커플이었다.
"어쨋든 폭주족도 대입 반개월 전에 마음잡고 공부하면 대학갈 수 있다
라는 명어를 남기고 만거라니까~ 귀여워 귀여워. 굉장히 누나랑 같이 공부
하고 싶었던 거지? 그렇지? 응?"
"상품이 좋았으니까."
"으와 대담하다~"
성욱의 머리를 토닥거리는 희연에게 성욱이 폭탄선언을 하자 주위에 있
던 친구들은 모두 엄청난 발언에 놀란 듯이 환성을 자아 내었다. 어쨋든
내신 최하의 정성욱. 대입 6개월 전부터 공부에 돌입. 서울 서강대에 재수
없이 합격했다는 신화를 이룩한 인물이다. 강한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
던가. 공부 잘해서 여자를 얻은 보기드문 케이스의 남자가 바로 정 모씨의
아들 모 성욱 군인 것이다.
"모름지기 좋은 상품은 남자를 강하게 만든다 이거지."
맥주를 한잔 들이키면서 성욱이 희연을 힐끔 바라 보았다.
"그렇지?"
이렇게 묻는 성욱의 엉뚱함에 희연과 친구들은 한바탕 웃어 버릴 수 밖
에 없었다.
.................................................... . . . . . . .
술자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온 희연과 성욱의 볼을 차디찬 겨울 바람이
가혹하게 감쌌다. 이곳은 네온이 번쩍이는 서울의 도심. 젊은 이들은 오늘
과 같은 추운 날씨 마저도 포근하고 향기로운 겨울 내음으로 느껴졌다.
"오토바이 안 가져오길 잘했지. 이렇게 추울 때 오토방이를 타면 그 바
람이 살을 에이고 남거든."
목도리 안으로 몸을 움츠리며 희연이 엄살을 부렸다. 반년전 자신이 말
한 대로 정말 대학에 합격 해 버린 성욱. 그는 지금 자신의 캠퍼스 컴플로
서 동생이 아닌 남자로서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그때 말이야."
"응?"
문득 성욱이 희연에게 말을 꺼내자 희연이 고개를 돌렸다. 성욱은 조금
은 멋적은 듯한 얼굴로 희연에게 물었다.
"그때 내가 대학에서 떨어졌으면 정말 우린 사귀지 못하는 거였어? 난
그게 굉장히 궁금해."
얼굴이 빨개져서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적거리며 성욱이 이렇게 물었다.
그와 함께 희연의 얼굴에 그 천진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희연은 자기
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당연한거 아니야?"
"뭐?"
희연은 깔깔깔 웃으며 앞질러 뛰기 시작했다. 주위엔 행인들이 많았지만
아무도 달리는 희연을 가로 막지는 않았다. 한참을 뛰다가 희연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성욱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사귀었을거야."
"?"
아리송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성욱, 성욱이 무슨 소리냐는 듯 희연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후후 웃으며 두손을 입술에 가져간채 빙긋
이 웃었다. 그리고 성욱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우린 소꿉놀이 할때부터 사귀었잖아."
"뭐야?"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 성욱을 살짝 밀어내고 희연은 웃으며 앞장
서 걷기 시작했다.
"아 춥다. 우리 이대로 집에 갈꺼야?"
"글세......"
"멋없긴......"
흥, 콧방귀를 뀌며 희연은 천천히 걸었다. 아름다운 도시의 야경을 걸으
며 그녀는 생각했다. 성욱을 만난 것. 그리고 앞으로 생길 여러 가지 삶.
한해를 끝내는 12월의 겨울, 올해 희연은 성욱이라는 좋은 친구를 잃은 것
이다.
"하지만 괜찮아."
혼자말로 중얼 거리는 희연을 바라보며 성욱이 고개를 갸웃 거리자 그녀
는 얼른 성욱의 팔을 붙잡고 팔짱을 끼며 활짝 웃어 보였다.
"대신 괜찮은 남자가 생겼잖아~"
그것은 앞으로 있을 많은 삶중에 하나로 속할 희연의 기쁨. 앞으로도 앞
으로도 크고 작은 만남이 희연을 기쁘게 할것이고 또 작은 기쁨의 연속으
로 인간은 살아 가게 될 것이다.
"근데 너 누나라고 불러야 돼."
그녀가 새침한 표정으로 성욱을 돌아보며 이렇게 한마디 했다. 한해가
지나가는 12월의 밤. 그날밤은 유난히 포근하기만 했다.
- F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