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PART-54 (50/94)

 PART-54

  지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박스에 옷을 집어넣고 물건들을 포장해서 잘 쌌

다. 이제 조금후면 대전으로 이사를 간다. 민형씨가 있는 대전, 지영은 민

형을 생각하니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처럼 마냥 행복했다. 지영의 오빠 지

훈도 어찌된 일인지 지영의 대전행을 순순히 허락했고 이제 고민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는 내일 떠날 생각이었지만 한 시간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오빠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어차피 오빠는 이집에 오지 않으니까......'

  지훈은 어딘가에 빌라를 얻어 여자와 동거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런 것인지...... 아니면 정말 민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지영이 대전으로 가

는 것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 지훈에게는 대전에 있는 학원으로 옮

기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한 지영이었지만 오빠가 그렇게 순순히 믿어줄 것

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지영이 처녀 이사가나?"

  "아,아주머니."

  근처에 볼일이 있어 언던을 올라가던 구멍가게 주인 아줌마가 마루에 쌓

여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이삿짐 상자를 알아채고 이렇게 물었다. 지영은 

왠지 섭섭해 하는 얼굴의 아주머니에게 미안해 쓴 웃음을 지었다.

  "네, 오늘 이사가게 됐어요. 그동안 잘 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에구, 섭섭해서 어떡해. 그래도 외상도 없는 최고의 단골은 지영이 처

녀뿐이었는데."

  "헤헤...... 대전으로 이사가도 아주머니 같은 가게를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대전으로 가나 보지?"

  "네."

  지영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고 아주머니는 뭔가 대단히 좋은 일이 있는가

보다 라고 짐작했다. 지영은 항상 웃고 있었지만 오늘같이 마음속에서 부

터 밝아져 오는 웃음은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대전에 애인이라도 있나?"

  "네~"

  "엥?"

  농담삼아 물어본 것이었는데 뜻밖에 대답이라 아주머니는 눈이 동그래졌

다. 정말 애인이 있단 말이야?

  "아니, 지영 처녀도 애인 있었어?"

  "그럼요. 제가 뭐 바보인줄 아세요~?"

  지영이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고 주인 아주머니는 시원

섭섭한 표정으로 웃으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아깝다, 나한테도 고만 또래의 아들이 있었으면 당장 데려다 며

느리 삼았을텐데......"

  "헤헤......"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지영은 쑥쓰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

오늘은 아무래도 웃음이 멈춰질 것 같지 않고...... 지영은 어서 빨리 민

형을 만나게 되길 기다리며 하늘을 쳐다 보았다.

  '설마 비가 오진 않겠지?'

  하늘은 지영의 마음과도 같이 푸르고 화창했다.

..................................................... . . . . . . .

  민형은 의연과 함쎄 서점에 들어가 잡지를 뒤적거렸다.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인데도 의연은 버스를 타지 않고 민형을 따라 서점에 들어왔다. 민

형은 그것이 심히 신경 쓰였으나 싫지는 않았다. 의연인 매우 예뻤고 또 

서점에서 여자와 함께 책을 고르는 모양은 결코 나쁘지 않으니까. 이런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 비록 만화라지만 말이야.

  "......"

  하지만 의연은 민형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제1철학,철학의 세계,인간과 

철학의 관계등등, 이상 야릇한 제목이 있는 코너에 가서 책을 훑어보고 있

었다. 민형은 저런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어떻게 저런걸 보지? 그건

고등학생한테는 금기서라고.

  "다 골랐니?"

  책을 훑어보는 일이 끝났는지 의연이 민형에게 다가와 물었다. 민형은 

들고 있던 잡지들을 탁탁 챙겨 손에 들고 카운터로 가려고 했다. 그때 의

연이 대단하다는 듯이 되 물었다.

  "그걸 다 사? 5권이나 된다."

  "2권은 격주간, 3권은 주간이야. 내용도 다 틀린거니까."

  "어차피 만화는 다 똑같은거 아니야?"

  "...... 아니야......"

  도대체 이애는 만화를 뭐라고 생각 하는거야? 그럼 사람은 밥만 먹고 산

다고 생각하냐. 빵도 먹고 회도 먹잖아. 너 반장이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

면 나중에 세상을 험악하게 살게돼...... 민형은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지

만 꾹 참았다. 무엇보다 의연에겐 말발로 밀리니까. 무슨 말이든지 들어

주고 져주는 유지영 선생님과는 레벨이 틀리다. 얜 강적이거든.

  "넌 아까 뭘 본거니?"

  서점에서 나온 민형이 의연이 돌아보고 있던 코너를 의식하며 묻자 의연

이 짧게 대답했다.

  "한국 고전문학 단편 모음집."

  "철학 어쩌고 있던데?"

  "그 코너랑 함께 있더라고."

  "......"

  그랬군...... 너도 사상철학 하고는 관계 없는 애로구나. 어쨋든 안심했

다. 사상철학에 익숙해진 애들은 대학가서 꼭 데모한다고 누가 그러더라.

그런데 한국 고전 문학은 왜 봤니? 민형이 의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왜보다니? 본고사에서 논술 나오잖냐. 미리미리 많이 봐둬야돼."

  보,본고사? 논술? 민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 고사라면 적어도 서

울에서 열손가락 안에 드는 짜라라한 대학에서 보는 것이다. 게다가 논술

대비라면 1류대에서 보는 본고사 과목 아닌가? 그런데 그걸 왜 네가 보

냐?

  "너...... 논술 대비하니......?"

  "응."

  의연이 짧게 대답했고 민형은 조금 놀라웠다. 어...... 너 대학갈려고

그러는구나. 내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의연은 공부는 잘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실업계 왔니?

  "어느대학...... 갈건데......"

  "서울대? 아니면 연대. 그 이하는 생각해 본적이 없어."

  쿠궁, 이거 완전히 충격. 너 그런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단 말이야!? 민

형은 엄청난 쇼크를 먹고 한참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서울대라니

...... 서울대가 아무나 가는덴줄 아나. 게다가 유지영 선생님이 졸업한 

서울대를 가겠다니 괜히 건방져 보이는군...... 민형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다.

  "그,그런데 왜 인문계에 안갔어......?"

  "거긴 내신등급 떨어지잖아. 덕분에 여기선 1등급이야."

  쿠구궁X2. 야, TV에서나 보는 대학 3년 계획의 실행자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있구나 너같은 애가? 민형은 갑자기 놀라움과 함께 자

신이 초라해 지기 시작했다. 누구는 공부못해 싸움만 하도 퇴학당하고 간

신히 지방으로 좌천되서 졸업을 위해 뛰고 있는데...... 누구는 1류대 가

기위해 내신 조절 프러스의 실업계를 지향해? 이거 정말...... 갑자기 한

국의 교육 현실이 다분히 우울해진 민형이었다. 내가 이런 걱정한다고 뭐

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만화 볼 시간에 책 좀 읽으면 어때."

  "......"

  뜨끔한 의연에 시선. 원래는 건방진 것~ 이라고 외치며 한 대 쥐어 박아

쥐야 하지만 그녀의 박력에 압도당해 민형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내신

1등급은 아무나 만나볼 수 있는게 아니다. 게다가 같이 걷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게 한단 말이야. 민형은 의연에 곁에 있는 자신이 갑

자기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긴...... 남자는 공부 못해도 돼. 얼굴만 잘생기면 돼지 뭐."

  야, 그거 혹시 반대 아니냐?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여유있는 대

사를 뿌리는 의연을 째려보며 민형이 초라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너 시집

가면 분명히 이혼할거다...... 두고봐라...... 

  "야,근데"

  문득 의연이 낙심하며 길을 걷는 의연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오늘 너네집 놀러가도 돼?"

  "뭐!?"

  충격X3! 야, 얘 정말 대담하네. 그게 여자애 입에서 함부로 나와도 되는 

소리냐!? 남자애네 집에 놀러 오겠다니, 민형은  갑자기 전신이 떨렸다.

  "우,우리집에는 말이야......"

  "왜,부모님이 친구 데려오는거 싫어하시니? 괜찮아~이렇게 예쁜 애가 가

면 분명히 좋아하실거야."

  놀고있네, 네가 아무리 예뻐도 유지영 선생님의 발밑이나 따라오는 줄

아냐. 민형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마구 고민했다. 여자

애가 집에 오겠다고 한 것은 처음인데...... 게다가 집에 가서 뭐하지? 

당혹스러움에 민형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그냥 놀러가는거야! 뭘 그렇게 한참 고민하니?"

  아아! 이러다가는 쫀쫀한 남자라는 소릴 듣고 말겠어! 어쩌지!! 민형은

현실과 마음 속의 바램을 서로 교차시며 다분히 엄청난 고민을 하기 시작

했다. 의연이 너 정말 너무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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