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내리는 비에, 모든 것이 씻겨가길 (1)
작디작은 마음에, 아파올 가슴에, 찡해 오는 코 끝에, 촉촉해진 눈가에, 차마 뗄 수 없는 입술에.. 그 곳들에 난 모든 것을 올려놓고 차에서 내렸다. 재경누나에게 확실히 얘기를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누나가 많이 아파하겠지만.. 난 재경누나를 마주 볼 수 있는 미래.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화에 의한 대용품.. 나은이의.. 대용품.. 난 그렇게 재경누나를 껴안았었으니까.
"어~ 한루야!"
카페에 들어가자 긴 웨이브펌 머리에 흰색 후드집업을 입고있는 재경누나가 밝게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난 아득해져 옴을 느꼈다. 어쨌든.. 재경누나는 예쁘고, 매력적이며,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그런 여자였다. 난 애써 시선을 떨구며, 누나의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재경누나는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이었다. 나 따위가.. 그 녀의 마음 속에 너무 크게 자리 잡아버린 걸까? 이 죄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투두두둑- 쏴아아아아-
아까부터 머리 위를 드리우던 먹구름이 드디어 비를 뱉어냈다. 억수와 같이 내리는 비에 우산을 쓴 사람들 조차도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 카페 창 밖으로 내 시선에 들어왔다.
"뭐하고 지냈어?"
"뭐.. 좀 일이 많았어."
"난 정말 너보고 싶어서 미치는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너가 연락도 없구.. 나빳어."
"하하..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그런데 저.. 누나."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재경 누나를 바라보았다. 그 때 난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와 눈을 마주친 재경누나의 표정이.. 정말로.. 너무나.. 너무나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 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내 품에 껴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 않은 거겠지.
재경누나의 눈엔 이미 눈물이 한가득이었다. 여자의 감이라는 걸까? 한 때의 장난.. 그런 불 앞에 나방, 바람 앞에 등불.. 그 것이 나와 재경누나였다. 그렇기에 재경누나는 나의 목소리에서 행동에서.. 말투에서.
느낀 것이었다.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내 입에서 아직 우리 더 이상 만나지 말자.. 같은 잔인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우린 이미 이별했다는 것을.
"미안해.. 미안해.."
"갑자기 뭐가? 우리 영화보러갈래? 그리고 저녁도 맛있는데가서 먹자 내가 맛있는데 많이 알아. 그리고 또 뭐할래? 우리.. 응? 한루야.. 말 좀 해봐.. 응?"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미 재경누나의 눈에 한아름 고여있던 눈물은 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경 누나는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나는 그 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될까. 아찔한 절벽 위에서 보이지도 않는 바닥을 내려보고있는 느낌이었다. 비유가 힘들었다. 그만큼 나의 심장은 어떤 의미로 뜀박질을 그만두고있었다.
"왜?.. 왜?.. 이럴거면.. 왜.. 왜 나한테 입맞췄어?"
"솔직하게 얘기하기.. 못하겠어.. 누나.. 마음 더 이상 아프게하기 싫어."
"이미.. 너무 아픈데.."
문득 그런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채웠다. 나는 이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왜 이러고 있는걸까. 어떻게 이러고 있는 걸까.. 나는 아픈 사랑을 해보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의 경험? 아니.. 이런 건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충분하게..
"사랑해.."
재경누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내 귀에 총알과 같이 박혀왔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3시간만에 맹렬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 것이 자신들을 파괴시킨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와 재경누나가 같이 보냈던 그 9시간도.. 내 품에 안겨와 잠을 자던 재경누나는 그런 내게 사랑을 느낀 것일까? 그저.. 우리가 서로 몸을 섞으며 움직였던 허리에, 내질렀던 교성에, 서로의 뜨거운 살갗에
심장이 오작동을 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것이 사랑일까?
그렇게 사랑은.. 너무나도 단순한 것이 아닐까? 단지 심장만 뛰고있다면 그 것이 사랑일까? 그렇기에 섹스는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걸까? 역겹다.
"미안해.. 나.. 가볼게."
난 그렇게 하염없이 울고있는 재경 누나를 내버려둔채로 카페를 나왔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비에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난 바로 옆에 세워둔 차를 내버려두고, 거리를 걸었다. 온 몸에 차가운 비가 아프게 날 맞이하고, 정신은 오히려 아득해져만 갔다.
귀엔 슬픈 음악이 흘러들어오는 듯 했다. 빗소리가 그렇게나 아름다운 선율로 나를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빗물로 눈물을 가려보려해도, 빗물은 눈물과 색이 달랐다.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울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미친듯이 내려오는 이 비가 너무 반가울 뿐이었다.
턱-
"크윽.."
보도블럭에 걸려 넘어져 비에 식어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온 몸이 부딪혔다. 코에선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졌고, 무릎도 깨질 듯이 아파왔다. 바닥을 짚고 다시 일어났다.
가만히 서서 바라본 거리의 끝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빗물에 온 몸이 흠뻑 젖은 거리의 들개.
"으아아아아아!!!"
얼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져 내렸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나은이에게도 재경누나에게도.. 나라는 존재는 악惡 일까? 난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다시 일어나 빗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나은아.."
"한루야!!"
계속해서 내리는 비 속에 난 나은이의 숙소 앞까지 왔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와버린 것이었다. 온 몸은 식을 대로 식어 시체와 같이 하얘졌고, 입술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하게 나를 본 나은이가 이렇게 뛰어나온 것이었다.
"드.. 들어가.. 비 많이.. .."
포옥-
"흐윽.. 흐으으윽.."
나은이는 쓰고있던 우산도 떨어트린채로 내 품에 안겨왔다. 난 그 녀가 차가운 내 몸에 닿아 감기에라도 걸릴까, 나은이를 밀어내려 해보았지만 나은이는 나를 꽉 잡은 채로 놓지 않았다.
"나은아.. 가.. 감기걸려.."
"너는?!"
"나.. 나는.. 이래도.. 싸잖아.."
"뭐가?! 난 괜찮단 말이야! 내 잘못이 더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너와 어떻게 다시 화해를 해야될까 생각하고 있었단 말야!!"
비 소리에도 나은이의 목소리는 청아하게 내 귀를 울렸다. 이윽고 내 눈에서도 무언가 뜨거운 것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힘겹게 손을 들어 나은이를 꽉 껴안았다.
내리는 비에.. 우리는 이렇게.. 굳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사랑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너무 단순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우리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단어이기에..
우린 사랑이었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