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완)
2020년 7월 19일.
아몬과 연구자들의 끈질긴 연구 끝에 지구가 창세가 시작된 ‘차원의 배꼽’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모든 차원의 공통된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지구가 전란에 휘말리지 않는 편이 낫다는 사실이 영능학적으로 완벽하게 증명된 것이다.
지구연맹은 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바탕으로 모든 차원 문명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 ‘지구 불가침 조약’을 안건으로 내걸었다.
그때 나는 모든 이가 모인 앞에서 선언했다.
“지금, 허수바루블의 계약 수호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모두 약속하세요. 지구는 영원히 지구연맹의 영토이며, 그 어떤 세력도 전쟁이나 도발을 걸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하늘의 별보다도 훨씬 훨씬 더 많은 차원 문명의 지도자들 앞에서 내 존재감을 또렷하게 보여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내 옆에 남은 내 물건들의 아우라를 한껏 끌어 올렸다.
황금색 아우라가 파도를 타고, 악몽 사슬과 세계수의 걸음과 거인창과 탐과… 총 11개의 내 소중한 물건들과 이성계의 활을 타고 피어오른다.
그걸 지켜본 지도자들 사이에선 웅성거림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저 아우라는?]
[황금색 아우라도 있어?]
의문 섞인 웅성거림들 사이에서 비명처럼 목소리 하나가 터져 나왔다.
[애장품이야! 소장품보다도 위에 있는… 맙소사,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단 말인가?]
애장품.
그건 내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었다. 그래. 파도야, 악몽사슬아, 절규를 삼킨 밤아, 나랑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너희가 내 애장품이 아니면 대체 뭐겠냐?
나는 기세를 한껏 더 끌어 올리며 물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이 약속은 지구가 단지 차원의 배꼽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만으로는 얻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만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지구연맹을 날려 버리고 타키넷의 상임 이사 차원들이 지구를 자신들의 공동 구역으로 삼아 버리는 것도 방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러기에는 지구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신살 병기가 있었고, 그 신살 병기로 아갈타의 본차원을 날려 버릴 정도의 뛰어난 전폭기(사실은 서민서)를 보유하고 있었고, 멸세 병기를 침묵시킨 애장품의 소유자인 나도 있었다.
평화는 결국 힘이 있어야 쟁취하는 것.
차원 지도자들은 생각했다.
‘지구연맹의 국방력도 만만한 게 아니야.’
‘이게 맞지. 애초에 지구 차원의 정명자들이잖아?’
‘다 같이 숟가락 못 얹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지…….’
저마다의 계산은 달랐지만 도달한 결론은 동일했다.
[조약에 서명하겠소.]
그렇게 ‘지구 불가침 조약’이 성사되었다.
항구적인 평화의 시작이었다.
* * *
평화.
태풍이 몰아쳐 소나기는 지구를 녹일 기세로 퍼붓고, 바람이 해일처럼 지상을 쓸어 가고, 후두두두, 후우우웅, 비바람 소리가 귀를 부술 듯이 두들기다가 문득 조용해진다. 햇살이 여기저기 떨어진다. 드륵, 창을 열면 비에 젖은 흙냄새가 훅 끼쳐 오고, 짹짹 참새 소리가 서늘한 바람에 실려 온다.
‘평화의 감각’이 온몸을 적신다.
지금 지구가 그랬다.
1년 24시간 정신없이 돌아가던 공장의 공장장은 어린 소년공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
소년은 화들짝 놀라서 되묻는다.
“네? 제,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런 거 아냐. 지구연맹에서 내려온 정책이야. 이제 미성년전자한테는 일 못 시켜.”
소년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일을 못 하면… 무기도 못 사잖아요. 전공 점수 채우려면 던전 돌아야 하는데…….”
“이제 미성년자는 던전도 못 들어가.”
“네에? 레알요? 아, 근데 그래도 일을 못 하면 먹을 것도… 잘 데도…….”
“야.”
“네?”
“여기 이 서류 들고, 학교 가라.”
“학교?”
“그래. 이제 학교도 의무야. 학교 가면 네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이랑 적성에 맞게 교육도 해 줄 거고, 숙식 제공에 용돈까지 줄 거다. 이제 다른 걱정은 말고 가서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노는 것만 해.”
“진짜예요?”
“그래.”
“왜요? 공짜로 그렇게 해 준다고요? 왜요?”
“왜긴 왜야.”
공장장은 자기도 모르게 헤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꺼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자주 놀러 올게요!”
소년은 신이 나서 서류를 들고 떠나갔다.
공장장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 나이도 기억 못 하고 줄곧 거리에서 살아온 11살~13살배기의 전쟁고아를 거둬서 일을 시킨 지도 어언 2년. 그 아이가 이제 공장을 떠나 공부를 하러 간다.
“이게 맞는 거지.”
공장장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번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다.
깡- 까앙-
공방 거리에서는 물건을 두드리는 소리가 영혼까지 땅땅 울려 대고.
“하나! 하면 영혼을 부풀리고, 둘! 하면 영혼을 응축한다! 자, 하나!”
도장 거리에서는 영력을 단련하는 수련생들의 영혼들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이번에 영혼 간 이미지 전달에 관한 논문 읽었어?]
“아, 알아. 영혼 SNS 시스템에 대한 소고 말이지?”
[나도 들었어. 그거 잘만 디벨롭 하면 작은 규모의 유사 타키넷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다고 하던데?]
학술 거리에서는 지구인 학생들과 이계인 학생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이어 간다.
땅에서는 비에 젖은 흙냄새가 나고, 짹짹 참새가 울고, 사람들의 감각엔 평화가 꽉꽉 들어찬다. 나는 [만상공감]이 전해 주는 그 감각에 취하며 길고 긴 낮잠에 들었다.
* * *
“아니, 내가 이 짬에 학교를 다녀야 하냐고!”
까막이는 쉬지 않고 불평을 해 댔다. 데미안은 그 가소로운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다가 한마디를 했다.
“법이 그렇게 개정됐는데 따라야지. 소시민 의장님이 직접 지시했다면서?”
“으아악! 그러니까! 형님은 왜 이제 와서 학교를 가야 한다고 그러는 거냐고! 그냥 차라리 무한 비무행을 하는 게 낫겠다!”
“학교 가야지. 너, 미성년자에다가 초등학교도 안 나왔다며?”
“너도 미성년자인데 학교 안 가잖아!”
“루드비히는 10살만 돼도 벌써 대학 졸업하고 학사 학위자가 된단다?”
“으악! 아무튼 난 학교 싫다고. 거기 가서 꼬마들하고 뭐 하고 놀아!”
“왜? 너 다니는 학교에 권승리 아가씨도 다닌다면서.”
“으윽… 그 사람은 원래 좀 이상한 사람이잖아. 아틀라스 클럽 사람들은 공사판을 돌아다니질 않나, 대장인 권승리 아가씨는 학교를 다니질 않나… 하지만 난 정상이라고!”
“학교를 나와야 정상이지, 꼬맹아.”
“나 꼬맹이 아니거든? 너보다 키 크거든? 루드비히가의 도련님이라고 네가 키도 큰 줄 아냐?!”
까막이가 발끈하자 데미안 뒤에 서 있던 리디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도련님한테 말버릇이…….”
리디아의 기세에 찔끔 겁을 먹은 까막이가 화들짝 시계를 보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 나 숙제하러 가야 돼! 안녕! 또 봐!”
더 까불다간 리디아에게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당하는 수가 있었다. 까막이는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데미안과 리디아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쿡쿡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리디아가 말했다.
“결국 말씀 안 하시기로 한 건가요?”
목적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데미안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아아, 뭐,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나인걸? 그냥 나 편한 대로 지내려고.”
현재 데미안은 ‘제천대성의 터럭’을 제거하고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하지만 옷 입는 거나 머리 스타일 등은 예전과 동일한, 도련님 데미안의 모습 그대로였다.
“예전에 한 번 원피스 입고 돌아다녀 봤잖아. 근데 영 어색하더라. 난 이게 편해.”
그녀는 굳이 억지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비록 원해서 도련님으로 살아왔던 건 아니지만, 원래 모습을 찾는다고 또 여태 살아온 방식을 다 부정하고 바꾸는 것도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 이젠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꼭 아가씨, 도련님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나눌 필요 있을까?. 이제부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바뀌면 바뀌는 대로, 안 바뀌면 안 바뀌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려고. 뭐 아직은… 아가씨라는 말이 영 어색하기도 하고.”
심지어 주변사람들이 눈치채는 것도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소시민처럼 대번에 눈치채면 말해 주고 까막이처럼 눈치 못 채면 그냥 눈치챌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으로.
그냥 그러고 싶으니 그렇게 한다.
자유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니까.
“…너무 좋네요.”
리디아는 미소를 지었다.
데미안은 느릿느릿 시간을 두고 찬찬히 변해 갈 것이다. 그리고 리디아에게는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무수한 나날이 남아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행복감이 그녀의 가슴을 따스하게 적셨다.
리디아는 울컥 치미려는 눈물을 삼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소시민 님.’
살아서 이 순간을 지켜볼 수 있게 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고.
* * *
흐음- 하아!
그래! 이 냄새다.
질 좋은 이계 동물의 가죽 냄새. 잘 제련된 이계 금속의 반짝거림. 좋은 옷을 쫙 빼입고 나를 기다리는 종업원들.
가슴이 떨린다. 무한한 차원이 모이는 타키넷. 매일매일 와도 매일 새로운 감각을 찾을 수 있는 마법의 초콜릿 상자 같은 세상.
“이거 좋네요. ‘사상 필기 펜’이라고요?”
[역시… 매번 손님의 안목에 놀랍니다. 예. 이번에 아르헴 차원의 대현자가 공들여 만든 필기 펜입니다. 생각만 해도 허공이든 땅이든 종이든, 심지아 누군가의 기억 속에도 글씨를 새겨 넣을 수 있는 펜이지요. 사용법도 간단합니다. 손님의 경우엔 손가락 끝에 끼우고 쓰고 싶은 글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되지요. 저희 품질 관리사들이 시필을 해 보고 그 필기감에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한번 써 보시지요.]
종업원의 말은 옳았다.
스으윽.
손가락 끝에 골무 같은 것을 끼우고 허공을 향해 글자를 떠올리는 순간, 누가 뇌를 시원하게 긁어 주는 듯한 감각과 함께 허공에 글자가 슥슥 써졌다.
“아! 이거 좋다!”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글자를 쓰면 쓸수록,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머릿속이 시원해지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술술 떠오른다. 한번 쓰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이게 최상급의 사상 필기 펜인가?
‘윤희정 장인한테 선물해 주면 좋아하겠다.’
가격이 상당한 물건이지만 윤희정 장인에게는 전혀 아깝지가 않다. 지구연맹의 의장이자 지구 대부분의 산업에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내가 돈이 부족할 리도 없고.
희희낙락하며 물건을 사는 나를 보고 권승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거저거 또 신났네, 신났어. 계속 그렇게 사치를 계속하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니, 그 무슨 서운한 말씀을?
나는 권승리를 살짝 째려보며 답해 주었다.
“그렇게 내가 걱정되면 내가 선물한 물건들부터 반납하고 말하지?”
“아니. 나는 네가 물건 살 때가 젤 멋있어 보이더라고.”
갑자기 말을 바꾸며 실실대는 권승리. 녀석이 신은 신발, 손에 낀 장갑, 셔츠 하나하나 다 내가 구해 준 것이다. [법칙왜곡]을 가진 권승리에게는 템발이라는 게 크게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 권승리에게 잘 맞는 것, 권승리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고심해서 골라 준 물건들이었다.
툴툴거리는 녀석이긴 해도 저렇게 꼬박꼬박 잘 입고 다니는 걸 보면 뿌듯하다.
“아무튼, 자, 그럼 난 이만 투기장 가서 한판 뛸게.”
권승리는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요즘 학교를 다니는 권승리는 다른 건 모두 마음에 들지만 몸 풀 데가 없어서 답답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타키넷에서 투기장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틈틈이 투기장에 나가서 몸을 푸는 것 같았다. 벌써 12회 연속 챔피언을 먹었다던가? 솔직히 차원강습 시스템으로 장비가 제한되는 경기에 차원 격류를 가지고 노는 권승리가 출전한다는 것부터가 반칙 같았지만… 그녀만 등장하면 관중의 환호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
나는 멀어지는 권승리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우리 아가씨… 아니, 도련님을 바라보았다. 와, 놀랐다. 사실 도련님을 [만상공감]으로 볼 때마다 뭔가 희뿌옇게 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었다. 그런데 실은 여자였다니? 도련님은 연출가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진짜 자기 몸은 숨겨 두고 제천대성의 터럭으로 만든 가짜 몸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던 것이다.
‘…이 생각만 하면 연출가 그 새끼 되살려서 또 패 주고 싶어진다니까.’
사실을 알게 되고서 도련님에게 ‘아가씨라고 불러야 되나요?’ 그랬더니 하던 대로 해 달라고 해서 그냥 도련님이라고 계속 부르게 됐다.
도련님은 지금 명품관 한편에 마련된 칵테일 바에서 아몬과 칵테일을 한잔하는 중이었다. 미성년자가 무슨 술이냐 하겠지만, 어차피 이계 기술로 만들어진 칵테일에는 알코올이 아닌 영혼 주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나이와 무관하게 마셔도 무해하다.
아몬은 낄낄대면서 도련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즘 피핀 차원 방송 중 절반은 자네 이야기라더라.]
“네? 지구에 프라이버시 보호 조약 걸렸잖아요?”
[아, 그게 진짜 방송이 아니라, 뭐라고 해야 되나…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송이야.]
“네? 저요?”
[그래, 그래. 리뷰 같은 거지. 그때 데미안 도련님 졸라 멋있지 않았냐라고 방송 진행자가 말하면 막 시청자들이 호응하고, 만약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도련님은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상상하면서 지들끼리 막 팬픽 같은 것도 만들고 그러나봐. 크큭.]
그 말을 들은 데미안은 딱히 관심도 없다는 듯이 들고 있던 칵테일 한 잔을 홀랑 마셔 버리며 한마디 했다.
“하, 여전하네. 더러운 놈들.”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참… 자연스럽고 당당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우리 도련님답게.
“선배, 선배. 이건 어때요?”
옆에서 같이 쇼핑 중이던 서민서가 물었다. 엄마에게 선물할 새 침대를 고르는 중이라고 했다.
서민서도 안목을 키우라고 알아서 고르게 내버려 뒀더니 혼자 한참을 끙끙대다가 침대 하나를 골랐다.
오, 나쁘지 않았다.
100개도 넘는 최상급 침대 중 톱 5 안에는 든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역시 이 실프의 바람 침대가 나을 것 같아. 주무실 때 조금 뒤척거리시지 않아?”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얘가 아직도 날 모르네. 그런 건 보자마자 안다.
“그래. 뒤척거리시는 분한테는 어떻게 뒤척거리든 바람이 딱 알맞게 안아 주는 실프의 바람 침대가 최고야. 온도 조절 기능까지 있어서 이불 하나 안 덮고 자도 꿀잠이라고.”
서민서한테 침대까지 골라 주며 나는 생각했다.
‘행복하다.’
정말 그랬다.
행복이라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건 물건에 있는 거라고 답하겠다. 물건 없이 사람은 홀로 설 수 없다.
기타를 치는 사람은 기타 피크를 한 백 개쯤 닳게 만들며 기타의 고수가 되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러닝화를 수십 개씩 말아먹으며 달리기 선수가 된다. 하다못해 근육을 키우는 이들도 무거운 쇠와 친해지며 근육을 키우지 않던가?
물건을 쓴다는 것은 나를 확장하는 것이자 나의 성질을 더 깊이 깨닫고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좋은 물건을 서로 나누면서 우리는 관계를 만든다.
그러니까.
지금 난 행복했다. 아주 많이.
“행복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 한 마디에 서민서가 실실 웃으며 내 손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아, 이 역시 행복하다.
참 이상하지.
분명 이번 생은 그냥 내 한 몸의 행복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골치 아픈 지구의 문제는 영웅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냥 좋은 물건이나 즐기겠다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 길에 끝에서 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좋은 물건들은 나를 점점 성장시키고, 나를 점점 더 좋은 사람들로 이끌었고, 마침내 이 평화와 행복을 내게 선물했다.
좋다. 좋은 일이다.
흐음-
코로 숨을 들이켜니 맑고 청량한 바람이 가득했다.
소시민蘇颸旼.
가을 하늘의 맑은 바람.
내 이름처럼.
(완결)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소시민의 여정을 함께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년을 넘겨 버린 시간이 증명하는 것처럼 그 어떤 작품보다 펑크를 많이, 오래 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지켜봐 주신 독자분들께 각별한 죄송함과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이번 작을 쓰면서 떠올렸던 두 가지 키워드는 ‘가볍게’ 그리고 ‘관계’였습니다. 이전보다 좀 더 가벼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인물들 간의 관계가 잘 드러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잘되지 않아서 방황한 시간도 길었지만, 그래도 또 그 어떤 작품보다도 쓰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제 작품에 ‘죽음’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제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겪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마라도 낀 건지 2013년부터 매년매년 가깝고 아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늘 장례식장에 가서 하염없이 울어야 했습니다. 작년에도 그 징크스는 여지없이 저를 따라붙었고요.
비단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더라도 오래된 우울감은 항상 제게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모로 그걸 극복해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글에서도 좀 더 가벼워지고 삶에서도 좀 더 가벼워지길 바랐습니다.
다행히 올해 초 난생처음 가 본 정신과에서의 약 처방은 제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5월부터는 웹소설 작가로 부끄럽지 않은 속도로 연재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가라앉고 고통스러워서 병원을 갔던 건데 예기치 않게 업무 효율까지 올라가서 얼마나 신기하고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은 어딜 가나 ‘약과 운동’ 이 두 가지를 항상 추천합니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서도 ‘이제 내 삶에는 더 이상 좋은 일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덤으로 살고 있다.’ 등등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떨어진 휴지 하나 짚기 어려운 지독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이 있다면 주저 없이 병원을 찾아 약 처방을 받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조금 상태가 나아지면 운동을 시작해 보세요.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어떤 독자님이 말하신 것처럼 우울은 약으로 끊어 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운동을 더하면 효과가 배가 되고요.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운동’과 관련한 소재로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이번 작을 쓰면서 배운 것들과 한결 탄탄해진 마음으로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를 써 낼 자신이 생겼습니다. 다음 작도 기대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시민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보다 멋진 환상을 찾아내고 써 보고 싶은 제 여정은 계속됩니다. 앞으로도 함께해 주세요.
오늘도,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