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211화 (211/212)

17. 종전

소설과 달리 마지막 순간에 주마등이 스치는 일은 없었다.

서민서가 떠올린 건 단 한 마디였을 뿐이다.

‘선배!’

아케르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그대로 덮어 버리던 순간이었다. 명백한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도무지 꼼짝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순간.

콰직!

살을 꿰뚫는 살벌한 소리가 들려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바로 그 순간.

‘어?’

서민서는 깨달았다, 꿰뚫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케르의 가슴이었다는 것을.

아케르의 가슴을 뚫고 검 하나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제야 후끈, 뺨에 와 닿는 태양 강기의 열기.

[끄아아아악!]

아케르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 아케르를 밀치며 재빨리 서민서를 감싸 안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사람… 아니, 이계인이 있었다.

“우루스… 그랜드 마스터님? 왜? 어떻게?”

수많은 의문이 담긴 그 얼굴을 보면서 우루스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데미안 사령관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몰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서민서 님을 따라간다면 제가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요.]

그렇게 서민서를 내려놓고 다시 아케르를 노려보는 우루스의 눈에 초록색 불꽃이 번개처럼 튀었다.

[아케르… 네가 내미슈 장군님을 시해한 이후 매일매일 널 죽이는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다.]

[너, 너……! 감히……!]

[매일 밤마다 악몽을 꿨거든, 내가 장군님을 지켜 내지 못했던 그날의 싸움을. 그렇게 싸움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면서 아주 선명하게 알 수 있었지. 네가 어떤 권능 사용자인지, 어떤 약점을 지녔는지.]

우루스는 내미슈의 검이 아케르의 몸을 그냥 통과해 버리던 장면을 기억했다. 아케르의 권능은 틀림없이 [피해무효화]. 하지만 동시에 우루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노에 차서 마구잡이로 내질렀던 자신의 마지막 일격이 아케르의 가슴팍을 스쳐 픽! 하고 피가 몇 방울 튀던 그 장면을. 어째서 그때는 [피해무효화]가 발동하지 않았을까?

[아마 재사용이 가능할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리거나 아니면 미리 인지하지 못한 공격은 무효화하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어.]

신살 병기의 폭발조차도 무효화한 아케르의 권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가해진 우루스의 기습에는 반응하지 못했다.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렸든, 완벽한 기습 덕분이었든, 어쨌든 공격은 성공했다. 데미안의 예측대로.

[중요한 건 이 사실뿐이지. 너는 이제 죽는다.]

우루스의 선언에 아케르는 몸이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최상급의 차원강습 시스템에는 회복 기능도 있었지만, 태양 강기에 입은 상처는 그렇게 간단하게 치료할 수가 없다. 최상의 의료 장비로 오랫동안 치료하지 않으면 계속 상처를 태우며 번져 가는 끔찍한 저주와도 같았다. 그런 태양 강기에 가슴이 꿰뚫렸다. 아무리 아케르라고 해도 이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만전의 상태인 센타울의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자, 잠깐……!]

어떻게든 살아야겠는데, 살길이 보이질 않으니 “잠깐” 같은 소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우루스는 그에게 시간을 줄 마음이 없었다. 그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아케르를 조롱했다.

[죽어 가는 네놈은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게 정말 궁금했다.]

그 말은 죽어 가는 내미슈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케르가 했던 그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준 것이었다.

[크으으아악!]

궁지에 몰린 아케르가 태양 강기를 뽑아내며 우루스에게 달려들었다. 아갈타 최고 원수의 무용은 과연 명불허전이었지만, 이 정도의 불리함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약 5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아케르의 목은 우루스의 칼날 아래 떨어졌다.

“와…….”

서민서는 그 싸움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죽다가 살아났더니 눈앞에서는 괴수들이 싸우고 있어서 얼이 빠지고,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지구에서 몰래 딸려 보낸 지원군이 나타나서 고맙고, 놀랍고…….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자기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 선배! 귀띔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아케르를 죽이고 돌아온 우루스가 그 말에 웃으며 화답했다.

[당신이 알았다면 미래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반응을 통해 아케르가 제 존재를 미리 눈치챈다거나 하는 방식으로요.]

“음… 그건 모르는 거 아니에요?”

[지구에는 그걸 아는 사람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그제야 데미안의 능력이 생각난 서민서는 입을 다물었다.

아, 다 알고 있었던 거구나.

그러고 보니.

‘그래서 선배가 나 떠날 때 걱정을 그렇게 많이 했던 거구나.’

단순히 차원 결계를 뚫는 걸 걱정했다고 생각했는데, 안절부절못하던 그 모습에는 아케르와의 일전을 걱정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참… 잘도 사지로 내몰았겠다.’

야속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정작 가슴에 퍼지는 따스한 감정은 고마움이었다.

소시민에게도, 데미안에게도.

서민서는 그런 마음을 듬뿍 담아 고개를 푹 숙이고 눈앞의 우루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우루스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지킬 수 있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지긋지긋했던 후회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쓸쓸한 눈빛으로 목이 잘린 아케르를 내려다보다가 그 목과 시체를 아공간 가방에 집어넣고는 서민서에게 물었다.

[아케르를 잡고 난 이후에는 서민서 당신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서민서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저 차원 너머 머나먼 곳에서는 그녀의 다정한 친구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한창 싸우고 있을 것이다.

문득 그들이 보고 싶었고 많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임무.

“데미안 도련님이 짚어 준 곳마다에 신살 병기를 떨어뜨려야죠. 하나. 하나. 놈들의 저항 의지가 완전히 꺾일 때까지.”

그렇게 말하고 서민서는 생각했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열심히 싸우다 보면 금방 다시 웃으며 모두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싸워야겠다고.

‘선배, 잘하고 있지? 여기는 잘 해결됐어. 할 일 마저 잘 끝내고 돌아갈게. 다 이기고 다시 봅시다.’

서민서는 걱정을 떨치고 싸우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승리할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뇌면서.

* * *

혹시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을 걷다가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가?

그때 불현듯 찾아오는 깊은 어둠에 흠칫 놀라 본 적이 있는가?

어둠 속에 나타난 화면 속 밝은 빛은 순식간에 주변의 다른 빛을 죽여 버려서, 발밑은커녕 바로 옆조차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을 만들어 버린다. 공허한 우주 속에 핸드폰 화면만 둥둥 떠 있는 듯한 기묘한 공포감.

박민희와 강전구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화랑단이 마주한 공포가 바로 그런 식이었다.

“이, 이거 좀 위험한 것 아닙니까?”

지구 최고의 정예인 화랑단원들마저 겁에 질렸다.

“점점 어두워지더니… 지금은…….”

“검은 안개가 낀 것 같아요. 무슨 괴물들이 불쑥불쑥! 크윽!”

보이지 않던 멸세 병기가 던전과 괴물의 형태로 바뀌었기에 지금까지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급기야 지금은 보이지 않는 안개가 눈앞을 꽉 메운 것처럼, 푸른 거인들이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불쑥불쑥 나타나는 형국이었다.

전투 피로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그에 따른 피해도 커졌다.

“소, 소시민 사령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아닐까요?”

화랑단원 하나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민희는 손을 불쑥 뻗어 그 따위 질문을 한 놈을 찾았다.

“야, 너 어딨어.”

“여, 여기 있습니다!”

극도로 좁아진 시야 탓에 더듬더듬, 두리번두리번한 끝에 건방진 질문을 한 놈의 멱살을 틀어쥐고 뺨에 주먹 한 대를 꽂아 줄 수 있었다.

퍼억-!

“큭……!”

붙잡힌 멱살 때문에 나가떨어지지도 못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고 땅바닥에 던졌다.

소시민 사령관에게 변고가 생긴 게 아니냐고? 그건 전쟁의 패배를 의미했다. 지금 저 새끼는 우리가 이미 진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 거였다. 군인 출신의 박민희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태도.

“미친놈들아, 사령관님 걱정할 시간에 니들이나 걱정해. 우리 임무가 뭐냐?”

“게, 게이트에 진입해 푸른 거인을 밀어내고 던전 핵을 파괴하는 겁니다.”

“그래. 그럼 그걸 하자고. 보이든 안 보이든 무슨 상관인데? 각자 싸워. 네 눈앞의 적만 보이면 싸울 수 있는 것 아냐?! 그놈만 보고 싸워. 설령 안 보여도 싸워! 영력을 주변에 뿌리면 대충 감지할 수 있잖아! 지금 우리 싸움이 장난이야?! 여기서 지면? 다 날아간다. 지구도, 우리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싸워. 네 할 일을 해!”

뻥!

주저앉은 화랑단원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박민희는 다시 어두컴컴한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우오오오오-!

거대한 비명 소리 같은 것이 사방을 흔들고 지나간 직후.

훅!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자신의 발끝조차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

‘아이씨… 큰일 났네.’

박민희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그저 상황에 맞게 지휘를 내렸다.

“강전구!”

“예.”

“최전방에 서. 얻어맞아도 견딜 수 있게 무게 최대로 올리고 달려들어. 나머지!”

“예!”

“저 탱크 같은 친구가 쿵쿵 소리 내면서 뛰어가면 그 소리 따라서 달려. 전방으로 영력 뿌려서 감지하고, 아니다 싶으면 무조건 갈겨! 우리는 앞으로 간다! 보이든 안 보이든, 죽든 말든 머리 들이밀고 비벼! 할 일을 해!”

“예……!”

조금 망설이는 그 대답에 박민희는 다시 혀를 차고 말했다.

“이기니까, 아직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달리자, 얘들아. 마지막까지 싸우자. 사령관님도 그러고 있을 거다.”

“예… 예!”

“목소리가 작다!”

쿵!

파지지직!

박민희가 땅을 세게 구르자 번개가 발밑에서 피어나 화랑단원들 전원을 짜릿하게 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 지독한 어둠은 번개에도 밝아지지 않았지만, 그 짜릿함만큼은 화랑단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박민희의 절실한 마음과 함께.

“이기자! 알겠어?”

“예!”

그제야 우렁찬 대답이 마음에 쏙 든 박민희가 명령했다.

“좋아! 진격 앞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영력에 의존해서 달려 나가며, 아니, 사실은 달리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달려 나가며 박민희는 생각했다.

‘소시민… 괜찮은 거지?’

* * *

허억… 흐악…….

온몸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허리가 땅을 뚫고 내려가 지하 깊숙이 파묻힌 것처럼 무겁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빌어먹을…….’

방금 이돌룸의 몸부림으로 마지막 평행 세계가 무너졌다.

더 이상은 이돌룸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서른 개를 훌쩍 넘긴 던전 핵을 제거한 만큼 이돌룸 역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내 상태는 그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크허… 흐억…….

하지만 팔은 습관처럼 올라간다.

콰드드득!

태고의 뱀의 척추와 머리뼈를 고스란히 살려서 만든 전투 꼭두각시가 내 팔과 어깨를 꽉 쥐어 완전히 무너진 근력과 영력을 대신했다.

나는 그 힘으로 마지막까지 남겨 둔 이성계의 활을 잡았다.

내가 가장 익숙하게 쓸 수 있는 유물. 유일하게 나에게 완전히 길이 든 유물.

지금의 몸 상태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었다.

우우웅-!

어느덧 소장품이 된 이성계의 활은 검은 영력과 함께 붉은 아우라를 줄기줄기 피워 올렸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으로 활을 당겼다.

활을 당기며 생각했다.

‘한 번, 단 한 번.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표적을 보여 줘.’

[만상공감]을 최대로 개방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쏟아지는 감각에, 영혼이 비명을 질렀다.

우우우웅-!

이제 내 영혼을 떠받들어 줄 장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내게 가장 익숙한 장비들.

파도, 악몽사슬, 거인창, 세계수의 걸음, 탐, 아루카의 날개, 어스퀘이커, 일출창, 반월이, 만월이, 초월이. 내 팔을 지탱하고 있는 전투 꼭두각시를 제외하면 고작 11개가 남았을 뿐.

어째서인지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다른 장비들이 다 소멸하던 와중에도 이 오래된 친구들은 끝까지 남아 내 옆을 지켜 주었다.

‘그래도, 너희라도 남아 줘서 다행이다.’

우우우웅-

내 마음에 호응해서 우는 장비들.

그리고.

끄오오오오우오오-!

잔뜩 개방한 [만상공감]으로 또 한 번 이돌룸의 구슬픈 비명성이 들려왔다. 느껴진다. 놈도 이제 한계였다.

한 방.

마지막 치명타를 급소에 꽂아 넣는다면 놈을 끝장낼 수 있을 텐데……!

“제발… 한 번만 보여라!”

최후의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만상공감]을 활짝 열었다.

쏟아지는 감각들 끄트머리에서, 어느덧 이돌룸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선 이들이 느껴졌다. 찬란한 이들이었다.

‘아틀라스 클럽……!’

아마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틀라스 클럽의 영웅들은 목숨까지 도외시하며 마지막 질주를 시작했다.

대기사 군다르의 초능력은 [분쇄]. 그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정면의 모든 것을 분쇄하며 달려 나간다.

대마도사의 초능력은 [염력], [부여], [감지], [변형], [정화]. 그는 5개의 초능력을 동시에 사용하며 사방을 찢고 태우고, [감지]를 사용해 어설프고 부정확하게나마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냈다.

성녀 나타시아의 능력은 [치유]와 [기적]. 그녀가 바라는 건,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기적처럼’ 이루어지곤 한다.

그래. 그건 기적이었다.

그들의 눈부신 질주와 나타시아의 능력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기적.

단 한순간, 벼락처럼 이돌룸의 형태가 [만상공감]에 잡혔다.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그 궤적이 눈에 잔상처럼 남았다.

키리리릭!

나는 이성계의 활을 한계까지 당겼다.

우우우우우웅-!

‘버텨! 좀 더, 좀 더 강하게!’

이 한 발은 마지막 한 발. 반드시 이돌룸을 침묵시키기 위해, 이성계의 활에 매긴 아르테미스의 화살에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불어넣었다.

여태 버티고 있던 11개의 장비들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덜덜덜 소리를 내며 진동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

이성계의 활과 11개의 물건들을 감싸고 있던 붉은 아우라가 확! 증발해 버리고 황금색 아우라가 따듯한 햇살처럼 피어올랐다.

‘이게 뭐지?’

들어 본 적도 없다. 소장품을 상징하는 붉은 아우라가 날아가고 황금색 아우라가 피어난다?

이게 뭘까?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알겠다.

후우우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덜덜덜 떨리던 장비들이 고요하게 제자리를 찾고 바람 소리 같은 기묘한 공명음을 울리며 나를 지켜 주고 있었다. 나는 내 물건들과 더 깊이 연결된다. 나랑 파도가 구분 가지 않고 악몽사슬과 초월이를 구분하지 못하겠다. 이게 물아일체의 경지라는 건가?

지금의 치열한 상황과 전혀 다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과 평화로움이 스멀스멀 번져 왔다.

끼리리릭!

힘을 더한 것도 아닌데, 이미 최대라고 생각했던 활시위가 한 번 더 길게 늘어난다. 그리고 그 한계에 도달하는 순간.

투웅-!

아주 자연스럽게 시위를 놓쳤다. 눈에 남은 잔상을 향해.

이돌룸의 급소를 향해.

아르테미스의 화살이 그곳에 틀어박히는 순간.

……!

비명은 없었다. 그저 하늘과 땅이 뒤섞인 추상화 같았던 풍경이 차츰차츰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 겁에 질려 있던 사람들이 ‘어라……?’ 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을 뿐. 던전 속으로 들어갔던 이들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다시 지구 위로 떨어져 내렸을 뿐.

그렇게, 평화가 찾아왔을 뿐.

* * *

현실이라는 건, 너무나 단단한 성채와 같아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면 단번에 폭삭 무너져 버린다. 주춧돌이 서 있던 땅이 꺼지며 한순간에 바닥으로 빨려 들 듯이 와르르, 그렇게 무너져 내린다.

지금 이 순간, 아갈타의 민간인들이 마주한 현실도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지고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모든 경계 지역에서 군인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아갈타 본성에서 미리 피신해 있던 동지들의 연락이 왔습니다. 신살 병기의 투하를 확인. 아케르의 전사도 확인!]

[요충지 곳곳에 신살 병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지휘부는 공석이 됐고 아갈타군은 갈 곳을 잃은 채 표류할 겁니다.]

연이어 들려오는 보고에 흐메초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제 한 발자국만 더……!

그리고 마침내, 품에 넣어 둔 휘오의 가지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그 소식이 들려왔다. 완전히 진이 빠진 목소리로 전하는 소시민의 한마디.

- 멸세 병기 이돌룸, 격퇴.

[됐어!]

흐메초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대부분의 군인이 주둔지를 떠난 상황이었다.

아갈타의 장성들이 깡그리 몰살해 아갈타군 전체가 뇌사 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서민서가 군의 요충지와 대량 살상 병기가 있는 곳만을 골라 가며 신살 병기를 떨어뜨려 아갈타군의 반격 능력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상황이었고.

아갈타 최후의 보루인 멸세 병기 이돌룸마저 침묵한 상황.

지금이다. 지금이 매일 꿈꿔 오던 바로 그날이다.

흐메초는 아갈타 인구의 90퍼센트를 넘는 민간인들의 지도자로서, 그간 타키넷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무기 재료를 사고 제작해 온 반군의 지도자로서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명령을 내렸다.

[작전 개시! 혁명을 시작한다!]

아갈타의 모든 도시에서, 모든 주둔지에서 동시다발적인 시민군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별빛의 지휘 아래, 아갈타의 치하에서 고통받고 있던 모든 식민 차원과 원시 차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지구를 향해 대규모 출정을 했던 아갈타군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주둔지가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보급로가 막혔습니다!]

[반란입니다!]

[뭐, 뭣?! 상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려!]

[그게…….]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아까 전부터 아갈타 차원과 통신이 연결되질 않습니다!]

[…뭐?]

아갈타군은 난리가 났다. 후방이 털리고 보급로도 사라진 마당에 진격을 계속해야 하는지 퇴각을 해야하는지 판단을 내려 줘야 할 최고 결정권자들이 모두 증발한 상황.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차원 방송을 통해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관이 틀어 준 방송에는 무르물랑이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똑똑히 말했다.

[네. 침묵의 해적단이 아갈타를 무너뜨렸습니다. 최고 원수 아케르는 죽었고, 모든 장성 역시 폭사했습니다. 이제 침묵의 해적단… 아니, 지구는 새로운 차원 문명으로 거듭날 겁니다.]

뭐야? 저게 진짜야?

믿을 수 없는 뉴스. 하지만 진실을 확인해 줄 윗선은 모두 침묵 중이었다.

웅성거림.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차원포가 이상합니다!]

[이거 정비한 새끼 누구야?!]

[이거 민간인 기술자들이 한 건데… 근데 이 새끼들 다 어디로 갔어?]

장비들이 하나둘 고장 나고 작동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군기가 흔들렸다.

곤두박질치는 사기.

하지만 그 와중에도 각 부대의 사령관들은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 아갈타의 군인답게.

[시끄럽다! 우리가 받은 마지막 명령은 지구를 파괴하는 거다! 다른 명령이 없으니 마지막 명령을 최우선으로 둔다!]

돌아갈 곳이 있든 없든, 장비가 고장 나고 보급이 끊기든 말든, 마지막까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는 아갈타군이었다.

하지만.

[차원함의 연료가 위험한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어딘가 구멍이 난 모양입니다! 근처 차원에 내려 정비하고 연료를 보충하지 않으면 이대로 차원 미아가……!]

[이런 불명예 제대 할……!]

그들의 행군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이돌룸이 죽고.

엎드려 있던 휘오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구 곳곳에 새하얀 게이트가 다시 열린다. 차원강습 시스템과 신살 병기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 두었던 밀수 네트워크가 다시 가동하는 것이다.

열린 게이트로 손님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생산이 중단되었던 차원강습 시스템 공장과 신살 병기 공장이 다시 가동을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차원이 연합해 고부가가치의 무기와 물건들을 생산해 낸다. 지구는 이미 차원 문명이었다.

“후… 빡세네.”

전쟁이 끝나자마자 게이트가 열리고 쏟아져 나온 손님들.

나는 하루 종일 그들과 인사하고 앞으로의 일들을 이야기하느라 완전히 탈진해 버렸다.

심지어 해야 하는 일은 손님맞이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침을 흘려 대는구나…….”

기껏 아갈타를 무너뜨렸더니, 아갈타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차원 문명들이 눈이 뒤집어져서 부대를 움직이고 난리를 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 주변에서 길고 지난한 전란이 계속될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아갈타의 잔당까지 설치기 시작하면 이 전쟁은 게릴라전 형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 와중에 반란을 일으킨 아갈타 민간인들과 동맹 세력들의 피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그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내가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능구렁이 같은 차원 문명들은 이제 겨우 차원 문명의 문턱에 들어선 지구를 쉽게 인정해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엔 인정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는 제법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잠깐 대화를 시도해 본 것만으로도 나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그렇게 지쳐 있던 나에게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사령관님! 아갈타의 대장이 방문했습니다!”

“…뭐?”

누구? 아갈타의 대장? 아직도 아갈타에 살아 있는 장성이 있었나?

대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아직 살아남았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가 직접 방문을 해 온 건 더욱 의외였다. 여길 왜 와? 죽으려고?

피로로 무뎌지던 정신이 번쩍 깨어날 만한 소식.

“일단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무장을 해제하고 깔끔한 정복을 입은 아갈타의 대장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아갈타의 마지막 장군, 아이하세 대장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갈타인들에 대한 선입관은 호전적이고 성급하다는 것. 하지만 아이하세는 학자처럼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를 환대하기보다는 직설적으로 질문을 찔러 넣었다.

“…굳이 날 찾아와서 살아남은 유일한 장군이라는 걸 확인시켜 줄 필요가 있나? 혹시 죽을 땐 죽더라도 적의 대장에게 죽고 싶다 이런 건가?”

내 질문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지만 아이하세는 그저 담담하게 대답했다.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항복을 할 작정이니까요.]

오, 이건 정말 의외였다.

“항복? 아갈타가?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믿기 어려우시겠죠. 그래서 선물을 준비할까 합니다.]

선물?

[아마 지금부터 지구 앞에는 길고 지난한 싸움이 남을 겁니다. 제가 그걸 해결하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마지막 미련을 떨쳐 버리듯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이어서 말했다.

[저는 아갈타의 마지막 대장. 제가 있는 곳으로 모든 아갈타군을 소환하면 그들은 그에 따를 겁니다. 놈들이 오는 족족 저희가 다 죽이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저와 제 직속부대를 살려 달라는 것뿐입니다.]

믿을 수 없었다.

…단순히 항복하는 게 아니라 동포들을 다 죽인다고? 아갈타 군인이? 그런 불명예를 감수한다고?

내 의문에 아이하세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저는 아갈타 본성 출신이 아니라서 조금 사고가 유연한 편입니다. 하지만 그걸 믿진 않으시겠죠.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동족들을 죽이겠다는 겁니다. 한꺼번에 불러들이지도 않습니다. 차근차근 불러서 죽이면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정 불안하시다면 직접 찾아오는 아갈타군을 하나하나 처결하셔도 좋습니다. 저를 이용하십시오. 그래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완전한 항복입니다라고 말하는 아이하세.

[만상공감]으로 느낀 그의 감각에는 다른 꿍꿍이가 없어 보였다.

도무지 믿을 수 없지만 그건 정말로 항복으로 보였다.

맙소사. 아갈타인이 항복이라니. 그것도 대장이?

나는 급히 불러들인 데미안 도련님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새 [모이라이 홀덤]을 마친 도련님도 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답은 금방 나왔다. 처음 구상보다 스케일이 많이 커지긴 하지만, 지금이 바로 지를 때가 아닌가 싶다.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변경하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갈타의 마지막 대장으로서 명령하세요, 영토에 침범한 모든 외세를 몰아내라고요.”

[…네?]

“지금 아갈타의 영토… 아니, 지구연맹의 영토에 다른 차원 문명들이 침범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까운 전사들을 그냥 죽일 수는 없죠. 무슨 핑계를 대든 아갈타의 모든 잔존 부대를 외적의 침입을 막는 쪽으로 돌리십쇼.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명령을 내리세요.”

이이제이.

구 아갈타의 영토에 침입한 모든 차원 문명들의 군대를 아갈타의 잔존 세력으로 막아 내겠다는 계산. 사기도 떨어지고 보급도 끊긴 아갈타의 군대들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전멸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게 내 노림수였다.

싸늘한 명령.

하지만 아이하세는 그 명령의 차가움보다 다른 것에 더 주목을 한 모양이었다. 눈치가 아주 빠른 양반이었다.

[지구연맹……? 설마.]

나는 그의 의문에 기꺼이 대답을 주었다.

“네. 지구연맹은 구 아갈타의 모든 영토를 포함하는 광대한 차원 문명으로 발돋움할 겁니다. 일이 잘 해결되면 당신들을 지구연맹의 정식 군인으로 받아들여 주지요. 물론 갈갈이 찢어 부대를 재편하겠지만 말입니다.”

[아……!]

왤까? 아이하세의 감각이 변했다. 반쯤 체념한 듯이 먹먹한 감각으로 무기력하게 서 있던 그가, 눈에 별을 담고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녕 큰 계획입니다! 제 목숨이 다하더라도 새로운 제국의 건설을 위해 목숨을 다 바치겠습니다!]

…어째서인지 감동을 받은 듯했다. 역시 아갈타인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아이하세를 정중히 모시고(그 실상은 구금 및 감시였지만) 돌아보니 도련님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요?”

“사령관님, 지구연맹이라는 거 없지 않습니까?”

순진한 소리를 하는 도련님에게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지금부터 만들면 되죠.”

현실이라는 견고한 성채가 무너진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그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현실이라는 성채를 쌓는 일이 남는 것이다.

혼란의 시기에는 누구보다 먼저 깃발을 올리고 내가 저 성을 다시 쌓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성채의 주인이 되는 법.

“같이 한번 만들어 볼래요?”

데미안이 감탄했다는 듯이 눈동자를 반짝이곤 대답했다.

“네!”

그렇게, 전쟁이 끝났다.

모든 게 순탄하게. 계획, 그 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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