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믿고 있었다고
거짓신 이돌룸이 지구에 왔다.
하준광은 생각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분명 소시민이 자신했다, 상대할 수 있다고. 그 구체적인 계획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데?’
하준광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대책 없는 고집쟁이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강이라는 자리는 무턱대고 싸운다고 얻어지지 않는다. 그는 본능적으로 영리했고 누구보다 예리한 감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 때나 싸운 게 아니라 싸울 만하면 싸웠고, 확신이 없을 땐 온갖 핑계를 대 가며 싸움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가오를 잃지 않기 위한 연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오랜 세월 살아남았고, 매번 이기거나 최소한 지지 않았기에 마침내 대한민국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를 지금까지 지켜 준 감과 본능이 지금 온 힘을 다해 소리 지르고 있었다.
당장 여기서 도망치라고.
이건 아니라고.
“혀, 협회장님, 이건……!”
부하들도 같은 걸 느꼈는지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하기야, 이건 사람인 이상… 아니,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으니까. 눈을 감아도 소용없다. 영혼이 공포에 질려 절규하고 있었다.
“아아. 괜찮아.”
하준광은 애써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구석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억지로 자리를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당당하게 죽는 편이 멋있으니까. 하지만 등 뒤는 벌써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이 상황을 만든 소시민과 데미안을 저주하며 하준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전방을 주시했다.
나타난 것은 ‘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멸망이라는 ‘현상’이었다.
땅이 끓고 하늘이 땅을 적신다. 명백히 서로 다른 개념과 물질들이 물에 풀린 수채화 물감처럼 뭉그러지고 뒤섞이는데… 대체 적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말 그대로 차원이 달라서… 볼 수도 없다는 건가?’
분명 이돌룸은 거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냥 거인이 아니라 차원을 뜯어 먹는 거인이었다.
볼 수 없는 건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개미의 눈에도 인간은 실체가 보이지 않고 자신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저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인식될 터인데… 아예 개념부터가 다른, 차원을 먹어 치우는 거인을 인간이라는 작디작은 피조물이 무슨 수로 인식할 수 있을까?
이돌룸은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면 이미 그 배 속에서 위액에 뒤섞이며 녹아 버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싸운다고? 그것과?
말이 되나?
이 작전은 전제부터가 틀렸던 거다.
꿀꺽.
하준광은 침을 삼키고 생각했다.
‘젠장… 울고 싶군.’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오줌을 지릴 것만 같은 공포였다.
* * *
권승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민… 정말 이게 보여?”
눈동자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다리는 떨리고, 식은땀으로 홀딱 젖은 채였다.
권승리가 저렇게 겁먹고 긴장할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
사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젠장.
압도적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이 눈앞의 현실이 되자 체감이 전혀 달랐다. 이돌룸의 실체는 내 [만상공감]으로도 오롯이 담지 못했다. 귀퉁이가 보이지 않는다. 한바탕 씨름을 하려 해도 어딜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한계가 느껴지질 않는다.
‘진짜 미쳤네.’
나도 모르게 호흡이 불안해졌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이 싸늘하게 식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집중이 흔들린다.
좋지 않아.
나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떤 상황 위에 서 있는지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지금쯤 서민서 쪽은… 다 잘됐을 거야.’
확실하다. 데미안 도련님이 몇 번이나 점을 쳐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으니까. 오히려 가장 공들여 확인한 미래는 나와 지구가 아니라 서민서와 아갈타 쪽이었다. 어차피 이쪽은 인과를 비트는 이돌룸과 나랑 권승리 탓에 점괘가 정확하지 않기에 굵직한 흐름만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그 탓에 정작 연출가의 배신은 눈치채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그래. 작전대로 됐을 거야.’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이쪽뿐이었다. 도련님조차 보지 못한 미래. 하지만 반드시 이겨 내야만 하는 미래.
‘기껏 아갈타를 끝장내고 돌아왔는데… 지구가 없어 봐. 얼마나 황당하겠어?’
그래. 겁먹을 정신도 아까웠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마등이랄까?
회귀해서 지금까지 겪어 온 모든 선택의 순간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 모든 순간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싸움을 위한 준비들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온 나는 사명감을 버리고 명품을 선택했다.
처음에 산 건 과도였다.
‘아… 좋았지.’
멋진 선택이었다. 과도는 회칼이 되고, 창이 되고, 멋진 후드티가 되고, 성검이 되었다가 삐까번쩍한 차원 문명의 차원강습 시스템까지 되었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감각의 인플레’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매일매일이 새로웠고,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은 알게 되는 나날의 연속.
그 무수한 물건들이, 그 농밀한 감각과 경험이 내 영혼에 고스란히 남았다.
웅-
우웅-
그렇게 생각을 하는 동안 내가 꺼내 놓은 1,080개의 장비가 일제히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붉은색 아우라의 소장품이 만들어 내는 분홍색의 갤러리 효과 속에서, 수많은 명품들이 호흡을 하듯 규칙적인 진동을 만들어 냈다.
후우우웅-
훙-
뭘까? 그중에서도 나와 오래 함께한 장비들, 가령 회칼인 파도라거나 7미터의 거인창이라거나 악몽 사슬, 세계수의 걸음, 아공간 가방 탐, 절규를 삼킨 밤 같은 장비들은 바람을 뿜어내는 듯한 독특한 공명음을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녀석들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아끼는 물건들이 나를 아낀다. 이 사실이 내 마음을 우주처럼 넓고 고요하게 한다.
그렇게,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무려 1,080개의 장비들과 함께하고 있고, 내 영혼에 새겨진 아끼는 물건들이 또 온 힘을 다해 내 영혼을 떠받들고 있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면…….
‘그래. 이돌룸, 너도 결국 내겐 새로운 경험, 새로운 감각에 지나지 않는 거다.’
쫄 필요 없다.
나는 권승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볼 수 있어.”
내게 길든 물건에는 혼이 깃든다. 1,080개의 물건에 깃든 혼이 내 영혼을 떠받들고 나는 그 연합된 영혼의 힘으로 [만상공감]을 한계 이상으로 부풀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자유].
세계수의 걸음이 새빨간 아우라를 피워 올리고, 평행 차원에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주문 [자유]가 발현된다. 무려 아홉 개의 평행 차원이 갈라지고, 아홉 개의 차원에서 아홉 명의 내가 동시에 [만상공감]을 발휘해 이돌룸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니까, 이돌룸은 세계를 먹어 치우는 거인이다.
그리고 세계란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 티끌 하나하나의 작은 것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나는 [자유]와 [만상공감]으로 그 모든 삼라만상의 감각을 공유했다.
구름 속에 존재하는 물방울 하나의 감각, 해변에 가득한 모래알 하나하나의 감각, 지나가던 사람의 머리털 한 가닥의 감각까지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긁어모아 모자이크처럼 이어 붙인다. 아홉 개의 세계에서 동일한 과정을 수행하자…….
‘아… 드디어 보인다.’
작은 조각들이 모이고 또 모여 거대한 거인을 형상화했다.
이제야 놈의 테두리가 보였다. 한계가 보였다. 어디를 어떻게 잡아서 뒤집어야 하는지 보였다.
“리프 얀센.”
나는 아틀라스 클럽을 대표하는 텔레파시 능력자를 호출했다.
대답은 즉각 돌아왔다.
- 대기 중. 세계의 모든 텔레파시 능력자가 당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긴장했으나 여전히 침착한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이 감각을 권승리에게 전해 주십시오.”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공포에 질려 이를 악물고 있는 권승리를 바라보며 마침내 내가 잡아낸 이돌룸의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렸다.
‘자, 눈을 떠.’
리프 얀센과 세계의 모든 텔레파시 능력자는 이 방대하고 고차원적인 감각을 그대로 복사해 권승리에게 퍼부었다.
“윽!”
권승리의 눈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뒤집힌다. 온몸을 바르르 떤다. 하지만 떨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차차 가라앉고 뒤집혔던 눈도 다시 초점을 찾았을 때, 권승리는 놀랍도록 침착해져 있었다. 그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도 걸려 있다.
공포.
그것은 무지에서 온다.
알 수 없는 것. 불가해한 것. 그 한계가 보이지 않는 것에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신이 두렵고 악마가 두렵다.
하지만 한계가 보이는 순간 알게 되고, 상호작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더 이상 그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저 목표가 될 뿐.
권승리는 환하게 웃었다.
“고맙다. 이제야 보이네, 어디를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
나는 내 역할을 해냈다.
이 멸망을 ‘보게 하는 것’.
“그럼… 내 차례네.”
그렇기에 권승리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보기 좋게, 만지기 좋게 요리해 줄게.”
그건 바로 이돌룸을 ‘만질 수 있게 하는 것’.
권승리는 법칙을 비틀었다.
그녀는 이미 차원 격류를 눈에 보이는 모래사장과 계곡물로 치환한 적이 있다. 그와 유사한 작업이었다. 이번엔 지구에 맞닿은 이돌룸의 손과 이빨의 형태를 치환했다. 지구인들이 인식하고 공격하기에 딱 쉽도록.
* * *
부우우웅-
그저 녹아내릴 뿐이었던 풍경이 돌연 바뀌기 시작했다.
하늘로 끓어오른 땅이, 땅을 적신 하늘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더니 그 한가운데에 익숙한 형태의 타원형 게이트를 생성했다.
“어……?”
“이건……?”
대책 없이 떨고만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좀 모양이 다르고 더 흉흉해 보이긴 하지만 분명 알고 있는 형태였다.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괴물이 있고, 그 괴물을 죽이면서 전진해 핵을 파괴하면 게이트를 없앨 수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모든 인류가 해 온 익숙한 싸움.
“게이트다.”
게이트를 마주한 사람들.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패닉은 없었다.
게이트가 드러난 이상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돌입해서 클리어 하는 것.
익숙하다는 것은 마음에 앞서 몸이 먼저 반응하게 되는 것. 게이트는 익숙했고, 사람들은 싸울 준비를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하준광은 비죽 웃음을 지었다.
한순간에 모든 게 바뀌었다. 도무지 손댈 수 없이 두려운 재앙이 그저 어려운 도전으로 여겨지게 되는 마법.
‘어이, 믿고 있었다고, 소시민, 데미안, 권승리! 이 꼬맹이들아!’
그는 입을 크게 벌리고 부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거봐라! 괜찮다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그냥 던전을 공략하기만 하면 돼! 우리가 누구냐! 대한민국 헌터 협회! 헌터들이다! 우리가 제일 잘하는 일이 바로 뭐다? 던전 공략이 아니냐!”
“오오!”
“역시 협회장님!”
“와…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이렇게 침착함을……!”
하준광은 자신의 축축해진 등을 신경 쓰면서도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굴욕을 줄 뻔한 이 빌어먹을 게이트를 압도적으로 박살 내겠다고 마음속으로 꾹꾹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