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서민서의 싸움
켄타로스는 말했다.
[멸세 병기는 멸세 병기로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정말 멸세 병기라면…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퇴각해야 합니다.]
센타울의 그랜드 마스터가 하는 말이었다. 우리 중 누구보다도 멸세 병기의 위력을 잘 아는 이가 하는 말인 만큼 그 말은 더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신살 병기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신살 병기가 죽일 수 있는 신은 창세에 관여했다는 태고신이 아닌 하나의 차원이 탄생할 때 같이 태어나는 토착신을 말했다.
토착신은 말하자면 새하얀 도화지의 하얀색과도 같았다. 검게 칠하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세계는 그 도화지 자체. 검게 칠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찢거나 불태우는 등의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차원강습 병기, 태양 강기 뭐 그런 개인의 전투랑은 완전히 차원이 달라요. 대적 불가입니다.]
강력한 항공모함이나 이지스함이 몇 대가 있다고 한들 대륙을 균열시키는 지진을 막을 수는 없는 것과 같았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문제.
하지만 방법은 있다.
나는 켄타로스를 달랬다.
“켄타로스 님, 걱정하지 마세요. 방법은 다 준비해 뒀어요. 켄타로스 님은 그저 눈앞의 적을 베어 내시기만 하면 됩니다. 저랑 권승리는 다른 곳에서 싸워야 하니, 현장 지휘관으로서 켄타로스 님의 능력이 중요해요.”
계획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들려주자 켄타로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가능하다. 나랑 권승리라면… 이론상 가능하다.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저희 힘만으로는 어려워요. 그러니까, 켄타로스 님이 활약이 중요합니다. 제일 앞에서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아쉽군요. 전투력은 몰라도 지휘 능력이라면 저보다는 우루스가 확실히 두세 수는 더 위에 있을 테니까요. 그 친구가 지휘를 맡아 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죠. 그랜드 마스터 우루스 님이 맡은 임무도 중요하니까요.”
모든 상황이 최선일 수는 없다. 결국 우리의 싸움에선 주어진 조건하에서도 기어코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집념과 투지가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켄타로스. 그의 눈동자가 뜨겁고 무거운 투지로 잿불처럼 타올랐다.
* * *
전투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는 권승리와 함께 텅 빈 평원 위에 섰다.
지금 이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 마지막 싸움은 역시 여기서 시작해야 제격이지.”
권승리가 말했다. 나도 동감이다.
과거, 아니… 지난 생에 이곳에는 하늘을 꿰뚫을 듯 높이 선 탑이 있었다.
그 탑이 지금도 남아 있었다면 아몬과 일백 연구자들은 아마 난리가 났었겠지.
그래. 생각난 김에 물어보자.
권승리를 보고 물었다.
“그래서, 그 정체가 정확히 뭐였어?”
“뭐가?”
“여기에 있던 탑.”
“아…….”
권승리는 어딘가 추억에 잠긴 눈으로 텅 빈 평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은 분명 지금은 사라진 탑의 자취를 좇고 있었다.
“고대신의 유산이야. 그것도 유물처럼 어느 한 신이 남긴 자취가 아닌… 수없이 많은 고대신이 달려붙어 만들어 낸 집념이 담긴 유적지.”
“…탑의 용도는 시간 역전, 그러니까 회귀였고?”
“응. 아, 그런데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어. 완성 직전에… 멈춘 것 같더라.”
“그럼 어떻게?”
“내가 완성시켰지. 법칙을 접고 이어 붙이느라… 고생 엄청 했어.”
“젠장. 그 시간을 벌려고 우리가 밖에서 그렇게 쎄빠지게 싸웠던 거구나?”
“그때 밖에 있었어?”
“그래. 2류 헌터니까 밖에서 고기방패 노릇 하고 있었지.”
에에? 고기방패라니? 무, 무슨! 하고 당황하는 권승리를 향해 짓궂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궁금한 것투성이다. 유물이니 유해니, 지구에 고대신들의 흔적이 유독 많았던 건 이곳이 세계의 배꼽이어서 그랬다고 치자.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고대신들은 왜 그런 걸 만들었을까? 신들도 회귀를 원하나?”
“아틀라스 클럽의 해석사가 읽어 낸 감정에는 유독 아쉬움이 많았다 하던데?”
“아쉬움……? 아, 그렇구나.”
아쉬움이라. 어쩐지 알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권승리가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다.
“어? 뭔가 아는 것처럼 행동하네? 넌 왜 신이 아쉬워하는지 알 것 같은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충은.”
권승리가 눈을 반짝였다.
“왜?”
나는 답했다.
“시간이 부족했던 걸 거야.”
“시간?”
“세상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 시간.”
“세상이 완전하지 않다고?”
“그럼, 너는 이게 완전해 보이냐? 어비스 게이트도 여기저기 열리고, 대부분이 창조신의 꿈에 잠겨서 어떤 질서나 의미도 없고, 어떤 계획이나 목표도 없고, 의도도 없고…….”
“…그러니까 신들은 이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워한다?”
“아마도. 거의 확실히.”
내가 신이라면 어떨까? 온 세상에 퍼진 이 가능성들을 모두 모아 다시 세상을 창조하라고 하면,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는 더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만상공감]에는 개선의 여지들이 분명하게 보였으니까. 물론 그걸 건드릴 힘까지는 내게 없었지만.
“그러니까, 우리처럼 2회차를 시작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보다 완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지만 그 계획은 실패했을 것이다. 내부적인 반발이 있었든 아니면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었든.
그리고 고대신들은 창세의 대가로 유물과 유해만 남긴 채 소멸해 버렸다.
어쩌면 그에 얽힌 이야기는 지구를 연구하면 더 밝혀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몬이 이번 전쟁에 끼어든 이유이기도 했다. 아갈타 놈들이 지구를 차지하면 놈들은 철저히 독식하지 연구를 위해 개방하지는 않을 테니까.
근데 또 궁금한 게 생겼다.
“아, 맞다. 근데 그럼 리오 얀센의 능력은 뭐였어? 나를 회귀에 껴 준 그분 말야.”
리오 얀센. 그 이름이 나오자 권승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간섭]. 리오 얀센은 무엇에든 간섭할 수 있었어. 사람에게도, 능력에게도. 무엇인가를 멈추게도 하고 일찍 발현하게도 하고 말을 전하기도 했지. 하지만 나처럼 법칙을 보지는 못했어. 유물이나 어비스 게이트처럼 신적인 무엇인가에도 간섭하지 못했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간섭한 신의 유산이 바로 바벨의 탑이었어.”
자신의 모든 존재를 다 바쳐 바벨의 탑에 [간섭]해 원하는 대로 구동하고 소멸해 버렸다는 의미.
그 말을 듣는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가슴 언저리에 쪼르르 물이 흐르는 것처럼 흐느낌이 불쑥 목울대를 쳤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지만,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리오 얀센의 희생은.
그저 남 일이라고 지나가기엔 염치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빚을 졌다.
“…고맙네.”
정말 고마웠다.
이 세계에 다시 한번 기회를 줘서. 거기에 또 나를 끼워 줘서.
그러니까.
나는 리오 얀센에게 추모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잘 싸워 보자.”
권승리를 보았다. 권승리도 나를 보았다.
“그래.”
때마침.
부글부글-
땅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경계가 흐려지고 서로 섞여 들기 시작했다.
세계가 세계로서의 모습과 근간을 잃어버린다. 이것이야말로 멸망의 풍경.
거짓신 이돌룸이 지금 이곳에 왔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타오르는 긴장을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이 싸움만 이기면 돼. 이것만 이기면…….”
그다음은 없다. 분명 서민서가 잘해 줄 테니까.
이돌룸이 지구에 도착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지구에서 벼려 낸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아갈타 문명의 목줄기에 처박힐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 * *
그 시각.
차원 전폭기 안에서 서민서는 생각했다.
‘자, 이제 그만 악연을 끊자.’
지구는 신살 병기를 만들었다.
자, 그럼 그걸로 어디를 칠 것인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신살 병기를 방어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아갈타의 대군이 쳐들어올 게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그 군세를 막기 위해 사용하거나 지구 주변의 요충지를 공격하는 것.
하지만 소시민은 그 모든 방안을 거부했다.
서민서도 소시민의 판단에 동의했다.
‘아갈타 놈들은 숨통을 끊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힘까지 쥐어짜서 만들어 낸 열 발의 신살 병기는 방어가 아닌 공격에 쓰여야 했다. 적의 숨통을 끊어 버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휘오의 도움으로 아득한 거리를 꿰뚫고 날아온 서민서는 이제 자신의 앞에 흐르는 거대한 차원 격류를 느꼈다.
‘아갈타 차원.’
아갈타 문명의 주 차원.
차원 문명으로서의 역사는 짧지만 지독한 팽창주의로 벌써 수백 개의 차원을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문명의 심장부.
‘물론 쉽지 않겠지.’
아갈타의 성장은 단순한 외형적 팽창이 아니라 최신 기술들의 도입과 개발을 병행한 내실이 꽉 찬 발전이었다. 그 말은 휘오의 힘과 서민서의 차원 도약 능력으로도 그 방공망을 뚫기란 쉽지 않을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딱 보기만 해도 살벌하네.’
당장 눈앞에는 일전에 서민서가 부딪힌 적 있는 차원 결계보다 훨씬 강맹한 차원 결계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가 된다고 했어.’
서민서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휘오가 실어 준 속도에 자신의 차원 도약 능력을 섞어 한층 더 가속했다.
‘단숨에 꿰뚫는다.’
이를 악물고 속력을 극한까지 올려 아갈타 차원을 향해 돌진했다.
꾸궁-!
‘큭……!’
타이타닉이 빙하를 들이받았을 때의 충격이 이랬을까?
결계와 차원 전폭기가 충돌하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쩌적!
총알처럼 꽂힌 차원 전폭기로 인해 단단하던 차원 결계에 금이 자글자글 그어졌지만.
‘젠장…….’
결국 꿰뚫는 데는 실패했다. 차원 전폭기는 결계에 처박힌 채 멈춰 버렸다.
머리는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입에서는 쇠맛이 난다. 배 속이 울렁거린다.
하지만.
주륵-
서민서는 충돌의 충격으로 터져 버린 코피를 대충 닦아 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원 전폭기는 여기서 멈췄지만 서민서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미적거릴 시간 없어.’
실어 둔 신살 병기를 직접 챙겨서 차원 도약을 감행했다.
콰직! 콰지직!
금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계는 안전유리처럼 질기게 남아 서민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과연 아갈타라는 거대 문명의 심장을 지키는 결계.
하지만 서민서의 준비 태세도 보통은 아니었다.
우우웅-!
‘내가 얼마나 맛있는 걸 먹었는데……!’
벌써 몇 달이나 지났지만, 소시민이랑 한 점, 한 점 맛있게 먹었던 태고의 뱀은 여전히 배 속에 남아 어마어마한 영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배가… 될 거라고 했어. 그러니까 된다!’
서민서는 배 속에서 들끓는 영력은 물론이고 몸을 지키는 데 써야 하는 최소한의 영력마저도 모조리 차원 도약의 능력에 털어넣었다.
콰지지직! 쩌정!
날카로운 칼날이 온몸을 난자하는 듯한 통증이 아릿하다.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힘을 더하면 더할수록 더욱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덮쳐 왔다. 하지만 서민서는 멈추지 않는다.
찍! 찌지직!
소시민이 사 준 연노랑 셔츠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면서도 기어코 서민서의 몸을 결계의 압력으로부터 지켜 주었고, 꽉 졸라맨 허리띠는 안전벨트처럼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을 흡수해 주었다. 태고의 뱀 가죽으로 만든 조끼가 날카롭게 부서진 결계의 조각으로부터 서민서의 몸을 보호해 주었다.
‘된다! 된다니까?!’
소시민이 서민서를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준비해 준 모든 물건이 전함의 튼튼한 장갑판처럼 서민서를 지켰다.
서민서는 태고의 뱀 가죽으로 만든 신발로 마지막 남은 결계를 꽝꽝 걷어차 깨뜨렸다. 기어코 결계를 부수고 서민서는 아갈타의 중심부로 차원을 도약했다.
“체크 메이트다, 이것들아!”
아갈타의 한복판, 모든 장성과 최고 원수 아케르가 항상 모여 있는 그곳 위로 신살 병기가 떨어졌다.
멀쩡하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르르릉 벽력이 친다.
꿍---!
노을빛 오로라가 방위성 중심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솟구치고는 전 우주로 퍼져 나갔다.
우르르르.
차원 전체가 물거품처럼 흔들렸다. 충격파가 차원을 몇 바퀴나 돌며 우주 전체를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뜨렸다.
방위성은 흔적도 남지 않았다. 크레이터가 남는 것도 아니고, 그냥 부스러진 가루 같은 것이 망망대해를 이루고 저 멀리 지평선까지 쭉 이어진 황량한 풍경만이 남았다. 방위성은 물론이고 아갈타의 도시까지 완벽히 소멸해 버렸다.
“됐어!”
서민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일 중요한 공격을 성공했다.
장성들이 모여 있는 방위성에 신살 병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걸로 최고 원수 아케르는 물론이고 다수의 장군이 죽었을 거야.’
아갈타의 최고 지휘부가 완전히 날아간 것.
이제 한 세 군데 정도, 데미안이 짚어 준 아갈타의 중요 시설마다에 신살 병기를 떨어뜨리면 아갈타 문명 전체를 뇌사 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다.
‘좋아! 마저 떨어뜨리자!’
하지만.
우득!
막 다시 공간을 뛰어넘으려는 서민서의 왼 손목을 무언가가 낚아챘다.
“아악!”
손목이 부서지는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돌아보는 서민서의 눈에 거대한 차원강습 시스템을 걸친 존재가 비쳤다. 서민서는 그 모습을 알아보았다. 연출가가 보여 준 내미슈 최후의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던 존재.
“최고 원수… 아케르?”
서민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분명 머리 위로 신살 병기를 떨어뜨려 줬는데? 설마 때마침 다른 곳에 있었다고? 아니,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해도 충격 때문에 몸을 못 가눠야 정상 아니야?
아니아니, 지금 이런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도망을 쳐야……!
‘공간 도약이 안 돼!’
하지만 아케르가 무슨 수를 썼는지 도약이 되질 않았다. 질긴 그물에 온몸이 칭칭 감긴 기분. 시간이 충분하다면 풀어내고 도망갈 수 있을 테지만…….
[덕분에 죽을 뻔했어… 곱게 죽을 생각은 말아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케르의 거대한 손이 서민서의 머리를 뒤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