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리석음
데미안이 연출가를 내려다본다.
연출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말했다.
“…할 말이 없네. 죽여.”
하지만 데미안은 연출가를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지랄하네. 아직도 대가리를 굴려?”
험악한 목소리에 연출가가 어깨를 흠칫 떨며 데미안을 올려다보았다.
데미안은 서늘한 눈으로 선언했다.
“나 데미안은 차원 계약 위반 건에 관해 허수바루블의 재판을 요구한다.”
연출가가 당황해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아니, 잠까……!”
기이이이잉-
기묘한 소음과 함께 유령처럼 허수바루블의 재판관이 나타났다. 게이트를 통하지 않는 허수바루블만의 차원 간 이동 기술이 그 진가를 드러낸다.
- 모두 좌정하시오.
재판관이 한마디 하자 주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허수바루블의 재판관은 어딘가 피곤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 다 들통날 것을 대체 왜 계약 위반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곤 신색을 고쳐 사무적으로 물었다.
- 계약에 얽힌 두 당사자의 인과를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동의합니까? 동의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읽지 못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일방의 인과와 주장만을 근거로 해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조금도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이 기계적인 질문.
데미안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고, 연출가는 당황한 기색으로 고민을 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방의 주장과 인과만으로 판결이 내려지면 더 불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좋습니다. 쌍방이 동의했으니 허수바루블의 계약인과 저울로 ‘제 113,736호 계약 위반 건’에 관한 인과를 읽겠습니다.
재판관은 얼굴에 달린 여덟 개의 눈과 두 손에 각기 하나씩 달린 또 다른 눈으로 계약에 얽힌 인과를 차근차근 읽어 내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피곤한 신색을 지우고 엄숙하게 판결을 내렸다. 말투도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뀌었다.
- 인과의 저울이 기울었다. 판결을 내린다. 연출가의 과실, 68퍼센트. 충분히 계약 위반으로 볼 수 있는 바, 계약에 의거해 징벌적 제재를 가한다. 피해자는 원하는 제재를 말하라.
데미안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연출가가 나와 관련하여 제작한 모든 방송물의 영구 삭제를 요청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출가가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그가 허수바루블의 재판관의 흘러내린 가운을 붙잡고 말했다.
“재판관님!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피핀의 연출가에게 방송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않습니까?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방송 삭제라니! 그건 영원한 영광을 살해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판결을 내린 허수바루블 재판관은 다시 피곤한 신색으로 돌아와서 귀찮게 달라붙는 연출가를 떼어 내며 인과를 읽기 시작했다.
- 아, 좀 가만히 있어 봐요. 가혹한지 안 가혹한지는 내가 지금부터 살펴볼 테니까.
다시 열 개의 눈동자를 한동안 이리저리 굴리던 재판관은 다시 신색을 엄숙하게 바꾸고 마저 판결을 내렸다.
- 인과의 저울이 기울었다. 피핀 연출가가 진행한 방송의 가치 대부분은 데미안과의 계약 이후에 발생한 바, 계약을 어긴 순간 그 모든 가치를 배반한 것은 바로 연출가 본인이며 스스로 그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선고한다. 연출가가 데미안의 탄생 이전, 루드비히 가주와의 계약 순간부터 진행한 지구에서의 모든 방송을 영구 삭제 처분한다. 이는 허수바루블과 피핀 차원이 맺은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과 방송권에 관한 조약에 의거해 지금 즉시 시행된다.
“아, 안 돼! 안 돼애애액!”
연출가가 절규했다. 연출가에게 방송이란 삶의 목적이자 의미, 원인이자 결과, 시작과 끝. 그런 방송을 삭제한다니, 죽음보다 더한 처벌이 아닐 수 없었다.
“흐으윽! 대체 어떻게! 어떻게 방송을 삭제할 수가 있어! 내가 연출한 작품인데! 영원에 새긴 작품인데!”
연출가는 절규했다.
자신을 붙잡고 질질 짜는 연출가를 보며 허수바루블의 재판관은 귀찮아하며 낮게 투덜거렸다.
- 아니… 그러게 누가 그런 짓을 하랬나…….
하지만 연출가의 비극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우웅-
게이트가 열리고 철갑 비늘들이 서로 몸을 비비는 구렁이 같은 형상의 존재가 나타났다. 피핀 차원의 차원 경찰 보로스. 보통은 피핀 차원 연출가를 지키기 위해 출동하는 그들이 지금만큼은 오히려 연출가에게 흉흉한 살기를 폭사하며 나타났다.
그러곤 선고한다.
[너는, 어리석은 계약 범죄를 저질러 피핀 차원의 위대한 업적 하나를 소실시켰다. 연출가의 방송권과 의무 조항에 근거, 너를 즉시 소멸형에 처한다.]
[하… 하하… 시발… 그러든지 말든지…….]
늘 한국어로 말하던 연출가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모국어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콰드드득!
보로스의 철편에 갈려 영원히 소멸해 버렸다.
“하핫…….”
데미안의 입가에서 웃음이 흘러나온다. 어설프지만 후련한 웃음이었다. 갑자기 풀려난 죄수와도 같은, 어리둥절하게 어색함이 묻어나는 웃음.
태어나면서부터 이계인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던 삶. 그 시선으로부터 숨어야만 했던 그 무겁고 모진 숙명의 나날… 이 순간 산산이 바스라져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던 가슴이 우물쭈물 주춤주춤 풀어지고, 어디선가 달콤하고 고소한 바람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때마침 겨우 제 기능을 찾은 지휘 통제실에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승리! 승리했습니다! 탐적 시스템으로 확인한 바, 도망친 적은 겨우 500여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연출가도 죽고.
35만의 아갈타 대군도 지구에서 깨끗이 몰살했다.
* * *
아갈타의 방위성.
아케르는 오늘 태어난 이래 가장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너넨! 대체 뭐 하는 새끼들이야!]
와장창창!
의자를 던져 값비싼 회의 테이블을 하나하나 때려 부순다. 장성들이 앉아 있는 의자도 거칠게 빼앗아 들고, 앉아 있던 장성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던지고, 집기들을 하나하나 때려 부쉈다.
[눈뜬장님이야?! 지구에 35만 대군을 몰살할 만한 전력이 집결했는데 그걸 몰라?!]
사실 그건 오해였다. 권승리가 일으킨 차원 격류가 아갈타 군세가 전멸한 주요 원인이었지만, 차원 격류 그 자체가 통신과 관찰 장비를 교란하는 역할을 해 아갈타 본성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오해.
아케르는 대단한 정예 병력이 지구에 집결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35만 명을 몰살할 정도의 대군세로.
[지, 진정하십시오. 아케르 최고 원…….]
콰득!
아케르를 어떻게든 말려 보려 했던 정보참모장의 얼굴에 아케르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네가 제일 버러지 같은 새끼다! 살아남은 패잔병 새끼들의 취조 결과를 들었나? 엄청난 수의 이계인들이 있었다고 하지? 그 많은 차원 문명들이 지구랑 붙어먹고 우리를 엿 먹일 준비를 할 때 정보참모장이라는 새끼가 뭘 하고 있었어! 어?]
콱! 콱! 쿠직!
별을 세 개나 단 정보참모장을 밟아 죽일 기세로 폭행하는 아케르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오해였다. 생환한 아갈타의 병사들이 목격한 이계인들은 별빛이 데리고 온 원시 차원의 동맹군들. 하지만 아케르는 여러 차원 문명이 연합해 지구로 대군을 파견한 거라고 철석같이 믿어 버렸다.
아케르는 으르렁거렸다.
[센타울을 그렇게 짓밟았는데도 이럴 줄은 몰랐구나. 이참에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 줘야 한다, 아갈타는 한번 싸우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케르가 명령했다.
[멸세 병기 이돌룸을 즉시 지구에 투입해! 그리고 국경의 병력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지구를 완전히 포위해서 물거품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이돌룸을 보고 도망치는 놈들이 있거든 모조리 잡아 죽이라고! 그리고 그 배후를 캐내! 아갈타를 우습게 본 대가를 철저히 치르게 한다!]
[네!]
살벌한 아케르의 명령에 감히 반대 의견을 꺼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명망 높은 4성 장군들이 이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아케르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도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케르도 4성 장군들의 마지막 체면을 고려해 그들이 회의실을 나가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
그리고 방금 회의실을 나온 4성 장군, 아갈타에 7명… 아니, 이제 한 명이 죽어 6명이 된 4성 장군 중 아이하세 대장이 속으로 한숨을 터뜨렸다.
‘아갈타가 망하려나…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아케르 최고 원수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실리게 된 것부터가 문제였을까?’
3성 장군을 폭행하고 장성들에게 폭언을 내뱉는 최고 원수. 그 와중에 4성 장군이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조용히 회의실을 빠져나오는 것뿐이라니…….
가장 젊은 나이에 대장의 칭호를 받으며 아갈타의 핵심 권력자로 떠올랐던 아이하세는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라 항복해야 할 때인데…….’
무려 35만 명의 정예 차원강습병이 전사하고 30대의 신살 병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실체를 알지도 못한다. 심지어 센타울과의 전쟁에서 무리를 하는 바람에 국경에서도 잡음이 들려오는 상태. 그런데 또 국경 병력을 빼서 미지의 적을 상대하겠다고?
그렇게 한다면 지구야 깨끗하게 소멸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어쩔 작정이란 말인가?
‘어리석구나. 너무나 어리석어.’
그렇기에 아이하세 대장은 생각한 것이다. 아갈타의 군인이라면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설령 떠올리더라도 죄책감에 얼른 지워 버릴 그 불경한 생각, ‘항복’을.
‘…빌어먹을! 항복도 큰 틀에서의 전략일 수 있다는 걸 왜 모르지? 아갈타의 번성이 중요하지 그깟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명예가 뭐가 중요하다고……!’
아이하세는 치미는 환멸을 삼키며 부관에게 말했다.
[부관, 짐 챙겨.]
[네, 네? 어디 가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딜 떠나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케르가 이 이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도 되지 않는 상황. 하지만 아이하세 대장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고향이 보고 싶어. 고향에 다녀오련다.]
아갈타가 아닌 아갈타의 식민 차원에서 태어난 아이하세는 아갈타의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의 문화에 딱 질려 버렸다. 그것도 그렇고…….
[자네도 나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감이 안 좋아. 여기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속이 매슥거리는 게 아무래도 불안했다. 아케르 손에 죽든… 아니면 다른 변수가 생기든… 하여튼 위험했다.
수많은 전장에서 그를 살려 준 감을 따라 아이하세는 아갈타 차원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쿠궁!
아이하세가 등지고 떠나는 아갈타의 방위성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케르의 분노로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렸다.
* * *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요.”
도련님은 긴장된 얼굴로 말했다. 전쟁은 대승으로 끝났지만 데미안이 [모이라이 홀덤]으로 점친 가장 중요한 싸움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도 이번 결과는 알지 못해요.”
나는 그 말에 싱긋 웃음으로 답했다.
“도련님이 그 운명을 볼 수 없는 상대는 지속성 신살 병기나 멸세 병기부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도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하지만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거, 꽤 괜찮은 조짐 아니에요?”
그 말에 데미안이 작게 웃었다.
“맞아요. 좋은 조짐이죠. 소시민 사령관님의 전력 역시 격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니까요. 만약 격에서부터 밀려 버렸다면 그냥 멸망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텐데… 저는 그냥 결과 자체를 보지 못했어요. 두 개의 대등한 격이 충돌을 했다는 거겠죠.”
그래. 그래야지. 우리가 준비한 게 얼만데.
지속형 신살 병기든… 심지어 멸세 병기가 온다고 해도.
무엇이 오든 싸울 수 있게 준비를 했고 대비를 했다.
그냥 가벼운 수준의 준비가 아니었다.
무려 전 차원의 시간을 되돌려 버린 경험이 있는 영웅들과 모든 지구인의 전심전력이 들어간 준비.
사람이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하고 보면 그렇다.
오히려 긴장이 되질 않는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없이 이미지트레이닝을 해 봤기 때문에 이미 여러 번 본 공연을 다시 보듯 담담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그랬고, 기절했다가 깨어난 권승리가 그랬고, 이날을 위해 치열하고 절박하게 준비하고 싸워 온 지구인 모두가 그랬다.
데미안 도련님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눈을 뜨고,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도련님은 고지했다.
“도착했습니다, 적, 최후의 병기가.”
아아, 나도 느낀다. [만상공감]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지구 전체를 잡아먹을 듯한 거대하고도 흉악한 존재감.
신살 병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차원적인 감각…….
‘지속형 신살 병기 이상’이라던 우리 예측에서 상정했던 최악의 상대.
“멸세 병기였군요. 그것도 폭발형이 아닌 지속형.”
담담하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싸워 보죠.”
이제 지난 생에서 현생까지 이어진 아갈타와의 지독한 인연에서 끝장을 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