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206화 (206/212)

12. 운명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휘하여 적진을 헤집던 소시민은 문득 생각했다.

‘그런데 적들의 사령관은 대체 어디에 있지?’

* * *

지구의 지휘 통제실.

오늘의 사령관은 데미안.

데미안이 원하는 대로 자기 입맛대로 고르고 꾸민 이곳은 지휘 통제실이라기보다는 7성급 호텔이라고 부르는 게 옳았다.

데미안과 함께 참모들, 부관들이 모두 모여 있는 홀은 천장이 시원하게 높았고, 따뜻하고 편안한 빛을 내뿜는 샹들리에가 화려하게 매달려 있다. 각종 테이블과 의자도 어둡고 따스한 원목과 적동색 금속으로 중후하고 편안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앉으면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묵직한 자신감이 들고, 잠들기 직전처럼 편안한 와중에 좋은 아이디어가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하나하나 데미안의 손길이 깃든 지휘 통제실. 그 위치도 극비에 부치고, 지구에서 가장 안전하도록 이중, 삼중으로 안배가 되어 있는 그런 장소에 때아닌 긴장감이 몰아닥쳤다.

“제 탓이 아니에요.”

연출가는 말했다.

“저는 원래 끝까지 지켜보려고 했다고요. 하지만 도련님, 프라이버시 보호 조약이라뇨. 이건 너무 갔잖아요? 아아, 안타까워요.”

하지만 안타깝다는 듯한 말과 달리 연출가는 못생긴 얼굴로 빙글빙글 웃었다.

“안 그래요?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 같은 게 있으면 도련님의 모습도, 또 이 흥미로운 지구도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거잖아요?”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에는 분명 그런 단서가 달려 있었다.

[하나 기억하시길… 이 모든 것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그대가 살아남았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데미안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 연출가가 하는 말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배신?’

날 여기서 죽여서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을 무효화하겠다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연출가, 잊었어? 우린 계약을 맺었잖아. 너는 우리한테 간섭할 수 없어.”

차원 문명의 계약은 절대적이다. 그러니 방송하지 말라고 하면 방송 못 하고 전전긍긍해 온 연출가가 아니었나? 계약 내용 중에는 분명 지구에 대한 간섭을 금지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연출가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수 없다. 분명 그래야 할 텐데… 분위기가 싸했다.

연출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오호.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니에요. 시청자들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도련님. 인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일단 이번 전쟁이 보고 싶어서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을 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게 아니다 싶어서 직접 ‘정정’하려고 나선 거죠. 제가 아니라 시청자들이요.”

궤변이었다.

“개소리하지 마! 시청자들이 간섭할 수 있게 빌미를 준 건 결국 너라는 소리 아냐!”

연출가는 조그만 어깨를 으쓱했다.

“확실히… 의견이 갈릴 여지가 있겠군요. 이럴 때는 절차를 밟아 허수바루블의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많이도 필요 없고 한 10분만 있으면 재판 신청에서 판결까지 가능할 텐데… 어쩌죠?”

연출가가 데미안을 보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10분이 없으실 것 같은데?”

쿵!

지휘 통제실이 흔들렸다. 데미안이 아끼던 샹들리에가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연출가는 계속 지껄여 댔다.

“해피 엔딩을 바라는 시청자들만큼이나 새드 엔딩을 바라는 시청자도 많아요. 또 이게 그냥 새드 엔딩인가요? 피핀 차원 최초로 방송 중 프라이버시 서약을 이끌어 낸 장본인에게 주어지는 새드 엔딩… 아, 엄청난 비극이죠? 아마 1,000년은 넘게 회자될 겁니다.”

그 와중에도 쿵! 쿵! 하는 울림은 점점 커지고, 쿠지직! 하며 무언가가 짜부라지는 소리와 함께 지휘 통제실 곳곳에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쾅! 쾅!

“꺅!”

“크악!”

억지로 문을 비틀어 열 듯이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팽창하는 게이트가 값비싼 테이블과 의자를 사방으로 밀어 버리고, 그 위에 놓여 있던 기물들은 와장창 부서져 버린다.

비명 소리.

깨지는 소리.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래도 지금 상황을 보니 결국 지구가 이길 것 같아요. 도련님은 자기 몫을 다했어요. 지구는 해피 엔딩을 맞을 거예요. 그냥 그 자리에 도련님만 없을 뿐이죠. 아… 슬퍼라.”

이제 완연히 모습을 드러낸 게이트 너머에서 아갈타의 정예 병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단순한 정예 병력이 아니었다.

“사령관……!”

데미안은 침음을 흘렸다. 여태 보아 온 그 어떤 아갈타인보다도 크고 화려한 차원강습 장비를 입은 존재가 걸어 나왔다. 굽이굽이 뻗은 뿔이 허리까지 내려오고, 검고 커다란 손은 한 손으로 데미안을 덮을 것만 같았다.

[그쪽이 지구의 사령관인가? 나는 아갈타의 사령관, 크르세스 대장이다. 피해가 너무 커. 네 목이라도 가져가야겠어.]

데미안은 이를 악물었다.

데미안은 뛰어난 전략을 세울 수는 있지만 전투의 판도를 뒤집을 힘은 없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 이 싸움을 미리 알고 대비했다면 방법이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 버리면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데미안은 자신의 능력이 오늘만큼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마 연출가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지금 이 타이밍을 노린 거겠지.

[피할 구석은 없다. 네놈의 목 하나만이라도 가져가려고 이중, 삼중으로 결계를 치고 침입했거든. 구원 따위를 기대하지는 말거라.]

싸늘하게 말하며 나서는 크르세스 대장.

무력감에 부르르 떠는 데미안.

그 앞으로 리디아가 한 걸음 나섰다.

그녀는 데미안의 어깨를 살짝 어루만져 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걱정 말아요. 도련님의 검이 여기 있잖아요.”

데미안은 눈을 끔뻑였다. 리디아의 환한 웃음. 데미안은 리디아가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 * *

사실 루드비히 가문은 절대 착한 집단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문 구성원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인류를 팔아먹을 수도 있는 이들이 바로 루드비히.

특히 가주 로버트 루드비히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가족을 제외한 모두에게 얼마든지 냉철하고 잔혹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리디아는 루드비히 가문의 희생자였다.

물론 태어나자마자 죽을 운명이었던 전쟁고아 리디아를 구해 준 것 역시 루드비히였지만, 그 후에 그녀에게 가해진 혹독한 훈련과 가혹한 실험은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리디아는 루드비히에 의해 인간이 아닌 병기로 키워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설계대로 완성된 걸작의 전투 병기.

하지만 그녀가 경호 대상과 접촉한 뒤부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가 시작되었다.

* * *

[리디아 제작 관찰 일지]

2004년 2월 21일.

리디아, 한 살 생일을 맞은 데미안 도련님과 최초 접촉. 충성과 보호의 각인을 진행. 리디아의 심장박동이 평소보다 3% 빨라졌으나 10초 후 원래대로 돌아옴. 대면을 마치고 격납고로 돌아가는 와중에 리디아가 도련님을 흘깃 돌아보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확실치 않음. 이유를 물어보자 ‘누가 저를 부른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함. 감각기관을 정밀 조사해 보았으나 이상은 발견되지 않음.

2004년 7월 19일.

리디아, 데미안 도련님과 4차 접촉. 리디아가 데미안 도련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 가고 있음. 선임 연구원 미하일 박사는 ‘리디아가 도련님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 같다.’라는 주장을 제기. 하지만 리디아의 설계와 제작 과정에서 ‘애정’은 철저히 배제하였기에 미하일 박사의 주장은 억측으로 결론지어짐.

2005년 9월 13일.

리디아는 하루 종일 도련님을 지켜보고 있음. 12차 접촉에서 도련님이 리디아를 ‘리띠아’라고 부르심. 리디아 미소를 지음…….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하일 박사의 주장이 옳았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음. ‘애정’은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한 감정. 제거하는 게 옳다는 판단하에 가주님에게 보고. 가주님은 장고 끝에 ‘관여치 말라.’라고 명하심.

2006년 7월 13일.

도련님이 또 예언을 남기심. 이번 예언은 리디아와 관계된 것으로 보임.

예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음(음성학자의 도움으로 도련님의 부정확한 발음을 해석하였음): “두 개! 두 개가 보여! 아-! 없어. 하나는 없어. 있어! 다른 하나는 있어! 대신! 대신! 아아- 마지막인데! 다 왔는데! 안 돼, 리디아! 아악! 안 돼!”

다른 예언들과 대조해 분석한 결과 리디아가 도련님을 대신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 다만 ‘두 개가 보인다’라는 구절은 해석에 실패함.

해당 예언을 알려 주자 리디아, 미소를 지음.

2007년 1월 7일.

걷다가 넘어진 데미안 도련님이 울음을 터뜨리심. 같이 있던 가주님은 루드비히는 울지 않는다고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 지켜보던 리디아가 같이 눈물을 흘림. 보고를 들은 가주님은 고민 끝에 리디아 제작 관찰 일지의 폐지를 명하심.

기록 끝.

* * *

리디아는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자신이 대신 죽을 수 있어서.

어려서부터 당했던 그 모진 훈련과 실험들 그리고 자신의 삶조차 없었던 그 임무의 과정들도 모두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 데미안을 지킬 수 있다니.

꽈아아아앙-!

쿠드드드득!

폭음과 얼어붙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크르세스 대장의 공격은 리디아의 옆구리에 틀어박혔지만, 간발의 차이로 돋아난 얼음이 주먹과 옆구리 사이를 꽝꽝 얼려 버렸다. 크르세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그의 전신에서 새하얀 태양 강기가 피어오른다.

[끈질긴 년! 그만 죽어라!]

주르륵-!

리디아가 만들어 낸 극한의 빙결이 태양 강기가 뿜어내는 열기 앞에 줄줄 녹는다. 영혼조차 얼리는 한기도 영혼조차 태우는 태양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콰직! 쾅! 쾅! 쾅!

크르세스 대장이 리디아의 머리를 왼손으로 쥐고 태양 강기가 이글거리는 오른손으로 몇 번이고 후려친다.

쩡! 쩡! 쩌적!

간발의 차이로 주먹은 박히지 않는다. 폭탄이 터지듯 순간적으로 생성되는 얼음이 리디아의 뺨과 이마에서 자라나 충격을 대신 받는다.

하지만.

박살 나서 풀풀 날리는 얼음 파편. 줄줄 녹아 흘러내리는 얼음물이 리디아의 터진 입술과 뭉개진 코에서 흐른 피와 함께 뚝뚝 떨어진다. 어찌어찌 비비고 있지만 명백한 열세. 거듭된 충격에 리디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린다.

크르세스 대장은 간신히 막을 뿐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하는 리디아를 후려치고 또 후려쳤다.

쾅! 쾅!

[그만 죽어!]

하지만, 리디아는 기어이 크르세스 대장의 팔꿈치를 맞잡았다. 그리고 말한다.

“새끼야… 도련님이 예언하셨어, 내가 도련님을 구하고 죽는다고. 그게 무슨 뜻이냐면… 우린 오늘 같이 죽는다는 뜻이다!”

그게 운명이라고. 우리 같은 필멸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다행스러운 운명이라 소리치며 그녀의 손에서 빙결이 시작되었다. 크르세스가 가진 모든 열기가 펑! 하고 폭발하듯 빠져나오고, 그 자리를 결코 부서지지 않는 극음의 얼음이 자라나 채운다.

“리디아, 안 돼!”

리디아가 데미안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얼음의 방벽 안에서 데미안은 절규하고.

[이, 이게!]

크르세스는 태양 강기를 끌어 올려 막아 보지만 얼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리디아가 자신의 생명까지 도외시하며 끌어내는 힘에 태양 강기가 점점 차갑게 식어 간다.

그 모습을 보며 리디아는 반쯤 풀리고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웃었다.

“리디아!”

웃다가, 데미안의 목소리에 문득 눈썹이 슬프게 축 늘어진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쉽다… 도련님이 자기 정체를 찾고 세상에 당당히 서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게… 못내 아쉽다.’

하지만 도련님이 슬퍼할 테니 그 감정마저 가슴 한편에 고이 묻었다.

대신 리디아의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없이 귀중한 아기가 자신의 손가락을 잡았던 순간, 아장아장 걸음을 떼던 순간, 처음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 말끔한 눈으로 부탁을 하던 순간, 업어 달라고 칭얼대던 순간, 국수를 손으로 집어먹다가 가주님에게 혼나던 순간,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운 얼음 결정처럼, 아쉽게 녹아 버리는 눈송이처럼 바람에 흩날렸다.

‘자, 감상은 그만.’

이제는 마지막 힘을 쥐어짤 때다.

리디아가 다시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을 내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매우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

“아니… 죽긴 누가 죽는단 말입니까? 누구 마음대로요?”

쿠직!

창 한 자루가, 필사적으로 저항 중이던 크르세스의 가슴을 꿰뚫어 땅에 꽂아 버린다. 얼음 조각이 꽃잎처럼 흩날리고, 빛나는 날개를 접으며 소시민은 운명을 무시하고 나타났다. 그의 주위를 날아다니는 무수한 무기가 지휘 통제실을 점거하기 위해 날뛰고 있던 아갈타의 정예병들을 한순간에 쓸어 버린다.

“적 지휘관은 안 보이고, 우리 편 사령관실은 갑자기 연락이 안 되고. 그럼 당연히 제가 올 거라 생각하고 버텨야죠! 그렇게 죽자고 싸우면 어떻게 합니까?”

퍽!

결정적인 순간에 가슴이 꿰뚫려 죽은 크르세스 대장의 머리를 발로 한 번 차 버리곤, 소시민은 시선을 돌려 입을 헤- 벌린 연출가를 바라보았다.

연출가는 “어, 어? 어떻게? 분명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데, 소시민은 한심하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넌 도련님만 쳐다보느라 다른 건 전혀 보지 못하는구나?”

그건 연출가가 데미안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말이었다.

“뭐, 뭐?”

“넌, 이 지구에서, 아직도 내가 간섭 못 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소시민의 눈이 빛났다.

[만상공감]은 ‘모든 감각’을 받아들이는 능력.

범위 내에 있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알아챌 수 있고 그 어떤 장벽의 빈틈도 찾아낼 수 있다. 예언으로도 예측할 수 없고 강대한 차원 문명의 결계로도 막을 수 없는 전지의 한 조각.

“아, 안 되는데…….”

털썩 주저앉는 연출가를 내려다보며 소시민은 말했다.

“도련님, 저거 죽일까요?”

죽다가 살아난 리디아와 펑펑 울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멍한 눈으로 소시민을 올려다본다. 하지만 여전히 실감이 안 되는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돌아보는 리디아와 달리 데미안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출가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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