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모두의 싸움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차원 격류. 그 안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건 현재로써는 나뿐이다.
‘권승리.’
[만상공감]에 걸려든 녀석을 차원 격류에서 건져 냈다. 파도에 젖은 나비처럼 축 처져 있지만 고르게 숨을 쉬고 있고, 만져 보니 따뜻하다.
“…수고했어.”
속으로 휘오를 부르자 바짝 웅크려 있던 휘오가 가지 하나를 뻗어 게이트를 열어 준다. 게이트로 권승리를 돌려보냈다.
나는 격류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아갈타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죽은 이는 많지 않다. 차원강습병이 괜히 차원강습병이 아니다. 거친 차원 격류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술과 장비를 가지고 있으니 차원강습병이다.
하지만 놈들은 지쳤고, 지휘 체계는 붕괴했고, 혼란에 빠졌다.
나는 놈들을 바라보며 아공간을 열어 장비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밥값 해야지.”
품속에서 휘오의 가지가 부르르 울리고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린다.
-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내일은 더 힘들 테니까요.
우리 지구 최고의 전략가님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든든하기도 해라.
‘지금까지만 보면 대체 뭐가 불완전하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모든 미래를 보지는 못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도련님이 틀리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의 싸움은 우리의 대승으로 끝이 날 거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압도적인 대승이냐 하는 거지.’
나 혼자 세운 목표가 있었다.
‘살수대첩에서 몇 명이 살아 갔다고 했지? 3,000명? 2,000명이었나?’
자고로 후손의 미덕은 청출어람.
‘그렇다면 우리는 1,000명 아래로 줄인다.’
오늘의 기회를 최대한 살려 아갈타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스르르릉-!
아공간 가방에서는 무기들이 끝도없이 빠져나왔다.
* * *
데미안의 전략은 단순했다. 망치와 모루.
격류에 휩쓸린 아갈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게이트 작업을 거의 마무리한 지구로 피신하는 것.
놈들은 지휘 체계도 무너지고 체력도 바닥이 난 상태로 허우적허우적 지구로 기어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상대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차원강습병은 한 명, 한 명의 전투력이 ‘악마’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하다. 영능학을 받아들인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지구에서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열심히 영능학을 수련한 무수한 지구인들, 별빛이 보내 준 10만의 동맹군들 그리고 내가 직접 키운 10만의 창신대가 그들을 막아섰다.
때론 10명이 힘을 합쳐서 아갈타의 차원강습병 한 명을 감당하고, 어떨 때는 100명이 힘을 합쳐 한 명을 감당했다.
모루가 그렇게 버티고 있을 때 지구의 최정예 병력들, 그러니까 1만 5천 명의 화랑단, 크르으랑의 3만 정병, 센타울의 8천 결사대, 또 차원 각지에서 모인 1만 5천 명의 전사들과 2만 명의 트라팔가스 동맹군, 마지막으로 아몬이 데려온 연구자들의 경호원 1,500명은 차원의 격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모루 위에 달군 철을 올리고 망치로 두들기듯이.
지구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동안 우리는 정신 못 차린 아갈타 군을 후방에서부터 박살을 낸다.
지휘는 데미안.
차원 격류를 이동하는 수단은 다시 몸을 일으켜 가지를 뻗는 휘오.
그리고 나는 프리 롤이다.
망치와 모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아군을 돕고 뭉쳐 있는 적들을 부순다.
일단 [만상공감]을 최대로 발현했다.
차원 격류 속에서부터 지구 전역까지. 아득하게 많은 감각이 밀려 들어온다. 나는 그 하나하나를 받아들이며 지금 이 순간 내가 있어야 하는 장소를 찾아냈다.
‘야! 꼬맹이! 뒤로 빠져!’
‘죽어!’
‘빠지라고!’
‘너네 때문에! 엄마도! 아빠도! 흑… 죽어!’
‘꼬맹이! 큭! 젠장!’
해일처럼 밀려드는 감각들 중에 유독 치열한 격전의 현장이 들어온다.
열네 살이나 됐을까? 어린이 티를 겨우 벗은 소년이 캐스터를 쥐고 아갈타의 차원강습병 앞에 섰다. 100명이 대오를 짜고 겨우 상대해야 될까 말까 한 상황이지만, 하필이면 열 명이 넘는 차원강습병이 나타나는 바람에 순식간에 무너진 대열.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지는 그 풍경 속에서 소년은 악에 받쳐 차원강습병에게 무모하게 달려든다.
‘망할! 누가 꼬맹이 챙겨! 어린애들까지 이런 데서 죽게 할 순 없잖아!’
그 와중에 한 아저씨가 어린 소년을 지키기 위해 캐스터를 휘두르며 달려 나가 앞을 가로막는다.
‘휘오.’
나는 속으로 휘오를 부르며 손가락을 까딱했다.
피이잉-!
내가 가장 오랫동안 써 온 무기 중의 하나, 파도가 자기 몸통이 겨우 지나갈 만한 크기로 열린 화이트 게이트를 통과한다. 목적지는 지금 막 몸을 던진 아저씨를 찢어발기려는 아갈타의 차원강습병.
서걱!
홀연히 나타난 회칼이 차원강습병의 목 언저리를 크게 썰고 지나간다. 촤아악, 흩뿌려지는 피. 순식간에 주변을 날아다니며 차원강습병을 정리한다. 죽겠다고 나서던 소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 앞을 가로막던 아저씨도 화들짝 놀란다.
‘파도! 파도다!’
‘사령관님이다!’
용케 알아본 누군가가 크게 외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내 [만상공감]은 이미 다른 곳을 훑고 있었다.
지구 곳곳이 격전이었다.
지구인들과 원시 차원에서 온 전사들 그리고 아갈타의 병사들이 뒤섞여 서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한다.
‘빌어먹을 악마 놈들! 천상의 영광을 위해 죽어라!’
…라고 외치는 자는 십자군 같은 느낌의 차림에 성검 시스템을 지급 받은 이계인이었다.
‘이 전쟁이 우리 세계가 한 발 더 발전하는 밑거름이 될 겁니다! 모두 힘내세요!’
…라고 외치는 이는 증기를 뿜어내며 기계 팔로 주먹질을 하고 총을 쏘아 대는 이계인이었다.
나는 휘오가 열어 주는 게이트를 통해 그들에게 내 물건들을 보낸다.
‘크윽… 신이시여…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아갈타의 차원강습병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죽음을 예감한 십자군을 위해서는.
쿵!
거대한 망치를 보내 아갈타의 병사를 머리부터 으깨 버리고.
‘큭… 내 팔이……! 빌어먹을!’
기계 팔이 날아간 여전사를 위해서는.
철컥!
회복 물약이 든 주사기와 함께 대규모로 사들였던 자율 전투형 의수를 보냈다.
‘시, 신의 보우다!’
‘이건… 크고 아름다운 기계 팔! 설마… 소시민 사령관님?’
아아, 머리 아프니까 나 부르지 마.
찬양은 뒤로하고 나는 수천 개의 물건을 끝도 없이 지구와 차원 격류로 날려 보냈다. 내게 길들지 않은 물건이라 해도 소장품의 갤러리 효과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기에, 하다못해 내가 쓰던 의자를 날려 보내서 패닉에 빠진 아군을 후방으로 실어 나르는 역할도 거뜬하게 수행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기도에 응답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만상공감]을 통해 너무나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적응해 냈다.
그렇게 내가 만들어 낸 디테일들이 전장 전체의 분위기를 뒤바꾸고 있었다.
데미안의 전략은 말하자면 큰 밑그림이고.
내 역할은 그 밑그림을 가장 빼어난 선과 색으로 덧칠해 완성하는 것.
세세한 색칠과 바탕은 다 만들었으니 이제는 크고 굵은 선을 그릴 차례였다.
‘자, 적응 끝! 나도 슬슬 직접 움직여 볼까?’
촤르르륵!
날개를 펼쳤다. 등 뒤로 새로운 신경이 연결되며 쭉 뻗어 나가는 날개. 살면서 한 번도 쭉 펴 본 적 없는 다리를 쭉 펴는 것처럼 짜르르 하고 시원한 느낌이 든다.
헬리온의 날개.
이건 전 차원계에서 현재 가장 비싼 날개다.
쓰레기 시장에서 10알을 주고 산 네필림의 날개를 쓰던 내가 이젠 1억 타키온짜리 초하이엔드 끝판왕 주문 제작 형식의 날개를 달았다.
감개무량.
싸구려 중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골목을 누비던 아이가 최신예 전투기를 타고 창공을 질주하게 되면 아마 이런 기분일까?
옆구리에는 이성계의 활을 걸어 놓고 손에는 일출창을 들었다.
우우우웅-!
활대는 산맥처럼 굳건하고 시위는 폭풍처럼 사납다. 일출창의 창끝은 태양도 떨어뜨릴 것처럼 날카롭다.
전신에 착용한 차원강습 장비는 내미슈가 선물해 준 초월超越이.
외형은 보일 듯 말 듯 전혀 요란하지 않았다. 아우라가 그렇듯, 그저 달빛처럼 물방울처럼 내 몸을 매끈하게 감싸고 있을 뿐이다.
우우우웅!
초월이는 셀 수 없이 복잡한 화음을 만들어 내며 울었다. 마치 고양이가 도시를 능청스럽게 살아가듯이 저절로 내 몸에 맞춰 길이 드는 자연 슈트.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 입지 않은 것처럼 가벼우면서도 갑옷처럼 든든하다.
이 모든 것이 붉은 아우라에 휘감겨 있었다.
소장품.
백색 아우라를 뛰어넘는 다음 단계.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차원 문명들 사이에서도 전설로 취급받는 소장품을 나는 그동안 13개나 만들어 낸 것이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해서 소장품이 된 물건도 있고, 초월이처럼 이번에 새로 얻었지만 나와 상성이 잘 맞고 집중적으로 길들여서 소장품이 된 것도 있다.
처음 길을 여는 게 어려워서 그랬지, 일단 내 영혼이 소장품을 만들어 낼 정도로 성장하고 그 방법을 깨닫고 나자 어려울 게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성과를 마음껏 즐길 차례.
이번엔 시선을 돌려 차원 격류를 보았다. 아군 정예 병력이 혼란에 빠진 적들을 망치처럼 분쇄하고 있었지만, 곳곳에서 격렬한 저항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 목표는 바로 그런 곳들.
일출창을 쥐고 날개를 휘둘렀다.
창끝에서는 달빛 강기가 피어오른다.
날개를 한 번 휘두르는 순간,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격류 속의 한 지점이 눈앞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 일출창을 찔러 넣자 그 경로상에 있던 적들이 단숨에 꿰뚫린다. 그대로 창을 놓고 이성계의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다가 놓는다.
파아아앙-!
검은 번개가 내리꽂히듯 뻗어 나간 화살이 혼란을 이제 막 수습하고 반격을 준비하는 아갈타의 차원강습함을 꿰뚫어 버린다.
적들은 미처 반격을 하기도 전에 다시 무너지고 아군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쭉쭉 뻗으며 적들을 뭉개고 부순다.
“우아아! 다 죽여 버리자!”
차원 격류에서 지구까지. [만상공감]에 걸려드는 아갈타의 군세가 망치에 부서지는 과자처럼… 아니, 비질에 쓸려 나가는 먼지들처럼 빠르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 * *
“후… 소시민 님 덕분에 신경 쓸 일이 없네.”
쉬지 않고 지휘를 계속하던 데미안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좀 아쉽다 하는 부분에는 반드시 나타나니… 꼭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것 같다니까.”
데미안의 곁에서 호위 임무를 수행 중이던 리디아가 말했다.
“도련님이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걱정 많이 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수백 번도 넘게 [모이라이 홀덤]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리디아의 말에 데미안은 그냥 씩 웃고 말았지만 그녀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모이라이 홀덤]은 수명을 깎아 먹을 위험성이 있는 강력한 능력. 그걸 단시간에 이토록 많이 사용한 건 데미안이 태어난 이후 처음이었다.
“아, 물론… 사전에 적들이 어떻게 나올지, 거기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다 파악을 해 두긴 했지. 하지만 현실은 달라. 의사소통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지나친 흥분이나 긴장 때문에 계획대로 안 움직이기도 하고.”
그래서 데미안은 [모이라이 홀덤]을 더 사용하려고 했었다. 경로를 벗어나면 내비가 새로운 경로를 제시해 주듯이.
하지만 어느 순간 소시민이 알아서 그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오히려 더 나은 성과를 만들어 냈다.
데미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령관님 경지가 더 올라갔나 봐. 이젠 [모이라이 홀덤]이 그 활약이 어느 정도인지 제대로 파악을 못 하네.”
이 정도라면… 분명 내일 있을 시련도 이겨 낼 수 있을 거다. 데미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런데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연출가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도련님, 도련님의 능력 말입니다.”
“응?”
“정말 불완전한 모양입니다.”
“…뭐야, 갑자기?”
데미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갈타와 지구. 그리고 어비스 게이트. 이 세 가지에만 집중을 하시니 다른 건 전혀 보시지 못하는군요?”
연출가가 입을 벌리고 불쾌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