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204화 (204/212)

10. 권승리의 싸움

서민서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격납고에 봉인해 두었던 신살 병기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하나. 또 하나. 꽃 내음이 퍼지고, 종소리가 울리고, 아기 울음이 터지고, 살갗을 타고 짜릿한 전기가 흐른다.

“후우… 후우…….”

마침내 모든 신살 병기를 활성 상태로 만든 서민서가 긴장된 숨을 내쉰다.

기이하다.

눈으로 보면 그저 미사일처럼 생긴 신살 병기들이지만, 아주 둔감한 사람들조차 지금 모든 신살 병기가 서민서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낀다. 육신이 아닌 영혼으로 느껴지는 감각.

그녀의 작은 몸동작 하나하나에 아기새가 어미를 따르듯 시선을 옮기는 신살 병기들.

“준비됐어요.”

그녀의 지시에 열 대의 신살 병기를 하나씩 하나씩 전폭기에 실었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차원 전폭기. 엄청나게 값비싼 물건이지만 사실상은 열 대의 신살 병기를 옮기기 위한 단순 수레에 가까운 용도이다. 실제 추진력과 차원 도약은 세계수의 숲과 서민서가 몸소 감당할 것이니까.

“서민서, 내 계산에 따르면 휘오랑 네가 동시에 일으키는 힘은 그 어떤 전폭기보다, 아니 그 어떤 차원 간 탄도 시스템보다도 더 강력할 테니까… 그러니까, 분명…….”

내가 설명을 하는데 서민서가 손수건을 내민다.

“이미 다 기억했어요.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내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는 서민서. 나는 그제야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내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서민서는 그대로 뒤돌아서 1인승 전폭기에 탑승했다. 손가락 두 개를 모아 눈썹 끝에 붙였다 떼며 말한다.

“그럼 서민서, 출격합니다. 적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주고 귀환하겠습니다. 부디 제가 귀환할 집을 잘 지켜 주세요.”

그러곤 시간도 끌지 않았다.

“가자, 휘오.”

휘오오오-

구우우우웅-

서민서가 탄 전폭기 앞으로 검푸른 바다와도 같은 게이트가 열린다. 10개, 100개, 500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중첩되는 게이트. 휘오의 형제자매들이 의식을 찾은 탓이다. 예전 센타울을 방문할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력이 휘몰아친다.

그걸 보고 나는 조금 안심을 했다.

그래. 이 힘이면 틀림없이 타깃을 단숨에 꿰뚫을 수 있을 것이다.

파아아앙-!

서민서의 전폭기가 쏘아지듯 중첩된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작전명 어벤지Avenge. 감히 지구를 하찮게 보고 신살 병기 공격부터 결정한 아갈타는… 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 * *

아군의 동요를 최소화하기 위해 수뇌부들을 제외하고는 아갈타의 공격이 신살 병기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숨겼다.

물론 크르으랑과 리아센 등 많은 병력을 끌고 온 이들은 내 설명을 듣고 아연실색을 했다.

[저, 정말 막아 낼 수 있는 것 맞나?]

“맞다니까요. 몇 번을 물어요.”

크르으랑은 하루에도 다섯 번씩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말했잖아요. 유물이 있고 승리가 있고 여기가 지구니까, 막을 수 있어요.”

[하아… 알아. 몇 번이나 들어서 외울 정도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이론상 말은 되는데 머릿속으로는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걸 어떡해? 좀 더 실감 나게 설명을 해 봐!]

이 아저씨야, 그걸 실감 나게 설명할 것 같으면 내가 소설가를 하지 왜 사령관을 하고 있겠냐?

“하여튼, 이제 와서 도망가기엔 늦었으니까 그냥 믿고 지켜봐요.”

[야! 야! 너 어제랑 태도가 다르다? 야! 내가 너 하나 믿고 지금……!]

“아아. 몰라요, 몰라.”

도련님이 본 미래에 따르면 이제 곧 아갈타의 공격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상공감]이 차원 너머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영력을 감지했다.

“아… 도착했다.”

[히익!]

호랑이 아저씨가 식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하늘이 어두워졌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기, 기분이 이상해. 토할 것 같아…….’

‘누구야? 누가 이렇게 비명을 질러?’

혼란에 빠진 목소리들이 들린다.

그래. 신을 죽일 수 있는 병기가 살의를 품고 지구의 경계로 다가오는 중이다. 사달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지.

마른하늘에 그물망처럼 빼곡한 번개가 몰아치고, 비가 후드드 쏟아지더니 땅에 떨어진 비가 다시 하늘로 후루루 빨려 올라간다. 지진이 일어나고 컵에 든 물이 소용돌이를 친다. 땅과 하늘이, 이 지구 전체가 겁에 질려 벌벌벌 떠는 것만 같다. 영력이 약한 이들은 환청을 듣고 환각을 본다.

급변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걸 미리 듣고 대비하고 있던 일선 지휘관들이 혼란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선 지휘관들부터가 다리를 달달 떨며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신살 병기는 그 접근만으로도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자아냈다.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잘해라, 권승리.’

지금 차원의 격류에는 권승리라는 영웅이 나가 있으니까. 아직 작은 소녀지만 하늘을 짊어질 만한 거인이었다.

* * *

반짝.

차원의 격류 속에 앉아 명상 중이던 권승리가 눈을 떴다. 소시민의 신호도 필요 없었다. 이건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니까.

‘왔구나.’

신을 죽일 수 있는 살기가 지구 전역을 뒤덮으며 다가온다.

‘하나, 둘… 다섯.’

숫자는 다섯. 생각보다 적다. 권승리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에피타이저로 딱이네.’

그녀가 입술을 열었다.

“휘오.”

휘오오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휘오가 답했다.

- 응!

“엎드려.”

휘오오오오-

싸르르르-

아, 하고 권승리는 탄성을 터뜨렸다.

사실 그녀는 차원과 차원 사이로 가지를 뻗은 휘오의 실체를 느낀 적이 없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면서도 산소처럼 희미한 모순의 존재가 세계수였으니까. 하지만 저 머나먼 차원까지 가지를 뻗었던 휘오가 가지를 접는 순간, 권승리는 여태 느끼지 못했던 휘오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꼈다.

거대하다. 그 무엇도 흔들 수 없을 것 같은 고차원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부터 권승리가 하려는 일은 그런 휘오조차 감당할 수 없는 것.

휘오는 머나먼 차원까지 뻗었던 가지를 모두 회수해 지구 안으로 바싹 몸을 웅크린다.

- 준비됐어.

휘오의 말에 권승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다.”

화르르르-!

미리 꺼내 두었던 유물들에 불이 붙었다. 소멸하는 유물의 힘이 고스란히 권승리에게 돌아온다.

‘원래의 대계는 10,000개의 유물을 불태워 지구의 차원 격류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이었지만…….’

나갈 수도 없고 들어올 수도 없는, 이능과 영력조차 짓눌려 버리는 막강한 차원 격류를 일으키는 게 본래 아틀라스 클럽이 준비하던 대계였다. 하지만 소시민이 나타났고, 그 대계는 목적을 바꾸었다. 지구를 완전히 격리하는 수준의 차원 격류는 필요 없다.

‘지금 필요한 건 그저 신살 병기를 표류시킬 정도의 차원 격류!’

400개의 유물이 불에 타 사그라든다.

일단 그렇다.

아직도 남아 있는 유물의 개수는 천 개를 가뿐히 넘는다.

권승리는 손을 뻗고, 주먹을 움켜쥐고 깃발을 휘두르듯 등 뒤로 세차게 끌어당겼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탈색된다. 하지만 이쯤이야. 매일 탈진할 때까지 수련하던 권승리.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어.’

구르르르르-!

영혼을 울리는 진동 소리와 함께 차원 격류가 쭉 딸려 온다. 둥글게, 모든 면에서 균일했던 격류의 깊이가 급격히 낮아지고 한 부분만이 거대하게 부푼다.

격류. 아니, 해일.

“가자! 밥 먹으러!”

드디어 이 순간이 왔다.

권승리는 입을 한껏 벌리고 웃으며 주먹을 쭉! 내리쳤다.

콰르르르르-!

차원 격류의 해일이 다섯 발의 신살 병기를 흔적도 없이 집어삼켰다.

* * *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신살 병기를 제어하던 아갈타의 진영은 난리가 났다.

[왜 통제가 안 먹혀? 왜 차원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앉았냐고!]

상황을 파악한 부관이 빠르게 알렸다.

[차원 격류! 차원 격류 때문입니다! 지구의 차원 격류가 평소보다 100배는 더 강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신살 병기에 우리 측 신호가 닿지 않습니다!]

[뭐, 뭐? 100배? 거기 원래도 격류가 미쳤던 곳 아니야? 그런데 100배?]

[예, 예! 틀림없습니다. 신살 병기가 궤적을 잃고 휩쓸린 걸 보면 관측 시스템의 오류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무슨……!]

신살 병기 통제관은 이를 갈아붙였다.

[운이 좋구나, 지구 놈들……!]

차원 격류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통제관은 그저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어, 어떻게 할까요. 상부에 보고하고 판단을…….]

[됐어. 어차피 서른 발 다 승인받았어. 더 퍼붓는다! 어차피 차원 격류 따위가 신살 병기를 파괴하지는 못해! 차원 격류째로 날려 버린다. 계속 쏟아부어!]

[예!]

통제관은 단순히 신살 병기를 더 퍼부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케르 최고 원수를 비롯한 장성들이 신살 병기 승인까지 내려 줬는데 시간을 끌어 봐야 무능을 증명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중요 물자를 낭비했다는 질책을 들을지언정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생각이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었다. 신살 병기의 힘은 차원 격류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 한계 이상의 신살 병기가 들어가면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뻥! 하고 터져 버리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차원 격류와 함께 뭉개진 비눗방울처럼 소멸하리라.

통제관은 틀림없이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열 발째 발사했습니다!]

[지구의 차원 격류가 더욱 빨라집니다!]

[통상의 200배!]

[더 쏟아부어!]

[스무 발째 발사했습니다! 지구의 차원 격류! 통상의 300배!]

[서른 발 모두 발사했습니다!]

[지구의 차원 격류… 오, 오백 배!]

통제관은 황당함에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서른 발을 모조리 휩쓸며 지구의 차원 격류가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었다.

[그래도… 터지긴 터지겠죠?]

[당연히 터지지! 시간문제야!]

그렇게 장담하면서도 통제관은 왠지 모를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다.

* * *

우르르르릉-!

쏴아아아아!

해가 떠 있는데도 하늘이 밤처럼 어두워지고, 구름도 없는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지구에서 전투를 준비 중이던 사람들은 얼떨떨함에 혀를 찼다.

“지금 보면 딱 멸망 전의 징조인데… 아까 하도 지랄을 했더니 오히려 이게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네.”

“그러니까. 적어도 빗줄기가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잖아?”

“나도 속이 좀 편안해진 것 같은데?”

“나도 환청이 안 들려.”

“그런데 대신에… 영력 움직임이 좀 둔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꼭 장갑 끼고 느끼는 것처럼 영력이 둔탁하게 느껴진다.”

점점 강해지는 차원 격류로 인해 지구와 외부가 단절되어 가며 신살 병기가 주는 위압감이 줄어든 영향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영력이 억눌려서 둔해지는 것도 실시간으로 체험 중인 사람들이었다.

그 시각, 크르으랑은 하늘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이게 진짜 되다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사리니 아몬이 낄낄 웃었다. 그의 귀 뒤로 돋아난 한 쌍의 뿔이 어둠 속에서 지직거리며 노란 번갯불을 튀어 올린다.

[아니, 여태 그걸 못 믿고 있었어?]

크르으랑은 불퉁하게 대꾸했다.

[아, 예. 광룡족 어르신께서는 연세가 많으셔서 이 정도 경험이야 아무렇지 않으실지 몰라도, 저 같은 어린애는 지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러곤 다시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곤 말했다.

[그런데 아직 끝난 건 아니죠?]

[아니지. 신살 병기야. 아무리 차원 격류가 거세도 그걸 그냥 없앨 순 없어. 그냥 지구의 경계를 따라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야. 이러다가 격류가 약해지면 그대로 격류 속에서 폭발하거나 아니면 지구 안으로 처박혀서 폭발하겠지. 어느 쪽이든 지구는 거품처럼 바스라질 거야.]

[그… 뭐, 그러면 진짜 그걸 하는 겁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됩니까? 혼돈 오염이라는 게… 일으키려고 한다고 해서 막 일어나고 그런 현상이 아니잖아요?]

케사리니 아몬이 씨익 웃었다.

[자네, 내가 왜 빚을 다 갚고도 지구에 붙어 있었는 줄 아나?]

[…그게 궁금하긴 했습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니 드래고니안에서도 꽤 이름 날리던 인챈터시던데 왜 이런 촌구석에 박혀 있나 했거든요. 그 이유랑 관련이 있습니까?]

크르으랑이 눈을 빛냈다. 비결을 알아낸다면 아몬을 고향인 크레아 차원으로 모셔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 속내를 눈치챈 케사리니 아몬이 픽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구가 특별하기 때문이지.]

[지구가 특별하다고요?]

[그래. 나는 지구가 세계의 배꼽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세계의 배꼽… 설마! 창세가 시작된 그 시원始原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케사리니 아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가정하면 왜 지구에만 유독 권능 사용자가 많은지, 왜 이곳에 그렇게 많은 고대신의 유해와 유물이 있는지가 모두 설명이 되지.]

[하지만……!]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그런 게 아니야.]

아몬이 이를 드러내고 웃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초 이전은 어땠을 것 같아? 그땐 세계와 질서가 생겨나기 이전이다. 만물과 사상이 아직 혼돈에 잠겨 있고, 저 저주받을 외신들만이 기어 다녔겠지. 그런 세상에서 최초로 떨어져 나온 질서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신의 꿈결이다. 그런데 그 꿈이 시작된 발원지는 어떤 곳일까? 어쩌면 그곳이야말로 태초 이전의 혼돈과 가장 가까운 문. 어쩌면 그 혼돈을 막고 있는 마개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크르으랑의 시선이 깊어졌다.

[…본래 지구는 차원 격류가 지금보다 수천 배는 강해서 그 무엇도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고 이능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 했죠. 꼭… 단단한 봉인처럼 말이죠.]

[맞아.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힘이 약해졌고, 그 결과로.]

따악!

아몬이 손가락을 튕기고 말했다.

[온 세상의 그 어떤 차원보다도 쉽게 혼돈 오염… 지구식 표현으로는 어비스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 말이야.]

아몬은 싱글벙글 웃었다.

[내가 괜히 연구자를 100명이나 데려온 줄 알아? 세계의 배꼽인 이곳을 지키면서 연구를 해 볼 작정이기도 하지만… 일단은 어비스 게이트를 짱짱하게 열어 버리겠다는 소시민의 계획을 돕기 위해서였지.]

[그럼……!]

크르으랑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래. 창세 이래로 가장 거대한 어비스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게이트 너머 저주받을 외신들이 저 빌어먹을 신살 병기들을 삼켜 주겠지.]

후우우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상이 진동했다. 섬찟한 혐오감과 함께 모든 이의 살갗에 소름이 돋는다.

어둡던 하늘이 투명해지고 불쾌한 회색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조였다. 모든 차원에서 가장 불길하고 섬뜩한 재앙, 혼돈 오염, 그러니까 어비스 게이트가 열리는 전조.

아몬은 그 모양을 지켜보며 낄낄 웃었다.

[재수 없는 새끼 둘을 동시에 엿 먹이는 거야. 이러니 내가 지구를 떠날 수 있었겠냐고.]

* * *

차원의 격류 속에서 권승리는 홀로 생각했다.

‘시작한다.’

웅-! 우웅-!

이미 300개의 유물은 케사리니 아몬과 100명의 연구자들이 설계한 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권승리는 유물들에 둘러진 금줄 봉인을 하나씩 하나씩 순서대로 태워 버린다.

웅-! 우웅-!

유물들의 공명이 점점 강해졌다. 예전에 어비스 게이트로 연출가를 협박했을 때 공명시킨 유물은 고작 3개. 지금은 300개. 하지만 공명의 시너지는 단순한 숫자의 개수를 초월한다.

후우우우웅-

지구라는 차원 전역에 불길한 회색빛 석양이 진다.

권승리는 불쾌감을 느꼈다. 속이 매슥거린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역한 냄새가 난다. 저 잿빛 석양 너머에서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길하고 부정한 존재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터져 나온다.’

그건 권승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권승리는 이를 악물었다.

어비스 게이트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타이밍에 나타나야 했다. 저 안에서 기어 다니는 부정한 것이 단 하나라도 밖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까드드득!

권승리는 두 손으로 법칙을 쥐었다. 어비스 게이트의 발현을 법칙으로 옭아맨다.

‘자, 따라라.’

하지만.

머릿속으로 누군가 토해 놓은 것처럼 불쾌하고 불결한 의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하. 벌레. 찮. 같. 구나]

[본디. 헛된. 존재하지. 속박. 않는 것들. 이로다]

꾸르르르륵.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머릿속을 뒤흔들고, 부정한 혼돈은 권승리가 옭아맨 법칙의 제방을 무너뜨릴 듯이 짓쳐 들어온다. 마치 법칙 같은 건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처럼.

‘와… 미친… 예상보다 더 거센데?’

차원 격류를 조종하랴 어비스 게이트를 통제하랴, 양쪽으로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권승리는 이를 악물었다.

파스스-

하얗게 타다 못해 머리칼 몇 가닥이 재처럼 바스라져 날린다. 하지만, 하지만.

권승리는 아몬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곳이 세계의 배꼽이라면 너의 능력도 소시민의 능력도 모두 이해가 돼. 이 모든 것을 시작한 태초의 창세 신. 그 작자의 조각을 가장 크게 물려받은 게 너랑 소시민이겠지. 한 명 더 끼자면 데미안까지. 소시민과 데미안은 전지의 조각들을 그리고 너는…….’

전능의 조각을.

권승리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새끼들아, 내가 바로 전능을 물려받은 창세 신의 후예다.’

손끝부터 머리털 끝까지 짜릿한 고통이 온몸을 벌벌 떨리게 했지만, 그래도 권승리는 웃었다. 머릿속으론 재밌는 이야기를 생각한다. 아득한 옛날, 이 모든 게 시작되기도 전인 태초 이전의 시절. 그때 우주는 혼돈에 잠겨 있고 오로지 저 역겹고 부정한 것들만이 기어 다녔을 것이다. 그때 그들 틈에 섞여 있던 창세 신은 생각했겠지. ‘아, 역겹고 더럽다. 이딴 새끼들하고 같이 살아야 한다니.’. 그래서 혼돈을 분리해 질서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고, 혼돈이 들어오지 못하게 구멍을 꽉꽉 틀어막았겠지. 창세 신이 혼자였는지 여럿이었는지까지는 연구자들이 논의할 사안이지만, 아무튼 저들 모두를 엿 먹이고 떠나왔을 것이다.

‘나는 그런 신의 후예인 거고… 그러니까.’

한 번 더 엿이나 먹어라.

권승리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소시민이 선물한 꿈결의 장갑은 어느새 녹아내리고,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질린 권승리의 손끝이 드러난다.

까드드드득!

혼돈을 토해 내는 어비스 게이트를 법칙이 옭아맨다. 옭아매고, 또 옭아맨다.

[네. 배. 가. 신자. 아. 가! 직도!]

외신 또는 혼돈의 존재 또는 어비스의 파수꾼. 명칭만 해도 다양하기 짝이 없는 이 부정한 것들이 무어라 무어라 지껄였지만, 권승리의 관심은 이미 놈들을 떠났다.

그녀가 직시하는 건 그녀가 이끄는 대로 차원 격류에 휩쓸려 오는 서른 발의 신살 병기. 권승리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린다.

“잘 가라. 다시는 여기에 침 흘리지 말고, 새끼들아.”

꽝!

꽈광!

스트라이크. 또 스트라이크.

하나. 둘. 어비스 게이트에 묵직하게 꽂히는 신살 병기.

이제야 구분 가능한 의지가 들려온다.

[크웨에에에에엑!]

[갸아아아!]

역시. 적이 입에서 뱉어야 하는 건 비명 소리뿐이지. 어디 건방지게 말 비슷한 걸 지껄여?

꾸르르르르르릉!

천지가 요동쳤다. 지구가 거품처럼 뒤흔들렸다. 차원 격류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다가 얼어붙었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륵!

활짝 열렸던 어비스 게이트가 순식간에 쪼그라들어 배꼽처럼 꼭 아물어 버렸다.

‘아… 죽겠다.’

신살 병기 소멸.

어비스 게이트도 소멸.

권승리는 잠잠하게 가라앉은 차원 격류에 잠겨들며 생각했다.

‘해냈다. 회귀까지 해서 해냈다. 내 몫의 대계를 해냈다고…….’

아직 할 일이 남았지만 제일 중요한 일은 똑바로 처리했다. 그 성취감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울고 싶은데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서 아쉬울 뿐이었다.

‘빨리 끝내고 한잠… 깊이 자고 싶다.’

* * *

대체 어떻게?

아갈타 수뇌부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이 한마디의 의문이었다.

대체 왜 신살 병기가 사라진 거지? 차원 격류까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소멸을 해 버린다는 말인가?

격류가 너무 거셌기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의문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을 뿐이다.

하지만 아갈타의 최고 원수 아케르는 달랐다.

그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의문이 아닌 분노.

그저 활활 타오르는 격노였다.

[다시 말해 보라.]

신살 병기 통제관이 벌벌 떨면서도 용케 대답했다.

[네, 네! 원인 미상의 이유로 신살 병기 서른 발이 소멸되었습니다. 지구는 건재해 보입니다. 어쩌면 확인되지 않은 또 다른 차원 문명이 간섭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답에 아갈타의 장성들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대답이었다. 아갈타 몰래 강력한 차원 문명이 개입을 했다고 한다면 지금의 이상 현상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체 어떤 무기를 어떻게 사용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케르 최고 원수의 분노는 고작 그 정도 대답으로 가라앉힐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쓸모없는 새끼.]

와자작!

자리에 앉아 있던 아케르가 언제 어떻게 움직였는지 본 사람이 없었다. 섬뜩한 소리에 시선을 옮겼을 땐 이미 아케르가 신살 병기 통제관의 머리를 쥐고 두부처럼 으깨 버린 다음이었다. 스산한 공기가 회의실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갈타에서도 명예로운 자로 인정받는 대좌 계급의 간부가 파리처럼 목숨을 잃었다.

[침묵의 해적단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이놈들에게 발목 잡힌 게 몇 번이지?]

아케르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케르는 이미 스스로 분노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로랑 대좌가 죽었다! 태양 창을 빼앗기고 차원 요새가 침탈당했다!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어! 밀수꾼들의 네트워크를 통째로 빼앗겼다! 그런데 너희는 뭐 하고 있었어!]

그러는 아케르 원수는 대체 무얼 하고 있었소! 그런 불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도 장성들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신살 병기 서른 발을 내줬어! 서른 발이라고! 국경 지역에 있는 것 말고 가용 가능한 모든 신살 병기를 내줬다고! 그런데도 처리를 못 해?! 기어코 전쟁을 만들어?! 언제부터 우리 아갈타가 해적 따위를 상대로 전쟁을 했냐는 말이야!]

로랑이 죽었을 때만 해도 아케르는 당장 침묵의 해적단 단장을 잡아 와서 손수 찢어 죽일 작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놈들은 마치 자신들이 차원 문명이라도 된 것처럼, 아갈타와 대등하기라도 한 것처럼 까불어 댔다.

불명예. 그저 발에 차이는 돌멩이 같은 것이 자신을 대등하게 봐 달라고 엉겨 붙는 불쾌한 상황. 그래서였다. 아케르는 오히려 놈들에게서 관심을 끊고자 했다. 무심하게 발로 뻥 차 버리고 묻어 버리려 했다.

그랬는데…….

오히려 걷어찼다가 발을 다쳐서 펄펄 뛰어?

이 불명예로 즉결 처분 당할 새끼들……!

아케르는 분노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한 해결을 바랐다.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긁는 돌멩이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가루로 만들고자 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할 것.

[현재 지구의 차원 격류 상태는?]

[아까의 이상 가속 현상이 끝난 이후로 세 시간째 잠잠합니다.]

[개척 지역에 나가 있는 장군이 누가 있지?]

[군대 재편성 문제로 크르세스 대장이 나가 있습니다.]

[연결해!]

[예!]

대좌 계급의 신살 병기 통제관이 눈앞에서 머리가 깨져 죽은 상황이었다. 부관과 참모들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였고, 즉각 크르세스 대장과 통신이 연결되었다.

[크르세스 대장.]

- 예, 최고 원수님.

[개척 지역에서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지?]

- 최대한 쥐어짠다면 35만의 정예병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주겠소. 지구를 점령하시오. 다른 차원 문명이 개입했든 천재지변이 일어났든, 35만 대군을 막아 낼 병력까지 준비되어 있진 않겠지.]

-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아케르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친 호흡을 뱉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멸세 병기 이돌룸은 지금 어디에 있지? 개척 지역에서 많이 떨어져 있나?]

부관이 얼른 대답했다.

[네! 가장 빠른 수송선으로 이동시키면 이틀이면 도달합니다!]

아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돌룸도 지구로 보내라. 확실하고 완전한 파괴를 원한다.]

[예. 알겠습니다!]

[크르세스 대장.]

- 예.

[이돌룸이 헛걸음을 하길 바라겠소.]

- …이돌룸이 고작 이런 싸움에 쓰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그래야 될 거야.]

이 이상 화를 내는 것도 왠지 지는 것 같아서.

아케르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내리눌렀다.

* * *

품속에 넣어 둔 휘오의 가지가 부르르 떨리고 소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 승리야, 진입했어. 35만 명이다.

차원 격류 속에 잠겨 있던 권승리는 눈을 반짝 떴다.

‘아, 잠시 혼절을 했었나?’

몸이 무거웠다. 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이 이상 움직이면 죽을 것 같다며 엄살을 떤다.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권승리는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어.”

- …부탁한다.

권승리는 격류에 제멋대로 휩쓸리던 몸을 바로 세웠다. 무겁다. 머리가 띵하고 코에서 쇳내가 난다.

하지만.

하지만.

‘뭐 어쩌겠어?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벌떡 일어나야지.

보니까, 벌써 차원 격류 속으로 아갈타의 대군이 밀려들어 와 있었다. 지구에 게이트를 여는 작업이 한창이다.

‘아… 피곤하긴 했나 보네. 저것들이 바로 옆에 와 있었는데도 몰랐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마지막 피로를 털어 낸 권승리는 아공간 가방을 열어 마지막 남은 유물을 모조리 꺼냈다.

……!

……!

유물의 기척을 느꼈는지 게이트 작업을 한창 하고 있던 아갈타 놈들이 공격받은 벌집처럼 부산스러워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권승리는 마지막 남은 유물을 모조리 불태우며 손끝에 힘을 더했다.

그러고 보니 마침 숫자도 비슷한 것 같다. 30만 언저리.

“아갈타 새끼들아, 니들 을지문덕 장군님이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어떻게 전멸했는지 아냐?”

물론 권승리는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와 달리 물로 쓸어 버린 게 아니라 물을 건너 퇴각 중이던 수나라의 배후를 공격해서 얻은 전과였지만, 때론 진실보다 허구가 더 와닿을 때가 있는 법.

권승리는 아공간 가방에서 활력을 북돋아 주는 포션을 꺼내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고 양손을 등 뒤로 잡아당겼다.

콰르르륵!

권승리의 손짓을 따라 잠잠하던 차원 격류가 다시 한 지점으로 쏠린다. 전체적인 수위는 낮아지고, 어느 한 지점은 크게 부풀어 거대한 해일을 만든다.

“이 새끼들아, 이게 바로 살수대첩이다!”

다시는 대한민국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왠지 외쳐 줘야 할 것 같은 그 말을 내던지며 권승리는 있는 힘껏 양손을 휘둘렀다.

쿠쿠쿠쿠쿠쿠!

해일이 된 차원 격류가 게이트 작업에 한창이던 아갈타의 대군을 덮친다.

쿠르르르!

콰르르르륵!

모두를 휘젓고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차원 격류의 해일.

힘을 다한 권승리는 속절없이 그 격류에 함께 휩쓸리며 생각했다.

‘이제 난 내 할 일 진짜 다했다, 소시민.’

그녀의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이제… 네 차례야. 잘해…….’

쿠르르르 날뛰는 차원 격류 속에서.

까무룩, 그녀는 또 한 번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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