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구 최고의 전략가
아갈타의 차원 방위성.
골머리를 썩이던 침묵의 해적단의 근거지가 마침내 밝혀지자 방위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놈들을 박살 낼 수 있겠군.]
[그까짓 놈들, 근거지를 찾아내지 못해서 힘들었지 근거지를 알아낸 지금은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10만 군세만 일으켜도 먼지처럼 흩어질 놈들입니다.]
이참에 지난 불명예를 흔적도 없이 씻어 버리자며 흥분하는 장군들. 그들을 보며 아케르는 목소리를 깔았다.
[이보게, 아깝게 군세까지 일으킬 필요가 있나? 안 그래도 지난번 센타울과의 전쟁으로 피해가 커. 국경 지역의 치안도 문제고 주변 차원들도 경계해야 하고. 지금 상황에서는 10만 군세를 일으키는 것도 만만치 않아. 우리 그냥 쉽게 가지, 쉽게.]
[그 말씀은?]
[깔끔하게 신살 병기를 사용하자는 말이지.]
[아! 그렇군요. 어차피 놈들의 신살 병기가 허풍이라는 게 밝혀졌으니.]
아케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리를 상대로 저렇게 나서는 걸 보면 어떻게든 신살 병기를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돼.]
[그, 그럼?]
[그놈들은 우리를 잘못 봤어. 그깟 급조한 신살 병기를 우리가 두려워할 줄 알았던 건가? 까짓것, 최악의 경우 우리 요격 시스템이 뚫리더라도 정착지에 두세 발쯤 맞아 주면 그만이다. 그사이 우리는 열 발, 스무 발을 적중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구? 그깟 원시 차원, 통째로 먼지로 만든다. 감히 차원 문명에게 대드는 테러 집단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는 거야. 센타울 때처럼 싸울 필요가 없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 인근 정착지에 군인들을 다 소개하도록 해.]
[네. 작은 벌레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소개하겠습니다.]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민간인은 그냥 둬야지. 그래야 기능하고 있는 정착지인 줄 알고 놈들이 거길 공격할 것 아냐?]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군인들만 모두 대피시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아케르는 여유롭게 차원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당장 쏘아 보낼 수 있는 신살 병기만 해도 서른 발. 그중에 한 다섯 발만 쏘아도 지구는 가루가 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구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미 이겨 놓은 전쟁.
아니… 전쟁이 아닌 징벌.
[그럼 이 안건은 이렇게 끝내고 넘어가자고.]
고작 해적 무리를 토벌하는 데에 아갈타의 차원 방위성에서 오래 회의할 필요도 없다.
아케르와 장군들은 그렇게 이 문제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 * *
지구에는 여러 동맹이 찾아왔다. 크르으랑이 크레아의 동지들을 설득해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정예병을 데리고 왔다. 그간 원시 차원들을 탐색 다니던 별빛은 가장 재능이 출중한 전사들로 10만 명을 모아 왔다. 센타울에서 8,000명이 모였고, 또 차원 각지에서 아갈타에 원한을 품고 모인 이들이 1만 5천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무장시키기 위해서 나타르와 람시르가 앓아누울 정도로 혹사를 당해야 했다.
아, 그리고 또 의외였던 것은 아몬이다. 예전에는 우리와 하는 일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아몬은 한 번 지구로 온 다음부터는 매우 적극적인 열의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도 모자라서 동문수학한 연구자들이라며 뛰어난 기술자를 100여 명이나 모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저마다 10명에서 20명의 경호원들을 데리고 와서 총 1,500여 명의 정예 병력이 또 추가 되었다.
이렇게 모인 동맹들은 필승의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다들 가슴 한편에는 불안도 품고 있었다.
‘아갈타가 신살 병기를 사용하면 어떻게 하지?’
전쟁을 하려고 모인 만큼 싸우다 죽는 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살 병기를 맞고 허망하게 개죽음당하는 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구에는 요격 시스템도 없고 방공호도 없잖아?]
[그래도 설마 신살 병기를 쓰겠어? 이쪽에도 신살 병기가 있잖아.]
[그렇지? 맞아. 신살 병기 쓰면 다 죽자는 건데 설마 쓸까…….]
[센타울-아갈타 전쟁 때도 국경 병력을 뺄지언정 신살 병기는 쓰지 않았잖아? 그 정도 상식은 있는 새끼들이라고.]
신살 병기를 가진 문명들끼리는 신살 병기를 쓰지 않는다. 그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워낙 미치광이 같은 아갈타이고, 지구가 아직 차원 문명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한편의 불안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 * *
신살 병기 격납고.
비활성화 상태로 봉인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격납고 안은 항상 푸른 새벽빛과 붉은 노을빛의 오로라가 내려 있었다. 데미안은 커튼처럼 겹겹이 내려진 오로라 사이에 서서 2층 건물 높이의 신살 병기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데미안의 뒤로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이 졸망졸망 다가왔다.
“아이고, 도련님. 부르셨어요? 신살 병기 보고 계셨군요?”
연출가는 데미안의 옆에 서서 유독 살가운 말투로 말했다.
“와… 정말 대단했죠. 정말 신살 병기를 만들어 낼 줄은 몰랐어요. 설령 만들더라도 비리비리한 신살 병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강한 녀석이 나올 줄이야. 어디 내놔도 꿇리지 않는 상급 신살 병기의 탄생을… 제가 제 손으로 직접 방송에 담았다니! 크으… 덕분에 방송 랭킹 1등 찍었습니다. 요즘 피핀 차원에서 제 방송 안 보면 친구도 없는 놈 취급당하는 것 아십니까?”
그 말에 데미안이 대꾸했다.
“그러냐?”
“예. 예. 이게 다 데미안 도련님 덕분입니다. 헤헤.”
데미안은 시선을 계속 신살 병기에 고정한 상태로 말했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예. 예. 말씀만 하십지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지구는 차원 문명이 될 거야.”
“물론입죠! 이제 신살 병기도 10개나 만들었으니 승산이 제법 됩니다. 처음엔 반의반의반도 안 되는 것 같았는데, 이젠 반반은 되는 것 같습니다.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패배 확률을 50퍼센트나 잡은 건 아갈타 놈들이 워낙 미치광이라 예측이 안 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그래. 아무튼 승산이 50퍼센트나 된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전쟁 이후를 미리 준비할까 해.”
“호? 어떻게 말입니까?”
내내 신살 병기에 시선을 주던 데미안이 차가운 눈빛으로 연출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네 방송 말야. 그렇잖아? 기껏 전쟁을 이기고 차원 문명이 됐는데도 니들이 계속 멋대로 우리 생활을 방송하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그 꼴은 못 볼 것 같거든.”
“네? 하, 하지만 어차피 저는 도련님이 허락해야지만 방송을…….”
“연출가가 너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난… 피핀 차원 놈들이 멋대로 지구를 들락거린다는 상상만 해도 역겹다고. 또 나한테 한 것처럼 남의 인생을 멋대로 주무를 것 아니냐고.”
“그게…….”
“그러니까, 피핀 차원에서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을 했으면 좋겠어. 평의회 이사 차원들에서는 멋대로 방송하지 못한다며? 그 서약, 지구에도 똑같이 적용해 줘.”
그 순간 쩔쩔매던 연출가의 얼굴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저기 도련님, 죄송하지만… 지구는 아직 그 급이 안되는데요? 거기는 이사 차원들이잖아요. 이런 싸움을 한 10번쯤 이겨도 될까 말까…….”
“그래? 그러면 이번 전쟁 방송 금지야.”
“네?”
“뭐.”
“네에?”
“뭐가.”
“이제 클라이맥스인데 방송 금지라뇨!”
“응. 왜지? 열 번을 이겨도 될까 말까 한 허접한 싸움인데 뭘 놀라고 그러지?”
“아니! 그런 억지가 어딨습니까? 저는 그냥 연출가고, 그런 차원 간 계약은 정치 쪽에서 해야되는 거라고요. 저한테 말한들 방법이 없다고요!”
“그래? 그럼 방송 금지야.”
“으아아악!”
연출가가 비명을 질러도 데미안은 다시 신살 병기로 시선을 돌리며 아는 체도 하지 않는다.
한참 비명을 지르던 연출가가 갑자기 비명을 멈췄다. 대신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쏟아지는 시청자 피드백을 받고 있는 듯.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왜. 생각이 바뀌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맙소사… 도련님은 왜 이렇게 인기가 좋아요?”
“뭔 소리야? 니들 인기 따위…….”
“그게 아니라……! 이거……! 투표 청원 올라갔어요. 피핀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청원하면 총 투표가 강제적으로 열리거든요! 아니, 무슨 방송 때문에 총 투표 청원이……! 10퍼… 20퍼… 실시간으로 올라가요!”
“…청원이 그렇게 빨리 돼?”
“그럼요! 피핀 차원이잖아요! 근데 보통 청원 올라와도 묻히는데……! 으악! 35퍼센트! 총 투표 결정! 세상에… 클라이맥스를 보자고 피핀 총 투표를 성사한다고요? 시청자, 미쳤습니까?”
말은 그러면서 정작 연출가는 신나는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못생긴 프랑켄슈타인 인형이 데미안을 보며 웃는다.
“도련님! 투표 시작했습니다!”
진보한 문명답게 투표 결의에서 투표 결과 산출까지는 금방이었다. 결과가 나왔다.
연출가는 인기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격동에 차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투, 투표 결과 확정문이 나왔습니다.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피피 차원은 지구에 다른 이사 차원들에 준하는 프라이버시 보호 서약을 적용한다. 이는 모진 역경을 이겨 낸 주인공에 대한 피핀의 애정과 응원이 깃든 선물이다. 하나 기억하시길… 이 모든 것은 전쟁에서 패하지 않고 그대가 살아남았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데미안은 그 확정문을 듣기 좋은 음악처럼 두 눈 지그시 감고 경청했다.
그러곤 마침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연출가.”
데미안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리디아의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축하는 전쟁에서 이기고 나서 들을게. 아, 그나저나 리디아.”
“예?”
“이번에 소시민 사령관님이 모든 전략을 나한테 일임했잖아.”
“예. 그랬습니다.”
“그래서 [모이라이 홀덤]을 미친 듯이 돌려야 할 것 같은데… 하는 김에 네 미래도 점쳐 줄까?”
“네? 제 미래를 말입니까?”
“응.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싸움인데… 너한테는 뭐라도 꼭 해 주고 싶어. 리디아, 미래가 궁금하지 않아? 이 싸움이 끝나고 살아남는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데미안의 그 말에 리디아는 살포시 웃었다.
“마음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모이라이 홀덤]이 아주 정확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무슨 소리야! 얼마나 정확한데. 물론! 놓치는 변수도 있고 간혹 아예 보지 못하는 사건도 있지만, 일단 본 것은 다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란 말야!”
“알죠, 알죠. 다만 정말 괜찮아서 그렇습니다. 기억 못 하시겠지만 제 미래를 이미 봐 주신 적이 있거든요. 그것도 아주 정확한 미래를.”
“응? 내가? 언제?”
“어릴 때요. 그때 도련님은 능력을 통제 못 해서 예언을 남발하셨어요. 이제 막 세 살이 된 아기가 마구 예언을 뿌리다가 툭하면 탈진해서 기절했으니…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아… 들었어. 내 능력이 [모이라이 홀덤] 형태로 굳기 전에 말이지?”
“맞아요. 아마 카드 게임 형태로 능력이 완성된 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아무튼 그때 저는 이미 예언을 들었습니다.”
“끙… 전혀 기억이 안 나. 그래서, 내가 그때 뭐라고 예언을 해 줬는데?”
리디아는 살풋 미소 짓고 말했다.
“좋은 말씀 해 주셨어요.”
“에? 그게 뭐야!”
“자, 도련님.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전략을 짜셔야죠. 아갈타의 정찰함이 우릴 발견했습니다. 이젠 정말 전쟁이 시작됩니다. 전쟁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알아내셔야지요.”
데미안은 리디아를 불만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데미안은 눈을 감고 [모이라이 홀덤]을 발동했다.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지는 세상.
나무 테이블.
그 위에 앉은 플레이어는 셋이다.
지구, 아갈타 그리고… 어비스 게이트를 의미하는 데쓰.
[모이라이 홀덤]을 몇 번을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플레이어는 셋. 그리고 첫 번째 카드는 아갈타가 깐다. 카드의 내용도 언제나 같았다.
데미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모이라이 홀덤]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비명처럼 외쳤다.
“지금 즉시 소시민 사령관님에게 알려! 침공은 1주일 뒤. 신살 병기 다섯 발이 지구로 쏘아진다! 당장! 민서 님을 출격시켜야 돼!”
미래를 볼 수 있는 지구 최고의 전략가가 전쟁의 시작점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