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202화 (202/212)

8. 선포

[이제야 끝났네. 아, 차라리 실전 임무가 그립더라니까.]

아갈타의 정찰함.

선원들은 넌더리를 내며 서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부대 재편성한다고 그 많은 장비들을 대체 몇 번이나 검사한 건지.]

[그러니까. 계급별로 올라가면서 상태 검사, 재고 검사… 와, 창고를 대체 몇 번을 깠다가 접었는지. 진짜…….]

[내가 실전 배치를 이렇게 기다려 본 건 처음이라니까.]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분대장이 조소를 날렸다.

[새끼들… 니들이 퍽이나 실전 배치를 기다렸겠다. 이번 임무가 워낙 꿀이니까 기다린 거겠지.]

[헤헤. 분대장님, 솔직히 저희 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센타울하고 그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곧장 하나도 못 쉬고 검사 지옥을 헤쳐 나왔는데… 이런 날도 있어야지요. 분대장님도 좋지 않습니까?]

[흐흐. 당연히 좋지. 이미 다 이긴 개척 지역, 실전을 겪을 가능성도 거의 없는 곳을 그냥 쭉 한 바퀴 도는 임무 아니냐? 근데도 공훈 점수는 실전에 준해서 준다잖아. 맨날 이러면 진짜 살맛 나겠다.]

분대장과 선임 병사들이 시시덕거렸지만, 이번에 갓 전입 온 신병들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중의 한 명이 물었다.

[저기 분대장님, 하지만 여기는… 지구라는 원시 차원 근처 아닙니까? 이 주변에도 침묵의 해적단이 종종 출몰했다고 들었습니다. 신살 병기까지 가지고 있던데… 꽤 문제되지 않겠습니까?]

신병의 걱정에 분대장은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야. 그거 위에서 판단 내려왔다. 공갈이래, 공갈.]

[공갈 말입니까?]

[그래. 영력 패턴을 분석한 결과 센타울 측 신살 병기라더라. 그거 센타울이 회수한 줄 알았는데 침묵의 해적단이 회수한 거였어. 센타울도 몰랐던 눈치라던데… 엄청 속 쓰렸을 거야. 큭큭. 아무튼 그거 센타울이랑 연결이 끊겨서 먹통이래, 먹통.]

선임 병사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와, 그러면 침묵의 해적단도 끝장난 것 아닙니까?]

[당연하지. 걔네 말로만 선전포고니 뭐니 했지, 그 후로 뭐 실질적 행동 취한 것 하나 있어? 도리어 털끝도 하나 안 보이잖아. 아마 우리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갈걸? 그냥 마지막 영혼까지 끌어모아 허세 한번 지른 거지. 요즘은 침묵의 해적단 편들던 사람들도 다들 입 다물었다더라.]

분대장의 말은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신병들은 그제야 첫 실전임무의 긴장을 털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분대장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바로 그 순간 비상경보가 울렸다.

- 비상! 전 대원 전투 위치로!

[뭐, 뭐야?]

그리고 곧장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 어? 이게 뭡니까?]

마치 백일몽을 꾸는 것 같았다. 분명 몸은 정찰함 속에 있는데, 눈을 감으면 파란 하늘과 거대한 나무들이 우거져서 만든 숲과 그 한가운데 홀로 산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뭐, 뭐야? 왜 이래?]

[이거 나만 보이는 건 아니지?]

모두가 혼란에 빠졌다. 눈꺼풀에 무언가가 각인이라도 된 듯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망막에 투영되는 숲의 형상.

휘오오오-

싸르르르-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부대끼는 환청.

그리고 이질적인 영력이 바람처럼 밀려들었다.

낯설고 두렵다.

그 어떤 경험 많은 군인도 창조신의 꿈속에서 이런 이변을 겪어 본 경험은 없었다.

함장마저 당황했는지 미처 통신시스템도 끄지 않고 고함을 치는 게 전 함선에 그대로 방송되었다.

[대체 저게 뭐야? 이 이상한 영력 반응은 뭐냐고!? 이 숲의 형상은 또 뭐고!]

하지만 화룡점정은 아갈타의 정찰함 전체에 울려 퍼진 외부 통신이었다.

- 이곳은 지구. 침묵의 해적단의 영역이다. 너희는 지금 침묵의 해적단의 국경… 을 아직 넘진 않았지만, 아갈타의 함선은 발견 즉시 침몰이다!

쿵! 콰아아앙-!

[악! 으아아악!]

그리고 가차 없이 이어지는 포격. 아갈타의 정찰함은 한 줄기 비상 메시지만을 본국으로 송출한 뒤 창조신의 꿈결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결국 이날이 왔구나.”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었지만, 그간 제법 평화로웠다.

하지만 이제 지구 앞에서 침몰하는 아갈타의 정찰함, 그건 그 평화의 끝을 알려 주는 신호탄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지구의 위치와 세계수의 숲까지 모조리 들켰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하고 준비했던 일이니까.

신살 병기라면 이미 완성되었다.

10대의 신살 병기.

나는 신살 병기를 완성하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신을 살해할 수 있는 병기를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손으로 신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다.

머리로는 이미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의미를 미처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신살 병기를 만들었을 때, 돌연 하늘이 어두워지고 꽃비가 내렸다. 진짜로 그랬다.

격납고의 천장을 뚫고 하늘에서 내려온 서광이 우리가 막 만들어 낸 신살 병기를 비추었고, 신살 병기는 우우우웅- 하고 낮게 울었다.

두 번째 신살 병기를 만들었을 때는 돌연 기이한 향기가 서울시 전체를 휘감고, 신살 병기의 표면에서 결정이 자라나더니 황금색 알의 형태를 만들었다. 그땐 모두가 긴장을 했다. 사고라도 나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 알은 저절로 깨져 나갔고, 신살 병기는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울어 댔다.

세 번째에는 뎅- 데엥- 하는 종소리와 함께 서울에만 돌연 새벽이 내렸고, 네 번째에는 일식이 일어났다.

그렇게 열 번째까지 뭐 하나 똑같은 현상이 없었고, 그 본질과 성능 역시 저마다 달랐다. 우리는 우리가 신살 병기를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신살 병기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스스로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신과 같은 무기를,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열 개. 그게 현재로써는 한계치다.’

모든 인적, 물적 네트워크를 쥐어짜서 겨우겨우 열 개의 신살 병기를 만들었다.

나타르가 세계수의 숲에 포함된 모든 차원을 오가며 분주하게 물자를 날랐고, 람시르가 모든 외부 밀수로를 동원해 핵심 자원과 기술을 조달했다.

수도 없이 많은 천재들과 인물들이 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혈관이나 뇌 속 신경망보다 더 복잡하고 세세한 물류망과 밸류 체인. 수없이 많은 차원의 가능성이 지구로 몰려들어 조합되던 그 풍경…….

신살 병기를 떼 놓고 보아도 그냥 그 자체로 웅장하고 감격스러웠다.

그게 차원 문명이었다.

무수한 차원의 가능성을 모아 신조차 죽이는 힘을 만들어 내는 초거대 문명.

하나 그것도 이제 끝. 더 이상의 물자 조달은 어려웠다. 세계수의 숲에 포함된 차원이든 외부 차원이든, 모두가 아갈타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한다면 지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차원 문명이 탄생하겠지. 하지만 패배한다면… 우리가 일궈 낸 이 모든 게 단숨에 사라질 거야.’

이기면 모든 것을 얻고 지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은 어쩔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지만 이 전쟁의 시기와 방법을 결정한 것은 나다.

민서, 승리, 데미안, 까막이, 강전구, 박민희… 소중한 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니까, 책임지고 이겨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시를 내렸다.

“연출가, 방송 내보내. 두 번째 선전포고다.”

첫 번째 선전포고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선전포고.

어차피… 정찰함에 의해 이미 지구의 위치는 발각되었고, 그렇게 된 이상 차라리 모든 차원에게 알리는 것이다.

* * *

- 침묵의 해적단이 영토를 선포합니다. 주 차원은 지구이며, 개척 지역 전역에 걸친 권리를 선언합니다. 또한 아갈타 문명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더불어…….

새로운 차원 문명의 탄생.

그것도 센타울과 아갈타가 혈전을 벌였던 개척 지역 전역을 실효 지배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차원 문명.

그 주 차원은 가장 낙후된 것으로 평가받던 원시 차원 중에서도 원시 차원인 지구… 그런 곳이 자신들의 국경을 선포하고 정식으로 아갈타에 선전포고를 했다.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었다.

그 명성을 떨치던 침묵의 해적단이 유명한 최상위 차원 출신이 아닌 듣도 보도 못 한 원시 차원 출신이라는 것도 반전. 아갈타가 무서워서 조용한 줄 알았더니 그사이에 이미 개척 지역 전역을 하나로 묶어 버릴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추었다는 것도 반전.

정말 제대로 된 차원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는 것도 반전.

특종도 이런 특종이 없다.

광고 수입까지 빠방하게 노려볼 수 있는 이번 특종에 연출가는 신이 나서 이 소식을 전 차원으로 퍼 날랐다.

그렇게 지구의 소식이 아갈타에 원한을 가진 이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내미슈의 부관이었던 리아센의 눈동자는 또다시 초록색으로 타올랐다.

[드디어 목적지가 정해졌군요.]

그녀가 불러 모은 이들은 그랜드 마스터 우루스를 필두로 한 5,000 여 명의 센타울의 군인들. 그들은 내미슈의 복수를 함께하자는 리아센의 간곡한 설득에 피눈물을 흘리며 내미슈의 관을 밟고 풀려난 상태였다. 그들 모두가 눈동자를 초록색으로 불태웠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와 그를 따르는 3,000여 명의 전사들도 함께였다. 동맹조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조국을 대신해 속죄하겠다며 이번 원정 참여 의사를 밝혔다.

리아센은 그들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목적지는 지구. 우리는 조국을 버립니다. 다시 한번 아갈타와의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 * *

방송 이후 차원 전역에서 참으로 많은 지원군이 몰려들었지만, 그중에는 정말 예상 밖의 얼굴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명예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됐다.

명예가 뭘까?

일단 나는 그다지 명예로운 사람은 아니다.

지난 생에는 인류를 위해 싸웠지만, 그건 어찌 보면 그저 내 안의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한 삶에서도 내 최우선 목표는 남들을 구하는 것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사는 것이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지구를 구하는 행보를 걷게 되었지만, 그 본질은 권승리나 최치국과 같은 진짜 영웅들과는 다르다.

신살 병기 때도 그렇다. 나는 끝까지 내미슈의 부탁을 완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와 지구의 이득을 먼저 챙겼을 뿐이다. 필요한 일이긴 했지만 명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센타울의 리아센이 그랜드 마스터 켄타로스, 우루스와 8,000여 명의 숙련된 전사들과 함께 와서 한 손 거들겠다고 했을 때 나는 절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갈타가 신살 병기를 동원하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내 엄포에도 켄타로스와 우루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럼 그 죽음으로 센타울의 배신을 속죄하겠습니다.]

[기꺼이.]

명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단 두 사람의 명예가 센타울 전체에 대한 미움을 희석시킬 정도로.

그렇게 마음을 적셨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해 주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살 병기에 허무하게 당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한이 남지 않을 만큼 싸우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기대가 되는군요.]

[혹시 전략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전략은 지금 지구 최고의 전략가가 수립하는 중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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