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데미안은 외출 중
서민서가 물었다.
“도련님은? 도련님도 같이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은 바쁘시대. 개인적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고 찾지 말아 달래, 오늘만큼은.”
“그렇게까지나? 중요한 일인가 보네요? 전 그럼 내일 가도 괜찮은데.”
“아냐. 도련님이 좋아할 것 같아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그냥 둘이 가자. 오랜만이네, 우리 둘이 노는 거.”
“뭐… 그것도 좋죠. 그런데 오늘 뭐 한다고 그랬죠?”
“쇼핑.”
* * *
윤희정은 권승리가 일으키는 기적을 보고 기가 질려 버렸다.
“이게 진짜 되네요……. 아가씨, 괜찮아요? 알고는 있었지만 이게 직접 계산해 보니까 너무 굉장해서…….”
권승리는 끝부분만 살짝 탈색된 자기 머리칼을 잡아당기며 대답했다.
“제 눈에는 윤희정 장인이 더 대단해 보여요. 제 힘은 엄밀히 말하면 일회성인데, 그걸 장치를 이용해서 지속되게 만든 거잖아요?”
윤희정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건 쉽죠. 처음부터 인공 세계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일단 법칙을 왜곡해 놓은 상태에서 만들면 엄청 쉬워요. 덕택에 이제 순혼 응축도는 문제없겠네요.”
“뭐가 쉬워요. 말만 들어도 엄청 어려워 보이는데.”
권승리는 해맑게 웃어 주고는 윤희정에게 음료를 하나 건넸다. 소시민에게 졸라서 받아 낸 특제 더치커피(콜드브루)였다.
한 모금 마셔 본 윤희정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 이거 설마 사령관님의……!”
“맞아요.”
“와, 대박! 역시 아가씨! 대박 대단해요!”
어째 아까 권승리의 능력을 보고 놀랐을 때보다 더 반응이 대단했다.
물론 권승리는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명문가에서 나고 자란 권승리의 눈에도 소시민이 쓰는 물건, 먹고 마시는 것, 뭐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으니까.
‘이 전쟁이 다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면… 소시민이 카페나 차렸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옷 가게랑 가구 가게도. 아, 건축은 안 하나? 집도 하나 만들어 주면 좋을 텐데.’
권승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윤희정과 함께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저는 조금 쉴 건데 윤희정 장인도 조금 쉬다가 들어가실래요?”
“네? 저야 좋죠!”
그런데 쉬겠다면서 권승리가 데려간 곳에는 의외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이! 어이! 그거 이쪽으로 옮기라고! 오른쪽, 오른쪽! 옳지, 그렇지!”
“아이고! 다리를 접질렸어요!”
“네. 네. 금방 봐 드릴게요.”
그곳은 요즘 지구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노가다 현장이었다. 이계 소재로 만든 철근과 벽돌을 나르고, 해머로 깡깡 때리고, 시멘트를 반죽하고, 또 한편에는 부상자들을 위한 의무반도 있다.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섞여 있는 의외의 면면을 알아봤을 때 윤희정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저기! 저기 일하고 계신 분들 사이사이에 섞인 분들… 아틀라스 클럽의 영웅들 아니에요?”
대기사 군다르. 대마도사 비스트, 초음속의 벡타온, 성녀 나타시아…….
아틀라스 클럽에서도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슈퍼 루키들… 아니, 이젠 루키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이 하준광과 같이 세계 최강자의 반열에 거론되는 영웅들이 공사 현장에 껴서 올망졸망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맞아요. 인식 왜곡 주문을 사용해서 이상하다는 걸 눈치 못 채는 상태니까 윤희정 장인도 아는 체하지 말구요.”
그러면서 권승리도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막노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윤희정이 얼른 물었다.
“아니, 쉬신다면서요?”
“쉬는 거예요. 윤희정 장인도 한 30분만 땀 흘리다가 가 보세요. 그럼 머리도 개운해질걸요? 자, 어서요.”
윤희정은 얼결에 노가다 판에 뛰어들었다. 이거 들라고 하면 들고, 저거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오고.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니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하고 등허리가 축축했다.
그 정도 일을 하고 나서야 권승리와 영웅들은 슬슬 노가다 판을 빠져나왔다. 윤희정이 투덜거렸다.
“이게 뭐가 쉬는 거예요…….”
그러자 권승리가 어느새 새까맣게 돌아온 자기 머리칼을 매만지면서 활짝 웃었다.
“행복하잖아요.”
“행복이요?”
윤희정은 눈을 껌뻑거렸다. 행복이라니. 남들에게는 고된 노동에 불과한 일인데 뭐가 행복하다는 말인가? 이거 너무 가진 자들의 배부른 소리 아니야?
하지만 아틀라스의 영웅들은 권승리의 말에 공감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덧붙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표를 잃지 않고 일을 하는 풍경이라니… 하, 참.”
“아직 절망하지도 않았고.”
“아까 김씨 아저씨는 치킨 사서 돌아갈 거라고 하더라.”
“집에 가면 가족이 있다? 아이고… 몇 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네, 이 평화.”
진짜로 즐겁다는 듯이 재잘재잘거리는 영웅들. 어째서일까? 윤희정은 어쩐지 그 모습에 압도당해 버렸다. 분위기가 어쩐지, 사람들이 모이지도 않고 가족도 없고 치킨도 살 수 없었던 그런 멸망에 가까운 상황을 지긋지긋하게 살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이상한 분위기였다.
분명 지금 전쟁을 앞둔 살벌한 세상인데도… 그 분위기가 말랑말랑하고 달콤해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이, 이거 뭐야? 오히려 배부른 소리는 내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이 분위기는…….’
권승리가 혼란에 빠진 윤희정을 보고 싱긋 웃었다.
“아까 저한테 괜찮냐고 했죠?”
윤희정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기억을 떠올려 냈다. 아까 권승리가 [법칙왜곡]을 하는 모습이 너무 터무니없어서 ‘괜찮아요?’ 하고 걱정을 했었다.
그에 대한 대답이 지금 돌아오는 것이다.
권승리는 말했다.
“안 괜찮아요.”
그녀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죠. 사실 엄청 무서워요. 차원의 격류에 들어갈 때도, 격류를 조종할 때도. 유물을 다룰 때도… 엄청 엄청 무섭죠. [법칙왜곡]은 분명 내 초능력인데, 때로는 그 힘이 너무 강해서 거꾸로 힘이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하지만이라고 말하며 활기차게 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권승리의 눈동자에는 따스한 온기가 깃들었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히면 견딜 수 있어요. 흔들리지 않는 그릇에 담긴 물처럼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그 안에 달이 떠오르든 해가 떠오르든 다 담을 수 있거든요.”
윤희정은 문득 권승리에게서 오래 수행한 고승과도 같은 분위기를 읽었다.
“그런 명정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제가 떠올리는 건 이렇게 평화롭고 활기찬 일상이에요. 특별한 날이 아닌 그냥 보통의 일상. 그런 걸 보면 행복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져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윤희정은 아틀라스 클럽의 영웅들이 작게 동조하는 기색을 느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풍경을 지키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이 일상의 풍경을.”
꿀꺽. 윤희정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난 어떻지? 나는 이 전쟁에서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 걸까?’
지금 이렇게 치열하게 방법을 찾고 만들고 하는 과정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아니, 이 영웅들에 비했을 때 나는 치열하게 하고 있는 게 맞나?
곰곰이 생각하던 윤희정은 조금 더 단단해진 얼굴로 권승리를 보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얼른 가서 개발을 마치겠습니다!”
마음에 심지가 단단하게 선 그 표정을 보며 권승리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잘 부탁합니다, 장인님.”
윤희정 장인은 마주 깊이 인사하고 연구실로 달려가며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애 덕분인가? 순혼 응축도를 높일 방법도 찾고 마음도 더 단단해지고. 뭔가 찾으려고 했더니 정말 찾아졌어… 신기해. 사령관님은 이걸 알고 계셨던 걸까?’
나중에 사령관님에게도, 그리고 도움을 준 소녀도 찾아내서 작은 선물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윤희정이었다.
* * *
소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심하게 졌네.”
트라팔가스의 사절은 강했다. 아니, 그냥 사절이 아니지. 이야기를 들으니 대족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통도 대족장급이었을 것이다.
무조건, 많이, 강한 이들과 실전 같은 대련을 하라는 소시민의 지시를 까막이는 철석같이 따랐고, 매번 끔찍하게 아파했다.
커흑… 어흑…….
꺾어지는 골목 저편에서 까막이가 고통에 겨워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치료를 받았는데도 영력의 여파가 몸에 남아 괴로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맨몸 상태의 대족장은 몰아붙였으니… 잘 싸운 건데…….’
처음에는 까막이가 유리했다. 이젠 차원강습 장비도 능숙하게 다루어서 라-트라팔가스라는 트라팔가스 최고의 전사를 오히려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트라팔가스인들도 차원강습 장비를 지급 받고 훈련을 하는 상태. 화가 난 라-트라팔가스가 단조 슈트를 입는 순간 전세는 역전되었다.
‘맨몸으로 싸워도 차원강습 장비를 입은 것 같은 파괴력을 보여 주는 종족인데, 진짜 차원강습 장비까지 입었으니… 오죽 강했을까.’
까막이는 정말 참혹하게 얻어터졌다. 물론 그 앞에서는 안 아픈 척, 쿨하게 승부를 인정하는 척했지만…….
크흑… 흑…….
젠장… 아프잖아… 흐흑…….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숨어들어 가서는 이렇게 혼자 숨죽여서 울었다. 명랑한 겉모습과 달리 은근히 여린 녀석이라는 건 알아봤지만,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어휴…….”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가 너무 컸나 보다.
“뭐야! 거기 누구야!”
까막이가 꺾어진 골목 저편에서 날카롭게 외쳤다.
소녀는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굽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상태. 소녀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많이 아파?”
대번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프긴……! 야! 상관하지 말고 꺼져!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 와중에도 자기 지위를 내세우려고 하다니… 소녀는 혀를 차며 되물었다.
“누군데?”
“내가… 난… 아씨! 하여튼! 저리 가라고!”
하지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누군지 말하는 순간 화랑단의 소대장 까막이가 맞은 게 아파서 펑펑 울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들키게 될 테니까.
같은 이유에서 직접 나서서 소녀를 쫓아내지도 못하고 말로만 위협했다.
소녀는 또 물었다.
“왜 숨어서 울어?”
“그걸 몰라서 묻냐?”
“모르겠는데?”
“멍청아! 우는 애는 쓸모가 없잖아!”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소녀가 침묵하자 까막이는 으스대며 말했다.
“너도 잘 기억해 둬. 어른이 될 때까지는 울면 안 돼. 쓸모가 없으면 버려진다고. 버려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죽는 거야, 죽는 거.”
소녀는 까막이가 어려서부터 킬러로 훈련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게 어두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냐?”
“전혀. 우리 같은 가짜들은 뒤에서는 울어도 앞에서는 무조건 센 척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앞에서 울어도 되는 건 진짜배기밖에 없어.”
“진짜배기가 누군데?”
“있어, 내 친구. 되게 멋있는 애. 돈도 많고 눈동자도 황금색이고. 하여튼 걔는 진짜야. 그거 알아? 사령관님도 걔한테는 존댓말 쓴다?”
하지만 나는 반말을 하지라며 으스대는 까막이.
“그런 애랑 친구로 지내려면 우는 모습 같은 건 어떻게든 숨겨야 되는 거야. 어떻게든 급이 비슷한 척하면서 버티는 거지. 너 같은 애송이들은 모르겠지만, 나처럼 높은 사람들은 다 그런 고충이 있는 거야.”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겨우 물었다.
“…걔는 진짜배기라고 어떻게 확신해? 실은 걔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사실 알고 보면 걔도 모든 게 다 가짜일 수도 있어.”
“맞을래?”
날카로운 쇳소리가 섞인 까막이의 목소리.
하지만 소녀는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아니, 모르는 거잖아! 여태까지 모든 사람을 속이면서 거짓된 모습으로만 대한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 사실이 드러나면… 사실 여태 모습은 다 가짜였으니까… 여태 사귄 친구들도 다 낯설어하고… 떠나고…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사실은 존재한 적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어!”
소녀가 빽!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까막이는 단 한마디로 소녀의 말을 잘라 버렸다.
“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냐, 넌?”
“뭐, 뭐라고?”
소녀의 얼굴이 노여움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까막이는 소녀를 비웃었다.
“이 자식이 내 친구를 뭘로 보고. 넌 진짜배기가 왜 진짜배기인 줄 알아?”
“숨기는 게 없으니까 진짜배기겠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애초에 진짜배기한테는 가짜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거야.”
“…그게 뭔 소리야? 남들한테 보여 주기 싫은 모습, 보여 주지 못한 모습… 그거 숨기면 가짜지!”
“말귀를 못 알아듣네. 숨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숨기면 어때? 보여 주기 싫으면 어때? 걔는 그냥 자기 자신 그 자체로 빛이 난다. 나 같은 애들은 약점을 숨겨야지만 빛이 날까 말까 하지만, 진짜배기들은 숨기든 숨기지 않든 항상 빛이 나니까 진짜배기인 거라고. 다이아몬드 모르냐? 아무 각도에서나 봐도 빛나니까 비싼 거야!”
소녀는 황당했다. 자기가 뭘 안다고 사람 하나를 저렇게 미화하는 걸까?
하지만 까막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걔는 스스로 빛나는 거야. 숨기는 거? 그게 중요하냐? 나 같은 가짜랑 달라. 사실은 외계인이라고 해도, 사실은 100살쯤 먹은 뱀파이어라고 해도, 심지어 여자애라고 해도! 걔가 뭘 숨기고 있든 걔는 빛나는 아이인 거라고. 그게 기정사실이야.”
소녀는 ‘여자애라고 해도!’ 부분에서 어깨를 움찔! 했지만 이내 완전 어이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야, 그게…….”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까막이의 자부심 가득한 그 한마디에는 그만 머리가 띵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뭐긴, 내 친구다.”
까막이는 또 덧붙였다.
“절친한 친구지.”
자랑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이, 입이 근질근질한 듯한 그 말투에.
소녀는 푸하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내가 이 머저리랑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골목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 한편에는 창세로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까앙- 까아앙- 깡- 까아앙-
무언가가 만들어지는지 경쾌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푸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문득 생각했다.
‘기분… 나쁘지 않네.’
오늘은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나들이를 시켜 준 날이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사라질 전쟁을 앞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한심한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행여나 이 모든 게 사라지고 나면 진짜 자신은 한 번도 햇볕 아래를 걸어 보지 못한 채로 사라지는 것이었으니.
근데, 그러기를 참 잘한 것 같았다. 덕분에 친한 친구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이제는 방향이 잡히는 것 같았으니까.
문득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살고 싶다.’
이 아름다운 세상과 함께. 오래오래.
‘전쟁에서 이겨야 가능하겠지?’
소녀는 떠올렸다, 이 전쟁을 자신의 어깨에 오롯이 짊어지고 있는 한 사람을. 그 사람은 지금 얼마나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견디고 있을까? 그 생각이 드니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말했다.
“야.”
“어?”
“난 바빠서 이만 간다? 너도 그만 찔찔 짜고 하던 거나 마저 열심히 해.”
“찔찔 짠 적 없어!”
“그래도, 찔찔 짜면서도 계속 싸우는 모습, 좀 멋있었어.”
“뭐, 뭐?”
“간다.”
소녀가 떠나고 난 자리. 눈물을 닦고 나온 까막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보는 여자애한테 별소리를 다 했네… 근데… 목소리가 좀 낯익은 것 같다?”
생각을 해 보지만 아는 여자애 중에 그런 목소리가 없었다. 아, 모르겠다. 고개를 탈탈 턴 까막이는 스트레칭을 하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다음 대련은 누구랑 할까. 이번엔… 쪼오금만 약한 사람으로 하자.”
그러곤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데미안. 그리고 형님. 저 진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알아주셔야 해요.”
다시 고개를 내린 까막이의 눈에는 날카롭게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