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VIP 차원 쇼퍼-199화 (199/212)

5. 탐색

한 가지 일에 오래 몰두하다 보면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는 일에 소홀해질 수 있다.

바람이 바뀌었는데, 여기저기 행운이 굴러다니는데 펴 놓은 책만 들여다보느라 그 흐름을 읽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 지금 지구에는 그런 실수를 용납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게 내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이유였다.

까막이에게 ‘전력을 다한’ 무한 대련을 지시한 것을 시작으로 나는 수많은 이에게 도전적인 지시를 내렸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강하게.

그런 내 앞에서 김용수 명장은 난색을 표했다.

“사령관님, 그런 방법은 없어요. 센타울의 기술자들에게도 물어봤지만, 그들도 그런 기술을 당장 구현할 수는 없다고 하더이다. 말씀하신 10가지 물질을 합금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불가능? 사치스러운 소리였다.

“명장 어른, 가능합니다. 센타울의 신살 병기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물질을 분석해 봤어요. 센타울 기술 책임자 로롤랑가도 센타울에 그런 기술이 있다고 확인해 줬고요. 이거 해내야 돼요. 이 합금의 유무에 따라서 신살 병기의 파괴력은 최대 10퍼센트까지, 안정성은 최대 15퍼센트까지 차이가 나게 된다고요. 한 단위 생산 시간과 자원도 10퍼센트나 감소하게 됩니다.”

김용수. 서부 드래곤힐동의 터줏대감이자 대한민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장. 자존심 강하고 꼬장꼬장한 이 노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중요하다는 건 저도 잘 알죠. 하지만 제 말은… 지금 지구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사용 가능한 자원과 시설로는 불가능해요.”

초기부터 나와 일을 함께해 온 김용수 명장. 이제 와서는 지구에서 손에 꼽히는 거장이 되었다. 자존심 강하고 꼼꼼하고 실력 있는 그가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찔러 보고 그래도 안 되니까 저러는 거겠지.

하지만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나는 답했다.

“그럼 인력을 더 붙여 줄게요.”

“예?”

“자원도 달라는 대로 다 지원할게요.”

“아니… 사령관님, 지금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방법 자체가…….”

“그러니까 방법을 찾아보세요! 아무도 못 해낸 걸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는 해낸 걸 하는 건데 분명 방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모든 걸 걸고 한번 찾아내 달라고요.”

“사령관님, 그게 그렇게…….”

“이봐요, 김용수 명장님. 해 보기는 했어요?!”

“네, 네?”

“저는 지금 지시를 내리는 겁니다. 명장님의 모든 지식과 기술, 운명과 행운까지 다 걸고 한번 해 달라고요. 한번 목숨 걸어 주세요.”

“으음…….”

“김용수 명장님, 이 전쟁이 어떤 전쟁 같습니까? 해 본 것만 해서 이길 수 있는 전쟁 같아요? 안 해 본 거, 해 볼 생각도 못 했던 것. 그런 걸 수십, 수백 번은 성공하고 고비를 넘고 또 넘어야 이길까 말까 한 전쟁 아닙니까? 자꾸 한가한 소리 하실래요? 김용수 명장님이 방법을 못 찾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게 그냥 실패입니까? 40억 인류의 실패입니다. 지구가 실패하는 겁니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 다그침에 김용수 명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나 예의를 갖추어서 조심스레 말하던 내가 이렇게 세게 나오니 당황스럽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억지로라도 고개를 들고 사방팔방을 들쑤시며 방법을 찾아야 할 때. 아무리 김용수 명장이라 해도, 나이가 80이 다 되어 가는 원로 중의 원로라고 해도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안 된다. 걷어차서 쫓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우리 모두가 전심전력으로 길을 찾아야 할 때.

행운은 행운을 찾아 떨치고 나온 자에게만 발견되는 법이었으니까.

김용수 명장은 빨개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추태를 부렸어요. 말씀하신 대로 한번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윤희정 장인이 김용수의 팔꿈치를 잡아끌어 그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녀가 말했다.

“선생님, 고개 숙이지 말아요. 우리는 지구 최고의 기술자들이잖아요. 지구를 대표하고 있잖아요.”

그러곤 자신만만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해내서 고개 빳빳이 들고 본때를 보여 주자고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에 미소가 그려진다. 역시 윤희정 장인. 내 속마음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는 사과 따위를 받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장인 한 명, 한 명이 자기 위치를 자각하고 더 절박하게 더 큰 사명감으로 일해 주기를 바랐을 뿐.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윤희정 장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심하고 다음 용건을 꺼냈다.

“좋군요. 그런 의미에서 윤희정 장인에게도 부탁이 있습니다.”

“에? 저도 합금 건에 투입되는 것 아니었나요?”

“아뇨. 윤희정 장인님만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보고를 받아 보니 순혼의 응축도가 조금 아쉽더군요. 87% 수준인데… 제 생각에는 99%까지 해내면 신살 병기의 위력과 관통력이 각각 15퍼센트는 더 증가하고, 소요 자원과 생산 시간도 20퍼센트는 감소할 것 같습니다.”

“자, 잠깐만요. 그래서 순혼 응축도를 99퍼센트로 만들라고요? 그건 불가……!”

“설마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죠?”

윤희정이 빨개진 얼굴로 말을 삼키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한다.

“이제부터 가능, 불가능은 일단 해 보고 따지도록 합시다. 길을 모르면 길을 찾고, 길이 없으면 길을 닦으면 되죠.”

내 말에 윤희정이 혼이 빠진 얼굴을 했다.

오히려 이제 여유를 찾은 김용수 명장이 윤희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허허. 우리 사령관님이 내 젊은 시절 따르던 정주용 회장님을 생각나게 한다니까. 허허허.”

* * *

소시민 앞에서는 껄껄 웃었지만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김용수와 윤희정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도 주변에도 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푹푹 새어 나오는 한숨 끝에 윤희정이 말했다.

“일단… ‘모든 걸’ 다 바꿔 볼까요?”

김용수가 물었다.

“모든 걸 바꾼다니?”

“아니… 우리가 아는 것 중에 답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을 찾아 나서 보자는 거죠. 옷, 작업 환경, 도구, 만나는 사람, 산책로, 집. 하다못해 컵이랑 칫솔까지 새롭게 말이에요.”

“…그게 효과가 있겠어?”

“이렇게 한숨만 쉬고 있는 것보다는 낫겠죠. 뭐, 사령관님도 뭐든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 이참에 생활을 싹 바꿔 봐요. 그간 만날 일 없었던 작업자들도 만나서 뭐라도 물어봐야지. 일단 이 작업복부터 벗고 소녀소녀 하게 입어 봐야겠다. 칙칙하고 눅눅하니까 생각도 안 나는 걸지 몰라. 시간 없어요. 저 먼저 갑니다.”

벌떡 일어나서 떠나는 그녀를 보며 김용수 명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나이에 모든 걸 바꾸고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라니… 정말 가혹한 일이지만… 어쩐지 또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시각.

막 ‘모든 것’을 바꾸고 길을 나선 소녀가 또 한 명 있었다.

소녀는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부 드래곤힐동을 거닐었다. 발전을 거듭해서 이제는 이계의 생산 설비들이 용산구 전역을 넘어 서울 전체로 뻗어 나가고 있는 와중이라 서부 드래곤힐동은 그 전체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극비, 극요의 장소가 되어 있었다.

그런 곳에 처음 보는 소녀가 돌아다니니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황금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백금색 머리칼, 솜털이 보송보송해 귀족적인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귀여운 아가씨였으니 더더욱 시선이 집중되었다.

결국 지나가던 화랑단원 한 명이 소녀를 멈춰 세우고 물었다.

“실례지만 이곳은 A급 이상의 인가자만 들어올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인가증을 보여 줄 수 있으십니까?”

물어보면서도 화랑단은 어느 명문가의 아가씨가 견학을 왔다가 길을 잃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도 견학 허가증 같은 것을 보여 주거나 길을 잃었으니 도와 달라는 대답 정도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을 했다.

“여, 여기…….”

하지만 아니었다. 소녀가 우물쭈물하며 내민 인가증을 보고 화랑단원은 기함을 할 뻔했다.

S급도 아니고, SS급이나 SSS급도 아닌 최고 등급인 VVVIP 인가증이 거기에 있었다. 투명한 카드. 아무것도 없던 카드에 소녀가 자신의 영력을 불어넣자 단 한 줄의 빨간 선이 그어졌다. 영력 인증 카드.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랑단원은 자기도 모르게 경례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편히 둘러보십시오.”

“네, 네…….”

소녀는 어색하게 말하며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살짝 떨리는 그 목소리가 가늘고 귀엽다.

그녀가 사라지자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물었다.

“뭐야? 왜 경례까지 해?”

“트리플 VIP였어… 와… 나 말로만 들어 봤는데 진짜 보긴 처음이네.”

“VVVIP? 그건 진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핵심 간부들 아니야? 누구길래? 처음 보는 아가씬데?”

“몰라… 영력 인증하셨잖아. 그런 거 물어볼 권한 없어, 나는.”

“근데 묘하게… 데미안 도련님 닮지 않았어?”

“그러게? 루드비히 가문인가?”

“그 집안은 아들만 셋이잖아?”

“흠… 사촌?”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루드비히 가문 사촌까지 트리플 VIP를 주나?”

“그럴 리가 없는데… 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무수한 호기심을 남긴 소녀는 호기심 많고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공방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던 그녀가 한 사람을 발견하고 고개를 쫑긋 세웠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샤랄라 한 원피스를 입은 윤희정 장인이 달콤한 카페라테가 가득한 수레를 세워 둔 채 수많은 사람과 격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수레에는 이런 팻말이 서 있었다.

[일하느라 힘드시죠? 시원한 카페라테 공짜로 드세요. 대신 음료값으로 순혼의 응축도를 올릴 아이디어를 하나씩 던져 주셔야 합니다. 개소리도 받으니까 일단 카페라테 가져가세요.]

그 팻말이 기술자들과 연구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꽤 많은 사람이 수레에 몰려들어 카페라테 잔을 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아, 그건 불가능해요.”

“아아, 불가능하다는 건 라테값으로 안 칩니다. 뭐라도 좀 내놓아 봐요.”

“근데, 그쪽은 그 유명한 중정 공방의 윤희정 장인 아니요?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

“우리 팀 내에서 답이 안 나오니까 여기까지 나온 것 아닙니까. 좀 도와줘요.”

“응축도… 그 단조 슈트 만들 때처럼 영력으로 이빠이 때려 버리면 응축되지 않을까?”

“네. 서른네 번째로 나온 진부한 아이디어네요. 라테 가져세요.”

“…젠장. 뭔가 분하네.”

“근데… 순혼이라는 게 사실 영혼 아니요? 영혼을 그렇게 막 응축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게 맞나? 그 영능학 제7법칙을 보면…….”

“맞네. 그 법칙에 걸리네. 이거 90퍼센트는 몰라도 99퍼센트 응축은 안 돼.”

“내가 센타울 장인한테 들었는데… 센타울에는 법칙을 속이기 위해 창조신의 꿈을 이용하는 ‘인공 세계’ 시설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 게 있으면 되겠지만…….”

“지구엔 그런 게 없잖아?”

“그러네. 그럼 안 되네.”

“네네. 안 된다고 말한 분만 빼고 다들 라테 한 잔씩 가져가세요.”

이곳의 장인들은 이야기에 푹 빠져서 소녀가 옆에 끼어들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까는 멀찍이 떨어져 걸어도 모두가 쳐다봤는데, 여기서는 어깨가 닿을 정도로 붙어 있어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어쩐지 안심이 된 소녀는 그 자리에서 계속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안심을 해 버릴 탓일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면 법칙을 왜곡하면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윤희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니까 법칙을 어떻게 왜곡하냐고요. 센타울처럼 법칙을 속이는 시설을 만들까요? 인공 세계 만들어요? 그게 얼마나 신적인 위업인지 감이 안 와요? 아니, 설령 만들었다 쳐요. 그 시설 돌리는 에너지는 어떻게 마련할 건데요? 지금 신살 병기 만들 자원도 빠듯한 걸 몰라요?”

윤희정이 그렇게 쏘아붙이는데도 소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려운 걸 혼자 해내는 사람이 하나 있잖아요.”

“에? 뭔 말이에요. 그런 사람이 있을 리…….”

문득 윤희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겨우 깨달은 것이다.

윤희정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미친!”

그녀가 손을 까닥거리며 미친 듯이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법칙?! 법칙! 법칙 같은 소리를 하네! 우리한테는 신이 있었잖아! 승리 아가씨! 우리 승리의 여신!”

그리고 수레를 버리고 허둥지둥 떠나가는 윤희정. 사람들은 그녀가 남기고 간 수레에서 카페라테를 하나씩 챙기며 수군거렸다.

“와…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권승리 아가씨 능력이 사기는 사기구나.”

“야, 근데 이렇게 생각하니까 걱정되지 않냐? 발전한 차원 문명들도 어마어마한 시설을 세워서 해내는 일을 그냥 혼자 해 버린다는 것 아냐? 그게 사람이 다룰 수 있는 힘인가… 건강 괜찮으실지 모르겠어.”

소녀도 그 사이에서 카페라테 하나를 챙겨서 다시 아기 고양이처럼 길을 걸었다.

소녀의 머릿속에도 권승리에 대한 생각이 떠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면 나이대가 비슷한 여자아이 중에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배짱이 맞는 사람은 권승리 정도밖에 없다.

지금 밖을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너무나 어색했던 소녀는 권승리에게 도움을 청해 볼까 잠시 생각을 했지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이 이 모습을 본다니… 나중엔 몰라도 지금은 수치스러워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던 소녀의 귀에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덩치! 트라팔가스의 사절이라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데?”

[…설마 나한테 한 말인가, 꼬마?]

“너 말고 다른 덩치가 있나? 전투 종족이라 그래서 꽤 기대했는데… 흠?”

늘 듣던 것과는 달리 얄밉기 그지없는 목소리.

하지만 틀림없는 까막이의 목소리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소녀는 화들짝 놀라 골목으로 숨었다.

‘쟤는 왜 여기서 다른 차원 사절한테 시비를 걸고 있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자존심이 상한 트라팔가스의 사절과 까불대는 까막이 사이로 흉흉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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